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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Oct 09.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19

양공장 원정대, 남바완의 고난의 대서사시 1

  <시간이 얼마나 길고도 무한한지에 대하여>

  골드코스트 여행 내내 거지 같은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일상으로의 복귀는 내게 좌절이었다. 멜버른 여행이 끝났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기롭게 양공장에 가겠다 했지만 집 최소 거주기간이 한 달이나 남았기 때문이다.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는데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멈춘 시간 속에서 역설적으로 매 순간 시간의 흐름을 체감했다.

  내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호주에서의 첫 목표, 12월에 뉴욕에서 존 맥래플린 콘서트를 봐야 했다. 공연까지는 6개월이 남았고, 내 비자는 4월에 만료된다. 고작 3~4개월을 살기 위해 경유까지 해가며 돌아올 이유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이 남는 건 제대로 된 해외 살이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였다. 이렇게 어영부영 한국으로 돌아가면 후회할 게 뻔했다. 차라리 멜버른을 갈까? 싫은 것 투성이인 호주에서 멜버른만큼은 마음에 들었으니까. 12월까지 멜버른에 살다가 뉴욕 여행을 하고서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가는 거다. 하지만 그 또한 두려웠다. 자꾸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이 마음으로 멜버른에 뿌리내릴 자신이 없었다.

  때마침 애기로부터 태국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비자 연장을 앞둔 애기는 호주 잔류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어서 어쩌면 지금이 우리가 여행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랐다. 목적 없이 하루하루 버리고 있던 나는 태국 생각에 도파민이 돌았다. 발바닥이 얼얼할 만큼 걷고서 마시는 시원한 수박 주스, 저렴한 마사지와 툭툭이를 탔을 때 살갗에 닿는 습기를 머금은 바람... 하지만 지금 태국에 가는 건 회피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다. 내내 불안에 시달리다가 막막함이 더 커진 채로 돌아오겠지.

  손에 쥔 여러 선택지 중에 와닿는 게 없었다. 만약에 나중에 호주에 더 있고 싶어지면? 만약에 멜버른으로 이사 가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된다면? 만약에 콘서트 때문에 워홀을 접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만약에는 자꾸만 나를 제자리 걸음 하게 했다. 모든 가정들은 한 가지를 가리켰다. 세컨 비자. 결국은 다시 양공장으로 되돌아왔다. 그간 야금야금 까먹은 돈을 메꾸고 만일을 대비한 세컨을 따고 온전히 홀로 설 수 있는 선택지는 그것뿐이었다.

  모두들 호주가 그리도 싫은데 왜 세컨을 따냐고들 했다. 차라리 지금 멜버른을 가라면서.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이지만, 새로운 곳에서 혼자 헤쳐가는 과정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 같았다. 게다가 비자를 연장한다면 뉴욕 여행을 끝내고 다시 호주로 돌아올 만했다. 설사 비자를 연장하지 않는다 해도 그곳에서의 시간은 의미 있을 게 분명했다.

 

  <양공장 원정대의 서막>

  모든 모험의 시작이 그러하듯 나도 떠나기에 앞서 원정대를 모집했다. 조건은 두 가지였다. 출발 전 한 번은 만나야 하니 현재 시드니에 있거나 곧 도착 예정일 것, 둘째로는 7월 중순에는 지역 이동을 할 수 있어야 했다. 관심을 표한 많은 사람 중 유일하게 조건이 맞는 사람(굿가이)과 바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인 스트라필드 광장은 여느 때처럼 햇빛이 강렬했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해서 카페에 들어가 있으려는데 그에게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 나처럼 주위를 살피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머리칼을 매만지며 머쓱한 듯 웃었다. 순간 저 친구랑 같이 떠나도 되는 걸까? 걱정이 스쳤다. 하지만 굿가이와 통성명을 하고서 기우임을 알게 됐다. 그는 더 늦기 전에 돈과 영어를 잡기 위해 호주에 왔다고 했다. 20대 초중반으로 가득한 워홀 세계관에서 동년배란 존재는 얼마나 귀한가. 그것만으로 부쩍 친근감이 들었다. 고생은 각오했다는 그의 결의가 의지가 될 것 같았다. 우리는 내 집 최소 거주기간이 끝나기 전까지 취직을 하고 7월 중순에 바로 지역을 옮기기로 했다. 그렇게 결성된 양공장 원정대, 개고생의 서막이 올랐다.


