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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조 Feb 02. 2024

키 큰 여자가 농구선수와 사귀면

여자는 풍채


엄마는 165cm의 키 큰 강골(強骨)이다. 올해 환갑이건만 단단한 체격에 힘이 센 할머니다. 사실 이런 엄마의 외모는 집안 내력이다. 어린 시절 엄마는 마을에서 가장 키 큰 여자 아이였다. 190cm에 육박하는 형제 틈바구니에서 자란, 기운찬 이씨 집안 첫째딸이었다. 키 덕분에 자기를 얕잡아보는 남자 아이가 없어서 좋았다던 엄마. 호랑이같은 성격에 꼭 맞는 몸을 지녀서 그랬을까. 엄마가 겁을 내거나 아쉬운 소리하는 모습을 좀처럼 본 적이 없다. 시장 흥정에서도, 시어머니와의 싸움에서도 옳은 소리를 올곧게 내뱉던 모습만이 선명하다.



나는 그런 엄마를 닮았다. 엄마보다 조금 더 큰 170cm로 늘 뒷번호에 뒷자리만 차지하는 아이였다. 7살 무렵. 나는 유치원 같은 반 남자 아이들을 부려 공터에 돌성을 지었다. 그 모습에 ‘저 가시내는 전생에 장군이었음이 분명하다’고 외할머니가 언급하자 엄마는 별말이 없었다. 하지만 성장통에 무릎을 감싸안고 있으면 ‘네가 나를 닮아서’라고 안타까워하며 혀를 찼다. 그리고 자기 집안 식구처럼 허우대가 멀쩡하지만 운동신경은 없을 것이라는 엄마의 예견도 맞았다. 중학교 체육 선생님이 나에게 핸드볼, 배구, 농구에 이어 높이뛰기까지 권했지만 좀처럼 잘하지 못했으니까. 옳지 못한 일에는 부득부득 목소리를 내는 것도 엄마를 닮은 성정이었다.



엄마를 꼭 닮은 나


나는 엄마를 닮아 키 큰 내가 좋았다. 하지만 남자들이 여자의 큰 키에 겁을 낸다는 걸 어느 순간 알게됐다. 스물이 넘어 처음 꺼내 신은 하이힐. 12cm 위로 올라선 내 모습에 자못 신기하고 자랑스러웠던 그 때. 180cm가 넘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피하던 남자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지하철 사람들 틈바구니에 서서 남자들의 머리 가마를 내려다보던 순간. 내가 세상에서 작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좋았다. 스스로가 세상을 차지한 부피가 크고 높을 때 얻을 수 있었던 안정감이 기뻤다. ‘여자는 자고로 까늘까늘하고 남자에게 폭 안길 수 있어야 한다’는 할머니 말에 콧방귀를 뀔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큰 키가 연애에 장애물이 된 적은 없었다. 키가 2m가 넘는 전직 농구선수와 사귄 적이 있다.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남자친구에게 꽂혔다. 남자친구의 큰 발바닥이 바닥에 턱턱 박히면 그 소리가 무척 컸다. 그의 옆에 서있으면 나는 작고 연약한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커다란 그의 품에 안겨서 할머니가 말한 ‘까늘까늘한 여자’로 사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큰 키만큼 나를 사랑하진 않았다. 그는 피규어를 사는 일에 미쳐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주는 선물은 몽땅 피규어였다. 그는 내가 헐값에 넘긴 노트북의 값을 몇 달 동안 치루지 않았다. 헤어지고도 지지부진하게 돈을 갚았다. 그리곤 '자금사정이 안좋아서 그러니 네가 이해하라'고 윽박질렀다. 덩치가 크면 정신연령도 높을 것이라 보는 건 착각이다.



정작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나와 키가 비슷했던 사람. 그는 본인의 키가 부족하다고 표현한 적도, 부끄러워한 적도 없다. 덩치가 컸던 농구선수 남친보다 훨씬 더 많이 나를 안아주고 내 손이 시릴까봐 노심초사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섬세히 살폈고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본인이 줄 수 있는 사랑을 퍼내고 또 퍼내어 나에게 힘껏 부어줄 뿐이었다. 남자를 볼 때 키보다 역시 마음 씀씀이가 중요하다 생각한 이유다. 그리고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 들었던 팟캐스트에서 ‘여자는 풍채’라는 말이 나왔다. 기세가 위엄 있고 떳떳한 것을 가리키는 ‘풍채’라는 단어가 여자 뒤에 붙으니 어색했다. 하지만 이내 그 문장이 쏙 마음에 들었다. 두터운 내 통뼈도, 큰 키도 장군감에 걸맞는 풍채라는 생각을 하니 재미있어졌다. 나는 남들을 지휘하고 원하는 말을 맛깔스럽게 끌어내는 일을 하니 현대판 장군이라고 해도 손색없지 않을까? 세상을 너무 겁없이 사는 딸이 걱정이라는 엄마는 그 의견에 피식 웃었다. 앞으로 계속 장군감으로 살라고 했다.


그 엄마의 그 딸.

풍채 좋은 모녀의 대화는 늘 그렇듯 씩씩하고 스스럼이 없다.













Adele의 Easy On Me를 들으면서 썼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HmzJm7UWVM




표지사진 출처: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1972 , Rotten Tomatoes

나머지: 핀터레스트


제가 어떤 연애를 했는지 궁금하시다면 아래의 글을 한 번 권해드려요

https://brunch.co.kr/@waytoyou/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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