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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조 Jan 22. 2024

헌팅 당한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여자 외모에 대한 남자들의 환상



일상에서 일어나는 가장 당황스러운 일이라면 헌팅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난생처음 헌팅 당한 날을 기억한다. 스무 살 무렵의 일이다. 허약해진 몸을 달래고자 달에 2만 원짜리 헬스장을 다녔다. 헬스장은 동사무소에 작게 딸린 것으로 늘 한산했다. 운동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고 낡고 튿어진 기구 열댓 개와 덤벨이 전부였다. 늘어진 흰 티를 입고 러닝머신을 달리는 아줌마. 5분에 1번씩 덤벨을 들어 올리는 할아버지. 핸드폰을 보느라 사이클을 타는 둥 마는 둥 하는 여자 중학생. 가끔 오는 사람들의 리스트는 그 정도였다. 하지만 여름휴가철이 되면 그런 사람들마저 드물어지는, 보잘것없는 동네 헬스장이었다. 사람이 없어 오히려 좋았달까. 나는 초저녁에 들러 여유롭게 사이클을 타곤 했다. 사실 운동은 핑계고 끝나고 먹는 우유 아이스크림이 진짜 이유였지만.


“여기 자주 오시나 봐요?”


어느 날, 헬스장에서 낯선 남자가 말을 걸었다. 그날도 멍하니 사이클을 타는 중이었다. 넘쳐나는 빈 운동기구들을 두고 남자는 굳이 내 옆자리 사이클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서른 살쯤 됐을까. 이마가 보이도록 단정하게 자른 머리. 구김 없이 깨끗한 흰 티셔츠. 그을린 갈빛 피부색. 나쁜 사람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유쾌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인상. 내 답변은 시원찮았지만 그는 나에게 끈질기게 말을 붙였다.


“제 이상형이 사실 뿔테 안경 쓴 여자거든요···.”


뿔테 안경을 쓴 내가 그 말에 당황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자 남자는 신이 나서 말했다. 자신의 초등학생 시절 첫사랑이 치아 교정기에 뿔테 안경을 쓴 꼬맹이였고 그 아이를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으며 나를 본 순간 그 아이가 생각났다는, 전투적인 고백이었다. 솔직해질수록 그의 얼굴은 붉어졌다.


“맥주 한 잔… 하실래요?”


스무 살의 나는 어리벙하게도 그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끌려간 맥주집에서 그는 자신의 직업과 지난 사랑 고민들을 잔뜩 털어놓았다. 애니메이터고요, 연애는 얼마 하지 않았지마는, 앞에 계신 분이 이상형인 건 알고요.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활자들이 호프집 테이블에 떨어졌다 천장으로 떠올랐다. 나는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맥주집을 나서면서 그가 사귀자는 이야기를 하지만 않았어도 꽤 괜찮은 추억이었으련만. 도망치듯 벗어나서 집으로 돌아간 며칠 후. 그는 새벽 2시에 장문의 카톡을 남기고 나를 차단해 버렸다. 뿔테 안경 쓴 네가 그럴 줄 몰랐다면서.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면서. 


그로부터 3년쯤 지나 반전된 사건이 있었다. 대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나가는 길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같은 학년 오빠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는 나를 데리고 빈 강의실에 데려가더니 말을 않고 뜸을 들였다. 화려한 청자켓을 이리저리 고쳐 입던 그가 작정한 듯 불쑥 말을 꺼냈다.


“솔직히 너 안경 쓴 거 진짜 별로야.”


사실 나는 그의 얼굴점을 세고 있었다. 눈썹 아래에 하나, 볼에 둘, 턱 밑에 하나. 다섯 번째 점을 찾아낼 때쯤, 나는 그의 얼굴이 참으로 둔탁하고 비율이 엉망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이 내 뇌리를 스치는 순간 그가 내 안경에 대한 충고를 내놓은 것이다. 당황한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 뿔테 안경이 왜?”

“여자는 안경 쓰면 안 예뻐.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는 내 아이라인의 각도, 얼굴의 생김을 설명했다. 내 얼굴은 동그랗고 눈매는 동양적으로 찢어졌으니 그 위에 얹혀진 네모 뿔테가 어울리지 않다는 분석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안경을 잡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서클 렌즈를 껴라, 렌즈를 끼면 남자들이 좋아한다…. 이런저런 충고들이 이어졌다. 문뜩 안경 낀 내가 예쁘다는 헬스장 남자의 말이 기억났다. 붉은 얼굴을 하고 내 얼굴과 안경의 조화가 이상적임을 주장하던 그의 말들이. ‘예쁘다’와 ‘별로’라는 단어가 치고박고 뒤섞여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도망치듯 강의실을 나왔다.


이후 나는 안경을 끼면 ‘안 예뻐진다’는 이유로 렌즈를 애용했다. 남자들 앞에서는 꾸역꾸역 렌즈를 꼈고 안경 낀 날이면 못 볼 꼴을 보여준 듯 도망 다녔다. 다년간 렌즈를 끼며 각막은 건조해지고 시력은 매번 더 나빠졌다. 눈동자에 들러붙지 않는 렌즈를 집어던지며 울었던 날. 죽상을 하고 나간 자리에서 당시 남자친구는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리고 얼마지 않아 나는 400만 원짜리 라식 수술을 감행했다. 이제 아무도 내 눈이든 안경이든 무엇이든 간에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진 않겠지 하고서.


하지만 코로나가 끝나가던 지난여름. 길을 걷던 나에게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 나를 보고 돌아왔다면서. 내 눈매가, 스타일이 맘에 꼭 들었다면서. 이번에는 ‘눈매’인가. 내 눈매는 또 남들과 무엇이 그리 다른가. 나의 헛웃음의 의미를 몰라 남자는 한동안 어리둥절해했다. 당황스러운 일은 인생에서 이토록 멈추지 않는다. 삶의 궤도는 이렇게 천방지축 오르막 내리막이다.







[+240123 추가]

이 글의 목표는 '저의 외모 자랑하기'가 아니라

'남성의 시선에서 여자 외모를 재단하는 것을 풍자'하는 것입니다.


제 외모에 대한 상상보다는 

그 의미를 중점적으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론 모두 실화입니다.








표지 출처: Vikki Dougan

'장기하와 얼굴들 - 그건 니 생각이고'를 들으며 썼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qBMnfi3fzs







제가 어떤 연애를 했는지 궁금하시다면 아래의 글을 한 번 권해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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