  <칼은 뽑았는데 썰 무가 없을 때>

  우리는 골번과 더보에 있는 양공장에 지원했다. 골번은 한국인들이 세컨을 따러 많이 가는 곳으로, 시드니에서 2시간 밖에 걸리지 않아 언제든지 도망 나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점은 직업소개소를 통해야 해서 소개비로 일주일치 주급을 내야 했다.(대략 80~90만 원)

  더보는 시드니에서 기차로 6시간 이상 떨어진 작은 도시로 양공장 노동자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양공장이 그 지역 경제를 먹여 살리고 있는 만큼 더보인 중 한 번이라도 그곳을 거치지 않은 이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골번과 달리 한국인은커녕 동양인 수가 적어서 백인 인구가 많았다. 즉 1차원적인 인종차별을 하는 병신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골번 쪽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더보 쪽은 셧다운이 끝나는 7월 중순 이후 재지원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그맘때쯤 지역 이동을 하려고 했지만 면접이라도 잡힌 '확실한 상태'로 하고 싶었다. 세컨이 나오는 지역은 일자리도 많지 않거니와 그렇다고 집세가 싼 것도 아니니까. 무턱대고 옮겼다가 최악의 경우에는 돈과 시간만 날리고 원래 목적인 세컨도 따지 못한 채 되돌아올 수도 있었다. 게다가 지금 사는 집도 문제였다. 집 최소 거주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퇴거를 하고 싶은데, 최소 2주 전에는 통보를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2주 치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도 보장되지 않은 상태로 나오기에는 무모했고,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통보했다가는 여기서 2주를 더 살아야 했다.

  우리가 공장에 가기로 했던 이유는 농장과 달리 출근 일수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콥스하버의 블루베리 농장이며 돈 못 벌기로 유명한 번다버그, 헬불처라 불리는 카불처까지 눈을 낮췄다. 심지어 날강도라 욕했던 한국인 직업소개소까지 기웃거렸다. 하지만 때는 겨울, 농장 비수기이자 일 년에 딱 두 번 있는 공장 셧다운 기간. 가장 극악의 시절에 우리는 구직 시장에서 철저히 걸러지고 있었다. 시기적절한 취직과 환승 이사, 두 가지를 동시에 하려니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지만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늘 한 구석에 박혀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는 더보 양공장에 갈 거란 것. 회신을 준 곳은 거기뿐이기에.

굿가이와 함께한 속초..
역시 굿가이와 함께한 시드니 천문대 / 세인트 메리 대성당
애기랑 페리 타고 맨리(첫 사진 배경에 걸린 외국인 그림판으로 지우느라 3시간 날림^^ㅗ) / 굿가이와 보타닉 가든
굿가이와 쿠지 비치

  이제 시골에 가면 못 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일을 했다. 지도에서 파버리고 싶은 읍내, 브리즈번으로 짧은 유배를 다녀오고, 호주 남자와의 만남도 가지고, 페리도 탔다. 양공장 원정대의 미래에 대해 논하기 위해 중간중간 굿가이와의 만남도 가졌다. 속초.. 아니, 본다이비치에서, 쿠지 비치에서, 보타닉 가든에서, 시드니 천문대에서, 세인트 메리 대성당에서... 그냥 놀러 다닌 거 아니냐고요? 맞아요... 그렇게 팽팽 놀며 돈은 바닥나갔고, 양공장의 골수를 빨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결연해졌다.


