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5] 8월 11일 (일)
여행의 막바지라 그런지 피로가 쌓였다. 호텔에서 조식 먹을 때 사진을 한 번씩 찍었는데,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는 그마저도 귀찮아졌는지 사진 한 장 없다.
헝가리는 온천이 유명하다. 헝가리의 온천 역사는 2000년 전 목욕 문화가 유행했던 고대 로마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로마인이 헝가리 영토에 들어오면서 목욕탕을 만들기 시작했고 16~17세기에 걸쳐 중부 유럽을 지배했던 오스만투르크에 의해서 로마 목욕탕이 터키식인 ‘터키탕’으로 발전하면서 지금의 온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다페스트 3대 온천으로 불리는 세체니, 겔레르트, 루다스 온천이 있는데, 호텔에서 가까운 루다스 온천을 가기로 하였다. 소진언니와 윤지는 호텔에서 쉬겠다고 하여 지현언니와 둘이서 갔다.
어제 눈으로 보았던 에르제베트 다리를 건너갔다. 아침부터 햇살이 강렬하다. 우산 겸 양산을 쓰고 걸었다. 에르제베트는 엘리자베스의 헝가리식 발음이다.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황후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붙인 다리다. 시씨라고 불리는 엘리자베스는 부다페스트 근교에 머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할 수 있도록 큰 공헌을 했던 황후로 헝가리인들이 그녀를 기리기 위한 다리를 만들었다. 1903년에 완공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크게 훼손되어 1964년에 흰색 철골을 이용한 현수교로 재건했다고 한다.
에르제베트 다리를 건너가면 다뉴브 강가에 루다스 온천이 있다. 450여 년 전 문을 연 터키식 온천으로, 사우나와 수영장도 있다. 온천 뒤에는 부다 지구로 연결되는 겔레르트 언덕이, 앞에는 엘리자베스 다리가 놓여진 다뉴브 강이 펼쳐져 있어 테라스의 야외 노천탕에서 다뉴브강의 야경을 보며 온천을 즐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온천, 사우나, 수영장 모두 이용할 수 있는 올인원 티켓을 구매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밤에 방문객이 더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오전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온천탕에 들어갔다. 부산의 온천으로 유명한 허심청보다 (온천만 비교하면) 규모는 훨씬 작고 탕의 수도 적었다. 하지만 따뜻한 물 속에 들어가니 그동안 쌓인 여행의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다. 지현언니와 나는 목욕하는 걸 좋아하여 이 탕 저 탕 번갈아 가며 헝가리 온천 체험을 하였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온 몸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아무 걱정 고민없이 편안하게 앉아 몸과 마음의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온천탕 안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테라스 야외 노천탕으로 이어진다. 다뉴브강 경치를 감상하며 온천을 즐기니 천국이 따로 없다.
가족, 커플, 친구들 단위로 온천을 즐기는 유형도 다양하였다. 특히 어떤 외국인 커플은 온천탕에서 애정행각을 벌여 민망하기도 하였다. 외국에서는 자연스러운건가?
수영장으로 가서 수영을 하였다. 수영을 할 때는 수모를 꼭 써야 한다. 너무 오랫만에 하는 수영이라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물이 깊었다. 도착지점에서는 발이 닫지 않아 당황하였다. 자유형, 배영, 평영 등 이리 저리 해 보았다. 너무 숨이 차서 자유형만으로는 한번에 끝까지 가기 어려워 결국은 평영을 하였다. 옆 라인의 헝가리 할머니는 물개처럼 쉼없이 계속 수영을 하셨다. 계속 숨을 헐떡이며 힘들어하는 나와 완전 비교되었다.
수영을 끝내고 잠시 휴식하며 숨을 고른 후 사우나 체험도 해 보았다. 핀란드식 사우나는 너무 뜨거워서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적당히 따뜻한 사우나에 들어가 땀을 빼고 사우나도 즐겼다. 사우나 입구에는 얼음이 있어 뜨거워진 몸을 식힐 수 있었다.
남녀노소 인종 상관없이 모두 같은 것(온천, 수영, 사우나)을 공유하며 즐기는 공간이다. 그동안 쌓인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날려버리고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주는 아주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온천, 수영, 사우나를 모두 즐기고 나니 오후 2시가 넘었다. 4시간 넘게 있은 것 같다. 호텔로 돌아가는 에르제베트 다리에서 저멀리 자유의 다리도 보인다. 자유의 다리는 68년 동안 합스부르크를 통치하였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다리로 원래 이름이 프란츠 요제프 다리였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에 대한 부다페스트 시민들의 원성이 커져 자유의 다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목욕을 하고 난 후라 허기가 졌다. 소진언니와 윤지를 불러내어 호텔 가까운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커다란 수제버거와 함께 마신 맥주가 얼마나 맛있던지... 오후에 아무 것도 안해도 될 것 같았다.
근처 슈퍼마켓에 들러 간식과 토카이 와인 한병을 더 샀다. 아들 줄 것만 사서 남편과 함께 마실 와인을 하나 더 구입하였다. 그러고나서 덥다는 핑계로 다시 호텔로 돌아와 해가 질 때까지 조금 더 있다 저녁 무렵 나가기로 하였다.
