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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당 송영대 Jun 06. 2016

고전에게 길을 묻다 #2

만물의 근원은 먼지다.

철학자의 아버지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아르케:arche)은 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탈레스가 최초로 던졌기 때문에 탈레스는 철학자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한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물은 모든 생명을 양육하는데 필수요소라는 것입니다. 물이 없는 곳에서 생명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물은 액체상태에 있지만 기온이 내려가면 얼음이나 눈으로 변화합니다. 고체형태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불을 가하여 온도를 높이면 수증기로 변화합니다. 즉 기체형태로도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죠. 세 번째는 물에 대한 신화에서의 영감입니다.

탈레스에게는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B.C. 610~545)라는 제자가 있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스승인 탈레스가 내걸었던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명제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물은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양육하는데 필수적인 것은 인정을 하지만 물과 반대되는 성질의 것들을 생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지요. 물과 반대의 성질이라고 하면 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과 불은 상극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물과 흙도 반대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아낙시만드로스는 “경험적 성질을 띤 물질은 아르케(만물의 근원)가 될 수 없다. 아르케는 경험세상이 구체성을 벗어나야 한다.”라며 스승인 탈레스의 주장을 비판하였습니다. 모든 만물이 나오려면 분량에 제한이 없어야 하고,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경계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러한 내용들을 포함하는 새로운 단어는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것은 ‘아페이론(aperion)’이고 ‘무규정자, 무제한자’를 뜻합니다.

아낙시만드로스에게는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B.C. 588~528?)라는 제자가 있습니다. 아낙시메네스는 스승인 아낙시만드로스가 그의 스승인 탈레스를 비판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정했습니다. “규정된 물질은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아낙시만드로스의 말 “만물의 근원은 아페이론이다.”라는 말에도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무규정자에서 규정자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아낙시메네스는 물은 고정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르케가 될 수 없고, 아페이론은 규정된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아르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여 아낙시메네스는 물질 중에서 가장 비규정적인 것을 찾게 되었고, “만물의 근원은 공기다.”라는 명제를 찾게 되었습니다. 공기는 평소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추운 곳에서는 입김으로 그 존재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공기는 물보다는 규정성을 적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물을 만들어 내는데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공기가 농축되면 바람이 생겨나고, 바람이 농축되면 구름이 생겨나고, 구름이 농축되면 물이 되어 비가 내리며, 물이 농축되면 얼음과 같은 고체가 생겨납니다. 공기가 빨리 움직이게 되면 불과 같은 유동적인 물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공기의 농축과 희박을 통해서 설명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위의 내용은 한국형 무크(K-MOOC)에서 가톨릭대학교 박승찬교수님의 〈서양철학의 전통〉 강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이 내용으로 보면 물질을 대상으로 하는 자연철학자들 밀레토스 학파들의 주장한 아르케는 아낙시메네스에 의해 결국 ‘공기’로 규정되었습니다.

박승찬교수님의 온라인 강좌를 보고 난 후 이외수선생님의 신간 《먼지에서 우주까지》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외수선생님께서는 《먼지에서 우주까지》에서 ‘먼지는 우주의 근원 물질’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아낙시메네스의 “만물의 근원은 공기다.”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외수선생님의 ‘먼지’에 대한 견해를 책을 통해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산(泰山)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그 시작은 먼지 알갱이들의 결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논리를 적용하면 거대한 행성조차 수많은 먼지로 형성된 것이 되죠. 태산이나 행성을 쪼개나간다고 생각해봅시다.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다 보면, 결국 한 알갱이의 먼지가 남겠죠. 먼지는 무한(無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중략-

우리는 먼지를 ‘먼지라는 이름의 우주’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인식에 다다를 때 우리는 “작은 것 안에 큰 것이 들어 있다.”는 신비로운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고, 이 문장의 의미를 우리 가슴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먼지가 하찮은 것이 아니고, 쓸고 닦아내야 할 귀찮은 존재만이 아니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면 세상에 대한,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에 대한 태도가 바뀔 것입니다. 세상에는 진실로 하찮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면 비로소 선(善)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환원하고 환원하면 우주만물이 결국 먼지에 불과합니다. 가장 하찮게 여겼고 보잘것없이 생각해온 그것이 가장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자의식을 내려놓게 만듭니다. 먼지는 자의식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로 떠돌지요.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가는, 정착하려는 의지가 완전히 사라진 자유방임 그 자체입니다. 그 누구도 먼지처럼, 먼지의 이런 자유로운 속성을 살아가고 있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먼지는 엄청난 스승입니다.