  <디데이를 앞두고>

  떠나야 할 날이 가까워 옴에도 고민은 끝이 없었다. 면접에서 떨어지면? 서류에서부터 탈락하면? 아니, 아예 구직을 안 하면? 하지만 숙소, 기차 예매는 물론 퇴거 통보까지 마치고, 몇 안 되는 지인들과의 만남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유학원 사장님은 거기는 한식당도 없을 테니 마지막으로 한식을 배 터지게 먹자며 차돌박이를 사주셨다. 가짜 한식으로 가득한 이곳에서 몇 안 되는 진짜 한식에 나는 배가 불러도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는 미련하게 너무 많이 먹었나 싶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과식은 아주 현명했다. 유학원 사장님 말대로 여기는 한식당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2차로 커피와 디저트까지 먹고서 사장님은 나를 집 맞은편 맥도날드까지 태워주었다. 잠깐 인사만 하고 내린다는 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눴다.

  "미래의 나를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미래 때문에 현재의 나를 희생하지는 말아요. 나중에라도 호주에 살고 싶으면 학생 비자도 있고 방법은 많으니까. 일하다가 ㅅㅂ 소리 5번 나오면 미련 없이 도망 나오기."

  왜 그렇게까지 걱정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호주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비자 연장을 하러 시골에 가는 내 모순은 보는 이를 더 불안하게 했을 테니까. 하지만 정처 없이 휩쓸리는 내 마음을 다잡을 길이 시드니에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장난스럽게 답했다. 국제시장급 성공 신화를 이뤄 금의환향하겠다고. 유학원 사장님은 '호주 다시는 안 올 것 같은데...'라며 불신했지만.

  "호주에 꼭 살지 않더라도 내가 한국에 갔을 때 만나면서 인연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 계속 봐요."

  구글맵 평점 3점대의 거지 같은 리드컴 맥도날드, 서서히 석양이 지는 차창 밖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장난처럼 말한 금의환향을 진짜 이뤄 꼭 다시 보기를.

  그리고 대망의 D-1일. 빨래를 모조리 돌리고 짐을 바리바리 쌌다. 호스텔에서부터 봉인돼 있던 짐을 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두 달 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내 물건으로 가득했던 수납장은 처음처럼 텅 비었고,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끼익 소리를 내던 철제 침대도 썰렁해 보였다. 한동안 연락하지 않던 스코티시에게 곧 시드니를 떠난다고 문자를 했다. 답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언제나처럼 답이 왔다. 아직도 그와 연이 이어지고 있음이 새삼스러웠다. 처음 그와의 대화에서 나는 헛소리나 찍찍 해댔고, 그는 몹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보통 사람이면 차단했을 텐데 그러지 않는 모습에서 이 놈도 나 못지않게 미쳤음을 직감했다. 호주 가기 전 영어 공부나 해볼까, 별생각 없이 시작한 대화는 서로의 닮은 듯 다른 여러 면들을 발견하며 지금까지 흘러왔다. 고여있다고 생각했던 시간은 그간 부지런히 흐르고 있었구나. 시골에서 3개월을 보낸 이후에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차단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룸메이트는 텅 빈 방을 보고 '언니 또 여행 가요?' 하고 물었다. 그간 일주씩, 이주씩 여행 가느라 집을 비웠으니까. 이사를 간다는 답에 룸메이트는 침대, 나는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시작된 수다는 한참을 이어졌다. 많이 친해지지는 못 했지만 그는 좋은 룸메이트였다. 자주 낮밤이 바뀌던 나와 생활 패턴이 달라 자칫 부딪힐 수도 있었지만 한 번도 껄끄러웠던 적 없었다. 그와 동년배임을 알고서 바로 친근감이 형성되던 순간, 불 켜고도 잘 잔다고 수더분하게 말하던 배려심은 훗날 이 집을 회상할 때 그리운 요소 중 하나가 되리라.

  저녁에는 애기와 만났다. 호주에 온 첫날 애기가 나를 보고 처음 한 말은 '괜찮아?'였다. 나라 잃은 표정으로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는데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고 했다. 예상과 달리 나는 어학원을 다니고 친구도 사귀고, 혼자 여행도 가며 어찌어찌 헤쳐왔다. 내 불안의 시기에는 모두 애기가 있었다. 내가 카페에서 주문만 해도 기특해하고, 3n살인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여기던 애기. 그 마음이 귀하기에 더 우리에게 분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의존하기가 죽도록 싫으면서 자꾸만 나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기에는 그 길 뿐이니까. 다음에 다시 애기를 만났을 때는 헤어지는 길목에서 씁쓸한 여운 대신 산뜻함만 남으리라.