오후 5시경 다시 호텔을 나섰다. 바치 거리를 지나 우리가 간 곳은 성 이슈트반 대성당이다. 헝가리 왕국의 초대 국왕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인 성 이슈트반(이슈트반 1세)을 기리기 위해 1851년부터 1906년 사이에 세운 성당으로서 부다페스트에 있는 성당 가운데 최대 규모의 성당이다. 성당 앞 광장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고 가이드와 동행한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도 많이 보였다. 그 동안 많은 유럽의 내노라하는 성당을 보았고 늦은 시간이라 내부 관람은 따로 하지 않았다.
국회의사당 방향으로 가다 보면 자유광장이 나온다. 광장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점령에서 헝가리를 해방에 힘쓴 소련의 병사를 위한 소비에트 기념비가 있다. 헝가리가 공산주의를 청산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로널드 레이건의 동상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유대인을 추모하는 홀로코스트 기념비가 있다. 헝가리를 독수리 형태의 독일에 의해 공격받는 천사로 묘사하고 있는 기념비는 헝가리도 홀로코스트에 참여한 사실을 모호하게 한다하여 헝가리 유대인들의 반발을 초래했다고 한다. 그 기념물 앞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편지나 사진 등 개인적으로 걸어 둔 것 같은 기념물들이 있는 이유다.
인상적인 것은 그 기념물 앞에는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물분수가 있는데, 거기에서 춤을 추는 헝가리 사람들이었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짝을 지은 남녀 여러 명이 춤을 추고 있었는데, 온천천의 라인댄스 수업 같은 것인지 자발적 개인들이 모여 추는 춤인지 알 수 없었다.
아픈 과거를 기억함과 동시에 현재를 즐겁게 살아가는 헝가리인들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국회의사당의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그 옆에 있는 코슈트 러요시 광장(Kossuth Lajos Square)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잠시 쉬었다. 코슈트 러요시는 헝가리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로 1848년 헝가리혁명의 지도자였다. 혁명이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실패로 끝나자 나라 밖으로 망명해 싸우다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사망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와 같나 보다.
광장 한편에 라코시 마차시 기마상이 있다. 라코시 마차시는 헝가리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정치인으로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였다.
국회의사당 광장에는 언드라시의 기마상이 있다. 언드라시는 1867년에서 1871년까지 헝가리의 수상을 역임한 헝가리의 정치인으로, 그 뒤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무장관도 역임했다. 때로는 영어형 이름인 줄리어스 안드라시 백작이라고도 불렸다. 헝가리를 사랑한 오스트리아 시씨 왕후와도 좋은 관계였다고 알려져 있다.
헝가리 역사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장소이자,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헝가리 역사를 알 수 있는 장소임에 틀림없다.
쉬는 동안 옆 벤치에 멋지게 차려입은 한국인 커플을 보았다. 신혼여행을 온 것 같은데, 웨딩 촬영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다. 포토그래퍼로 보이는 남자는 사진기를 들고 촬영 컨셉과 일정 등을 설명하고 있고 커플은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지현언니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다뉴브 강과 국회의사당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모양이다. 어떻게 찍었을지 궁금하다.
해가 지기 전 국회의사당의 모습을 보고 그 옆에 있는 카페에서 식사를 하였다. 점심을 늦게 먹어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한창 성장기인 윤지는 다르다. 저녁을 먹을 사람은 저녁을 먹고 음료를 마실 사람은 음료를 마시고 저마다 취향대로 저녁 식사를 하고 나니 해가 졌다. 오늘도 멋진 국회의사당과 다뉴브 강의 야경을 볼 수 있다.
헝가리 국회의사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 귀족의회로, 헝가리 건국 1천 년을 맞은 1885년 공사를 시작해 1902년 완공했다. 길이 268미터, 폭 118미터로 축구장 두 배가 넘고 대형 회의장이 열 개, 사무 공간이 7백 개나 되는 엄청난 규모다. 헝가리의 역사 속 위인을 상징하는 90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시간에 따라 근위병 교대식도 볼 수 있고 내부에는 헝가리 왕가의 보물,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공간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규모가 큰 국회의사당이라고 한다.
국회의사당 옆 강변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 강변을 따라 세체니 다리 쪽으로 걸었다. 강변에 금속으로 만든 신발 수십 켤레가 있다. 헝가리에서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헝가리 출신의 영화감독과 조형예술가가 함께 만든 것으로 철을 이용해 저마다 다른 크기의 60켤레의 낡은 신발 조형물이다. 어두워서 그런지 처음에는 진짜 신발인 줄 알았다.
헝가리에는 80만명의 헝가리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중 60만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 중 1만 명 넘는 유대인이 다뉴브 강에서 총살을 당했는데, 거기서 유대인을 학살한 범인은 독일이 아니라 헝가리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부다페스트의 슬픈 역사다.
세체니 다리도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운 야경에 큰 기여를 한다. 부다 지역과 페스트 지역을 연결하는 최초의 다리로, 궂은 날씨 때문에 배를 띄우지 못해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이슈트반 세체니라는 귀족이 다리를 놓아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부다왕궁과 세체니 다리의 야경이 다뉴브 강의 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밤의 다뉴브 강은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인가 보다. 많은 펍에서 큰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밤을 즐기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강가에 걸터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어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그 젊음의 밤거리를 지나 다시 집 같은 호텔로 돌아왔다. 부다페스트에서의 마지막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