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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무언가 만드는 사람

타고난 대로 살기

by 유조



아주 어린 나이부터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했어요.


심심할 때마다 종이접기를 하고

색연필을 들고 다니던 꼬마 아이.


초등학교 6년 내내

엄마를 졸라 미술 학원을 다녔어요.


그림을 잘 그리진 못했지만

물감과 스케치북을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추억의 나모 웹에디터


중학생 시절엔 나모웹에디터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좋아하는 가수의 팬클럽 홈페이지도 제작하고

픽셀을 찍어서 움직이는 gif 배너를 직접 만들었어요.


방문객이 꽤 많았어요.

갑작스러운 인기에 기뻤던 저는

교과서 대신 웹디자인 책을 들고 다니며

웹디자이너를 꿈꿨죠.


고등학생 때는 영화, 미술 블로그를 운영하며

블로그 스킨을 직접 포토샵으로 만들었고

네이버에서 활동하는 스킨 작가가 되기도 했어요.






경영학과생으로 살던 스무 살 무렵에는

당시 유행하던 UCC 공모전에 도전했어요.


UCC로 상을 타고

모 카드사의 공모전에 당선되어 호주를 다녀오고

유명 기업에서 영상 인턴을 했어요.


복수전공으로 영상미술을 했고

경영학과 친구들보다 미대 친구들이 더 많았어요.


하지만

그때까지 저는 제가 '창작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실력이 월등하게 뛰어나지 않으니까,

천재는 아니니까,

그냥 취미 삼아 하는 거니까,

라고 생각했죠.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대기업 자기소개서 몇 십 개를 쓰다가 현타가 왔어요.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얼마나 돈을 많이 벌 수 있을지 하루 종일 이야기하는 삶.

제게 그것만큼 끔찍한 건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갑자기 방송국 PD 시험을 치기 시작했어요.


합리적 연봉을 주면서

부모님이 수긍할 수 있는 직업이고

창작자의 개성을 인정하는 회사는

방송국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몇 년의 낙방 끝에

방송국에 입성했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그 안에서도 정말 많은 번뇌가 있었습니다.


저연차 PD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예술하지 마라'는 조언이니까요.


방송국에서도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물론 남의 돈과 시간과 인프라로 하는 일이니 당연하지만)

자유롭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서른 살쯤 되어서야

드디어 무언가 만드는 것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이 든 이후,

몇 년 동안 참 많이 우울했어요.


진로를 잘못 잡은 건 아닌지

그냥 돈 많이 주는 대기업에 갈 걸

괜한 객기를 부렸다 싶었죠.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쓴 글들을 정리하다가

저를 가르치셨던 작문 교수님께서

제 글을 가만히 읽어보시곤

'자네는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써야 하네'라고 말한 게 문뜩 기억났습니다.


그것은 칭찬이 아니고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본 노 교수가 알려준

삶의 방향 같은 것이었어요.


제 글의 지문이

소설이나 시나리오 쪽이었고

나의 상상이나 창작의 힘이

그쪽으로 향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늘 무언가 만들기 좋아했던 저는

이제

하얀 종이에 커서를 놓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고

저만의 인물을 주인공 삼고

나만의 배경 음악과

꿈꾸던 엔딩을 씁니다.



저희 부모님 집안에는

창작하는 직업을 가진 분이 한 분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스스로를 의심했던 것 같아요.

재능은 둘째치고 밥벌이가 될까 싶어서요.







요즘은 늦게나마 <더 글로리>를 보고 있는데

김은숙 작가가 만들어놓은 작은 세계와 소재들이

커다란 의미로 나아가는 게 신기했어요.


글을 쓰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무언가를 뱉어내어야 하는 것이 있어서

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더 글로리>를 쓴 김은숙 작가는 아마

지독한 가난을 겪고 가구 회사 경리 일을 하면서

삶의 다양한 결들을 배웠던 것 같아요.


부조리함을 체득한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이 많죠.


삶에 방황이 많을수록

본 것도 많고

쓸 것도 많아지고요.







요즘은

94살 김순임 할머니의 예쁜 시를 자꾸만 읽고 있습니다.

제 화분에도 꽃이 폈으면 좋겠네요.






요즘 듣고 있는 곡은

Raye의 음악입니다.

https://youtu.be/DL1zyUjzwno?si=A_Pso0evvL0aIk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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