만물이 먼지로 화하는 방향을 바꾸어놓으면, 먼지는 모든 것의 시작이 됩니다. 먼지가 모여서 가스층을 이루고,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열을 내고, 핵이 만들어지고, 분열하고, 폭발하고, 존재하지 않던 원소들이 만들어지고, 결합하고... 그러다 마침내 별이 됩니다. 항성이 생기고, 행성이 생기고, 위성이 생기고... 그렇게 우주가 만들어집니다. 이 광대무변한 우주의 시작이 먼지였습니다. 먼지는 최초의 우주이면서, 또한 지금도 ‘먼지라는 우주’로 존재합니다.”     


이외수선생님께서는 생명체로는 ‘지렁이’를 스승으로 모시고 계시면서 무생물체로는 ‘먼지’를 스승이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자연이 곧 우리네 삶의 큰 스승이라는 것을 직접 삶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이지요.

‘역사는 반복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현재 현인들의 통찰은 이미 2,500년 전의 철학자들의 깨달음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 보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옛 선인들의 깨달음을 모방했다거나 표절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삶 속에서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은 하나로 통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외수선생님께서는 《먼지에서 우주까지》에서 ‘인연’과 ‘깨달음’ 그리고 ‘공부’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기회는 인연의 다른 말입니다. 세상엔 우연이란 건 없지요.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연히 깨닫는 건 없어요. 살을 깎는 노력과 수없이 무너지는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운 끝에 깨달음에 닿는 것도 억겁토록 쌓인 인연의 결과입니다. 수없이 많은 전생에서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견뎌내지 않고 현생에서 깨달음을 이루는 건 엉터리없는 얘기입니다. -중략-

인연의 출발은 공부입니다. 공부를 하면 인연이 시작되는 겁니다.”     


‘인연의 출발은 공부이고, 공부가 인연의 시작이다.’라는 이 글을 읽는 순간 지난 6년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15년의 직장 생활을 뒤로 하고 ‘공부’가 하나의 업(業)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신념으로 시작하게 된 1인 기업을 길. 끈임 없이 발품을 팔며 강연회를 찾아다녔습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강연회를 찾아다니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감명 깊은 강연을 들으면 강사님과 사진도 찍고, 그분들을 강연을 글로 남기며 ‘배워서 남주기’를 실천하게 되었지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업의 CEO, 대학 교수, 배우나 가수 같은 연예인, 정치인뿐만 아니라 시인, 화가, 사진작가 등 예술인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지금 사부님으로 모시고 있는 이외수선생님도 열심히 공부하고 글을 쓰며 쫓아다닌 덕분에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게 되었지요.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화엄경에 의하면 십 천겁의 동종선근자(同種善根者)라야 맺을 수 있다는데 말입니다. 이외수선생님께서는 《먼지에서 우주까지》에서 ‘인문학(人文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마음 좋은 사람이 많은 세상입니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은 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마음 좋은 사람들이에요. 선계에 있는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죠. 마음공부라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 좋은 사람이 많아지면 그곳이 바로 선계가 되는 거죠.

우리가 하는 공부 중에 마음 좋은 사람을 만드는 공부에 해당되는 게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학공부 하고 철학공부 하고 예술공부 하는 것이 마음공부 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다가 ‘나보다 남을 위한 삶을 살자.’라는 신념으로 1인 기업을 선택한 저는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해서 ‘배워서 남주기’라는 콘셉트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자기계발 공부로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모든 공부가 인문학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결국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깨닫고 인성을 기르는 것이 진정한 공부이고, 그것이 곧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공부라는 것이 하면 할수록 아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이외수선생님의 문학교실 연수생이 되어 가르침을 받게 되었지요. 연수생이 된 것은 또 다른 세상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늘 방 한 쪽 구석에서 칩거(蟄居)하며 책만 파고 글만 쓰던 저를 자연의 세계로 안내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곳은 화천 다목리에 위치한 감성마을입니다. 저는 이 곳을 선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속계에서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고, 정겨운 새소리, 힘찬 계곡의 물소리, 그리고 각종 날짐승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제 일상과 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도 《먼지에서 우주까지》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마음공부도 일종의 학습(學習)이라 자칫하면 습관(習慣)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흔히 ‘습이 된다.’는 말이 뜻하는 것처럼 굳어져버리는 겁니다. 마음공부도 습이 되어버리면 발전이 없어요. 그 자리에 맴을 돌게 되죠. 이 경우에 딱 맞는 인연이 찾아지면 습에서 빠져나와 점핑을 하게 됩니다. 한 단계 훌쩍 도약하는 거죠.”     


