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위기 :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 안의 개구리

by 비나 Binah

자동화로 인한 구조조정 대란이 지나가고 회사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다시 루틴하게 돌아갔다. 운 좋게도 추가적인 정리해고는 없었고, 평화로운 나날이 2년 간 이어졌다. 나는 안온한 일상 속에서 소소한 변화들을 통과하고 있었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기업은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지, 직원에게 ‘안온한’ 곳이어서는 안된다는 걸.



3년차에 찾아 온 매너리즘과 새로운 가능성


직장생활의 위기는 3, 5, 7년차에 온다고 했던가. 일 한지 3년이 넘어가면서 슬슬 나에게도 매너리즘이 찾아왔다. 환경적인 요인이 컸다. 콘텐츠의 가치와 퀄리티를 추구하던 회사의 방향이 ‘트래픽 극대화’로 변하면서 조직의 미션이 흐릿해져갔다. 이제 우리는 '좋은 콘텐츠'가 아니라 '잘 클릭되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했다. 숫자로만 평가되는 일은 점점 기계적으로 변했고, 나는 재미를 잃어갔다. 그렇게 좋아했던 일에 더 이상 설레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즐거웠던 건 콘텐츠 자체에 대해 논의하고 가치를 고민하는 과정이었는데, 숫자가 곧 가치가 된 회사에서 그런 논의는 의미를 잃어갔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업무를 경험하게 되면서, 이 방향으로 이직을 노려볼까? 라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우리 팀이 운영하던 콘텐츠 서비스는 우리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직접 기획까지 해보라는 사내 공감대가 형성됐다. 덕분에 나에게도 기획 업무가 주어졌다. 내가 운영하는 서비스를 직접 설계하고 도면을 그려보는 일, 나의 기획이 개발을 거쳐 실체가 되는 경험.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설계한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짜릿했다. 매일 반복되는 루틴이 아닌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을 경험하며 단위마다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처음 느껴보는 보람을 가져다주었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 안의 개구리처럼


그럼에도 선뜻 이직을 시도하지 않았던 건 객관적으로 우리 회사, 우리 팀이 소위 말하는 ‘꿀직장’이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업무 강도, 적당한 복지, 좋은 사람들. 팀장님은 인간적이었고, 조직은 성과로 직원들을 닦달하지 않았다. 팀원들과 "우리는 야생성을 잃었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온실 속에 있었다. 일은 루틴했고, 문제는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깥 시장은 전쟁터였고, 우리가 편한 만큼 조직은 도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장의 편안함과 안락함이 너무 좋아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 안의 개구리처럼.


냄비 속 온도가 100℃에 다다른 것은 2021년. 시장 상황은 회사에 불리하게 흘러갔고, 매일의 일에 성실할 줄만 알았던 직원들은 상황을 타개할 돌파구를 만들지 못했다. 수익성이 점점 악화되되면서 모회사의 압박이 시작됐다. 결국 대표이사가 해고되었고, 베일에 쌓인 신임 대표가 외부에서 선임되었다. ‘컨설팅펌 출신의 M&A 전문가’라는 쎄한 이력의 그는 사실상 대규모 정리해고 및 조직개편을 위해 오는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한창이던 때, 나는 감정적 트라우마를 남기고 간 사건을 겪었다.


첫번째 위기 때도 그랬듯 정리해고는 언제나 일방적이어서, 직원들은 무방비하게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낯선 외부인사가 조직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직원들을 대놓고 인건비로 취급하는 상황은 한층 더 데미지가 컸다. 해고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불필요한 일을 시키고, 면전에서 망신을 주는 일이 반복됐다. 당일 전화로 해고 통보를 한 뒤, 반발하는 직원들에게 폭언과 조롱을 퍼붓는 일도 있었다. 나는 좋아했던 팀장님과, 가장 친했던 동료를 포함한 3명의 팀원을 한꺼번에 잃었다. 그리고 졸지에 팀에서 가장 선배가 되었다. 우리 팀의 관리 책임을 이리저리 핑퐁시키던 사측은 방법이 마땅치 않자 "너를 위한 좋은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며 대뜸 나에게 팀장직을 들이밀기도 했다.


나는 패닉에 빠졌었다. 사측의 행동에 분노가 올라올 때면 숨이 가빠질 때도 있었고, 심리상담소에 상담글을 남긴 적도 있었으니, 아마 그 상황이 꽤나 벅찼던 것 같다.



두번째 위기가 나에게 남긴 것들


아이러니하게도 이 쓰라린 사건을 겪으며 나 자신과 기업의 생리에 대해 많은 것을 뼈저리게 배웠다. 쓰디쓴 약처럼 이 사건이 나를 한뼘 성장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를 종종 돌아보게 되는데, 나 또한 어리고 미숙했으며, 어른스럽고 똑똑하게 대처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나는 너무 관계의존적이었다. 사이 좋은 동료들에게 기대며 일했고, 팀장님에게 의지했다. 그들이 한꺼번에 없어지고 나 혼자 남는다는 사실에 패닉이 왔고,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모든 상황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회사는 결국 회사라는 걸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야 깨달았다. 회사는 누군가에게 기대는 곳이 아니라, 결국 내 힘으로 서야 하는 곳이라는 걸.


또 하나 배운 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취할 수 있는 건 취하는 게 낫다는 것. 구조조정이 시작되면 조직은 불안에 휩싸이고, 해고된 사람들뿐 아니라 자발적 이직자도 속출한다. 그때 그 상황에 너무 동요되기보다는 내 상황을 차분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혼란 속에서도 기회는 있기 때문이다. 태풍이 지나가고 재건이 필요한 시점에는, 이직에 도움이 될 만한 프로젝트나 직책을 맡을 기회들이 생긴다. 필요하다면 그걸 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 나는 그때 “절대 이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을거야” 라는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내 마음을 보호하는 데는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실리적으로는 손해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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