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숨겨둔 직장’에서 깨닫게 된 것

by 비나 Binah


간절히 바라던 안정을 손에 넣고서, 나는 예상치 못한 성장욕구와 새로운 불안에 직면했다. 불안정하면 불안정해서, 안정되면 정체될까 두려워지는 간사한 마음...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토록 바라던 ‘공공’기관에서 합격 통지가 왔다


본격적으로 이직 준비를 시작하면서 나는 IT 서비스 기획자로의 전환을 꿈꿨다. 문제를 정의하고, 서비스를 분석하고, 디테일한 기획 문서를 만드는 작업들이 꽤 적성에 맞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때마침 서비스 기획자나 PM이 문과생들의 유망 직종으로 주목받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했다.


같이 일했던 사람들 중에도 비슷한 루트로 전직한 이들이 더러 생겼지만, 나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지원서 제출, 탈락, 서류합격, 면접 후 탈락. 같은 과정이 순서만 바뀌어 반복됐다. 그런데 지쳐가던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찾아왔다. 그토록 바라던 정년 보장이 되는 공공기관에서, 내가 바랐던 직무로 경력직 합격 통지를 받은 것이다. 공공기관은 경력직 채용이 드물고, 어려운 취업 시장에서 직무 전환 자체도 어려운 일이었는데, 절묘하게 딱 내가 바라던 자리에 합격한 것이다. 뜻밖에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은 행운 같은 기회였다.



‘신이 숨겨둔 직장’의 함정


새 회사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위 ‘신이 숨겨둔 직장’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고용은 안정적이고 업무 강도도 낮은 편인데, 이 사실이 밖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였다. 그 시기 내 삶의 화두는 ‘나다운 일’ 보다 안정적으로 자리잡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이직이 최선의 선택이라 믿었다. 전사에 나 혼자뿐인 특수 직렬이라는 점은 마음에 걸렸지만 예정된 프로젝트가 있었기에, 잘만 하면 경력도 발전시킬 수 있을거라 기대했다. 드디어 불안한 시기가 끝났다는 안도감. 그때 나는 부모님에게 “이 회사에 젖은 낙엽처럼 붙어있을 것”이라 말하곤 했었다.


적응기를 지나면서 회사 생활은 기대 이상으로 무탈하고 만족스러웠다. 대외적으로도 회사가 잘 되던 시기였고, 좋은 팀장님과 동료들, 여유로운 분위기, 빠짐없이 지켜지는 노동 규칙들까지. 내가 채용된 이유였던 프로젝트도 물 흐르듯이 착수되면서 평화로운 1년을 보냈다. 동료들과 모이면 이때가 회사의 전성기였다고 회상하곤 한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직장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너무 평화로운 만큼 ‘발전’이나 ‘성장’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거나 소위 ‘일을 벌이는’ 사람은 유난스럽고 특이한 존재로 여겨졌다. 아이러니한 건, 그게 바로 내가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였다는 사실이다. 안정과 평온을 원했던 내게 이곳은 기대 이상이었지만, 앞으로의 내가 성장하기보다는 정체되고 고여가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정말 그런 삶을 살고 싶은게 맞나?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불편한, 양가적인 감정이 나를 괴롭혔다.


또한 직무 전환을 한 나로서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았는데, 그게 티가 나지 않을만큼 프로젝트가 얼레벌레 굴러갔다. 유일한 서비스 기획자로서 방향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때마다 나는 확신이 없었다. 겉보기에는 무난히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이 프로젝트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내심 불안했다. 내가 프로젝트를 망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고, 성장이 멈춘 것 같은 답답함도 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1년을 쏟아부어 목표 일정을 겨우 맞춰낸 프로젝트는 황당하게도 회사의 갑작스런 예산 이슈로 오픈조차 되지 못한 채 철수되었다. 다 완성한 서비스가, 그냥 통으로 사라졌다. 설령 이 회사가 내 마지막 회사가 아니더라도, 큰 서비스를 런칭시켜본 경험이 남을 거라고 믿었는데...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이었다. 정말 이대로 ‘잃어버린 1년’이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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