이외수선생님의 제자가 된 이후로 글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고, 교육부에서 주체한 공모전에서 장려상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루었으니 한 단계 훌쩍 도약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외수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고전과의 연관성을 자주 보게 됩니다. 서두에서 보았던 것처럼 서양철학에서 아낙시메네스가 “만물의 근원은 공기다.”라고 말한 것과 이외수선생님께서 《먼지에서 우주까지》에서 언급하신 “먼지는 우주의 근원물질이다.”는 분명 그 의미를 같이 하는 것이고 삶 속에서 같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외수선생님의 글 속에서는 동양철학의 향기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장편소설 《황금비늘》, 《괴물》, 《칼》, 《장외인간》 등에서도 그 향기를 느낄 수 있지만 이번에 신간으로 출간된 《먼지에서 우주까지》에서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일전에 선생님과 식사 자리에서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제 경우에는 맹자의 성선설보다는 순자의 성악설을 따릅니다.”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간이 선(善)하다는 것과 악(惡)하다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현상이니라.”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무릎을 쳤습니다. 선(善)이니 악(惡)이니 하는 것들은 그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현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어떤 우화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의 모습을 찾아보았더니 한 교회의 목사님이었다. 그리고 다시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의 모습을 찾아보았더니 일전에 천사처럼 보였던 그 목사님이었다.’ 이 우화가 바로 선(善)과 악(惡)이 본성이 아닌 현상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반증해 주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과 연관성을 보이는 글을 《먼지에서 우주까지》에서는 아래와 표현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신의 본성에서 먼지의 본성까지, 본성은 하나입니다. 그 본성은 사랑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선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자비라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말한 사랑이나 선이나 자비는 변화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현상과는 다릅니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 즉 증오나 악은 현상입니다. 변화하고 작용하는 현상은 본정이 아니죠. 흔히 ‘진리는 영원불변하다.’라고 말할 때, 진리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본성입니다.

사실 진리나 본성에는 반대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증오는 사랑의 반대말이 아닐, 본성에 따르지 않아서 생겨나는 ‘미워하는’ 현상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세상을 다양한 시각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외수선생님께서는 문학교실 수업에서 단어(생어(生語)와 사어(死語)) 채집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시면서 물아일체(物我一體)를 강조해 주셨습니다. 사물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나무의 특성과 자신의 습관이나 성격이 비슷한 점을 찾는 다거나, 나무의 입장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곧 관점의 변화를 말씀하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내용을 《먼지에서 우주까지》에서는 ‘관측자의 위치’를 예를 들며 말씀해 주셨습니다.     


“관측자의 위치를 바꿔야만 ‘바깥’을 볼 수 있고, 동시에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포자가 되고 우리가 세균이 되고 우리가 벌레가 되어봐야 사고에 유연성이 생기고, 유연한 사고를 통해야만 만물과 우주를 사색할 수 있습니다. 지구인의 방식으로만 우주를 본다는 건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에 불과하죠.”     


“신과 소통하려면 우리 자신을 정(精)-기(氣)-신(神)이 고루 조화된 건강한 상태로 유지해야 해요. 그래야만 자연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우주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자연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우주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결국 그 안의 현상들이 ‘초자연’이 되어버리고, 신비에 빠지고, 몽매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신의 사랑도 아름다움도 우리 것이 될 수 없어요. 낙엽이 되어보고 돌이 되어보면 낙엽도 알게 되고 돌도 알게 됩니다. 알면 느끼게 되고, 느끼면 깨닫게 되죠.

자연은 늘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지하지 못하는 건 우리가 그걸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에 눈을 줘보세요. 그러면 보입니다. -중략-

관측자의 위치를 바꾸기만 하면 둘 모두 자연의 존재가 됩니다.”     


《대학》에서는 삼강령과 팔조목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삼강령은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신(止於至善)을 말하고, 팔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말합니다. 그중 팔조목에서 수신 이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을 격물로 치는데요. 격물이란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물의 이치란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고 우주의 진리를 밝히는 것입니다.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최고의 방법은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즉 사물의 입장이 되어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외수선생님께서 《먼지에서 우주까지》에서 “포자가 되고, 세균이 되고, 벌레가 되어봐야 만물과 우주를 사색할 수 있다.”라고 말씀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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