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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조 Jan 12. 2024

전남친을 버스에서 만나면

143번 버스


종로에 있니?


여름의 끝자락에 온 연락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선 사람들을 피해 걷다가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어떤 감정도 엿볼 수 없는 건조한 메시지였다.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대낮에 받은 전남친의 메시지는 타격감이 있었다.


버스에서 너를 봤어.


메시지가 이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떠나가는 버스를 바라봤다. 육중한 버스는 마치 파란 고래처럼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143번 버스의 뒷창문은 작고 어두웠다. 멀어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답장을 썼다.


같은 버스를 탄 모양이네. 버스에 사람이 많아서 몰랐어.


치대는 사람들 때문에 한껏 뾰루퉁한 얼굴이었을테지. 길게 자란 생머리에 까만 원피스를 입은 내가 낯설었을거야. 지팡이와 중절모가 난무하는 종로의 143번 버스. 그는 그 혼란 속에서 나를 찾아내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수많은 얼굴과 몸짓 속에 나를 분간한 사람. 한때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



한때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



대화창을 올려보니 그가 헤어지기 직전 보낸 장문이 남아있었다. 미안하고 고맙고 진심이었다는 말들. 날이 갈수록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들이 쌓여서 마음이 아프다는 이야기. 말이 없던 그가 내가 일하던 근처에 와서 썼다는 긴 문장의 편지가 그대로 살아있었다. 글의 구석구석을 읽다가 문득 한 때가 떠올랐다.


내 생일날. 그는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왔다. 케이크, 인형, 사탕, 편지 같은 작고 귀여운 것들을 풀어놓으며 나를 웃겼다. 태어나서 가장 많이 웃었던 생일이었다. 그의 메모장에는 나에 대한 항목이 따로 모여 있었다. 그 안에는 내가 스치듯 지나가며 좋다고 했던 것들이 모두 적혀있었다. 장미보다 프리지아, 감기가 걸리면 짜이티, 산보다 바다. 소소하고 보잘것 없던 취향들. 그는 그것들을 그만의 언어로 기술해놓았다. 자신의 둔감함을 탓하던 그가 나를 사랑했던 방식이었다.


내가 그를 가장 사랑했던 순간은 아마 낙산공원에서였을 것이다. 술을 잔뜩 마시고 올라선 공원 산성에서 나는 먹은 것을 게워냈다. 마스크와 얼굴이 잔뜩 더러워져서 울상이 된 나를 그는 피하지 않았다. 휴지로 내 얼굴을 찬찬히 닦고 화장실에 데려다주었다. 시큼한 향이 베인 내 손을 잡고 편의점에서 물과 마스크와 물티슈를 사 안겼다. 그리고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새 마스크를 귀에 걸어주며 나를 안쓰러워했다. 야경을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 과했던 모양이라면서 스스로를 원망했다.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을만큼.


나의 가장 못난 모습을 안아주었던 사람



그는 나의 건강과 미래를 걱정했다. 그리고 언제가 되든 밥 한 번 먹자는 말로 메시지를 끝마쳤다. 너는 똑같이 생긴 사람들 속에서 여전히 나를 볼록 튀어나온 존재로 봐주는구나. 세상 많은 조각들 중에 내가 좋아하는 조각을 애써 기억하려 했던 사람이구나. 


저 많은 별을 다 세어 보아도 그대 마음은 헤아릴 수 없어요.

그댄 나의 어떤 모습들을 그리도 깊게 사랑했나요.


너드커넥션의 노래 가사를 곱씹으며 버스정류장에 한참을 서있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로 버스 여러대가 스쳐갔다. 그와 헤어진 지 2년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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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드커넥션 - 좋은 밤 좋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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