  카페에서, 치킨 집에서도 한참을 얘기했는데도 아쉬워서 동네를 돌고 또 돌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순간이 있다. 별로 대단치는 않지만 계속 갇혀 있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 그런 순간. 그 밤이 그랬다. 트레인 연착 소식마저 안도로 다가왔던 밤이었으니까. 세 달, 곰이 사람이 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자고 약속했다. 이제 애기와는 함께했던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긴데도 곧 맞이할 이별이 낯설었다.

잠만 잤던 방 / 새벽에 글 쓰던 거실

  이른 아침 기차를 타기 위해 잠을 자지 않기로 했다. 짐을 모두 아래층으로 옮기고 냉장고에 있던 재료를 털어 배를 채웠다. 어둑한 거실에 덩그러니 앉아있자니 추억들이 비눗방울처럼 솟아났다. 유달리 추운 날 애기랑 같이 집을 보러 온 것, 나와 애기, 애기 남자친구 셋이 내 캐리어를 하나씩 끌던 이사하던 밤, 룸메가 깰까 침대에서 조심조심 내려와 어학원 갈 준비하던 아침,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소설을 쓰던 새벽, 막막할 때면 무작정 달리러 나갔던 날들... 멋진 동네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아늑한 보금자리였던 리드컴. 1점 수집가인 맥도날드마저도 그리워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밤새 글을 썼다. 소설이 아닌 미국 여행기를. 원래 나는 내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소설이 반응이 좋았더라면 에세이를 쓸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비록 소설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에세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그 순간들을 잘 기록하고 싶어졌다. 돌이켜보면 낯선 땅에서의 막막함은 내 창작욕을 채찍질했고, 그 덕에 글도 꽤나 많이 썼다. 힘들기만 했던 호주살이 이면에는 늘 성장이 동반했다. 어느덧 맥도날드 로고 뒤로 여명이 밝아왔다. 나는 열쇠를 탁자에 올려두고서 조용히 집을 나섰다.


  <님아 그 열차를 타지 마오>

  스트라역에서 만난 굿가이의 손에는 아직 덜 마른빨래가 한 짐이었다. 둘 다 짐이 너무 많아서 이동을 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져서 '지역 이동 두 번은 못 하겠다.'라고 염불을 욌다. 열차를 타러 가려는데 애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출근 전에 배웅을 하러 오고 싶다면서. 잠시 후 애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승차장에 도착했다. 빵과 음료수가 담긴 봉투와 함께. 우리는 같이 열차를 기다리며 돌아올 때까지 이룰 목표 두 가지를 정했다.

  더보행 열차가 왔다. 차창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찍는데 열차 문이 쏜쌀같이도 닫혔다. 애기와 굿가이는 그런 줄도 몰랐고 나는 보고도 '왜 닫지? 다시 열겠지, 뭐.' 멍청하니 있는데 역무원이 우리를 불렀다.

  "너네 이거 타야 되는 거 아니니?"

  우리는 부랴부랴 열차에 올랐다. 우당탕탕 힘겹게 짐을 실으니 열차가 출발했다. 이코노미석은 손가방 하나만 실을 수 있어서 조마조마했는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호주 시스템이 엉망일 것 같아 짐 추가를 하지 않았는데 그러길 잘했다. (참고로 호주 열차에는 베드버그가 출몰한다. 양공장 노동자는 열차를 탔다가 베드버그 때문에 가방과 옷을 버려야 했으며, 그가 받은 유일한 보상은 파리약뿐이었다.)

아직 낭만이 살아있던 시절의 굿가이.... 와 나...

  아직 시드니를 떠나지도 않았는데 인터넷이 먹통이 됐다. 얼마지 않아 허허벌판이 펼쳐졌고 종종 소와 양이 보였다. 보고 있자니 싱숭생숭해서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았다. 6시간이란 긴 시간 동안 노랫소리에 묻혀 듣지 못했다. 벽장 뒤에서 소리치며 만류하는 내 목소리를.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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