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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Oct 19.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20

양공장 원정대, 남바완의 고난의 대서사시 2

<탈출까지 D-101~D-100:지역 이동 첫날/경찰서 방문>



  <이상한 나라에는 실행 취소가 없다>

  7시간을 내리 달려 도착한 더보역, 비몽사몽 겨우 뜬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잠에서 깰 때마다 점점 풍경이 후져진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직면한 더보는 생각보다 더 우중충한 음기로 가득했다. 사실 이 모든 건 예견된 일이었다. 시드니에 처음 왔을 때도 꼬질꼬질하고 별 볼 일 없는 풍경에 충격을 받았으니까. 그때 나는 인생에 실행취소가 있다면 마구 누르고 싶었다. 호주에 오기 전으로, 커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개들과 낮잠을 자던 그때로. 하지만 인생은 그림판만도 못하기에 실행취소 따위는 없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도착한 곳이 음침한 더보역이라니! 모든 게 꿈이길 바라며 눈을 떴지만 지독한 현실은 여전히 내 앞에 산재했다.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 비싸고 화려한 것만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기에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멋과 개성이 있다. 하지만 더보는 아니다. 조그만 역을 나와 호텔로 향하는데 시골 마을 특유의 포근함이나 정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왼쪽은 버려진 공터요 오른쪽은 허허벌판, 그래서인지 길에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유령도시 같은 기이함만 감돌았다.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새로운 곳에서의 첫날이기 때문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만약 앨리스가 토끼를 쫓아 당도한 곳이 여기라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으리라. 모험은커녕 기겁을 하며 도망쳤을 테니.

  한 겨울에 여름옷으로 꽉꽉 들어찬 캐리어를 끄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가. 호텔까지 고작 5분인데 땀이 뻘뻘 났다. 짐을 죄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수 천 번쯤 했을 때 목적지인 가든 호텔에 도착했다. 눕힌 성냥갑 같은 낮은 건물, 촌스러운 바와 리셉션. 마치 인스타그램에만 존재하는 미인처럼 아고다에서 봤던 호텔 대신 가든 여인숙이 우리를 맞이했다.

  직원은 비상구처럼 보이던 승객용 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문을 열자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이 펼쳐졌다. 지역 이동은 두 번으로 족하다고 다시금 되뇌었다. 올 때와 도망갈 때. 다행히 직원이 2층까지 짐을 옮겨주었다. 호주의 몇 안 되는 장점은 팁 문화권이 아니라는 것, 덕분에 고마움은 땡큐 하나로 퉁칠 수 있었다. 미국 호텔에서는 팁 달라고 할까 봐 벨 보이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던 나니까...

  더블베드와 협탁 하나 있는 방에 짐까지 넣으니 여백 없이 들어찼다. 욕실과 화장실, 부엌은 공용이었다. 대체 관광지도 아닌 여기가 왜 멜버른에 있는 숙소보다 비싼 걸까? (심지어 에어 비앤비는 5일 숙박 금액이 멜버른 8일 숙박비의 두 배였다.) 이름만 호텔이지 시스템은 호스텔인 혼종의 도가니탕을 벗어나려면 얼른 집과 직장을 구해야 했다. 한국에서 끌어온 돈도 떨어져 가고, 앞날은 막막한데 눈앞에 놓인 현실도 암담했다. 드디어 진짜 워킹 홀리데이가 시작됐다. 워홀러도 여행객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으로 불행의 근원만 찾아다니던 지난날과 작별하고 나서야.

올리브가 너무 짜요..

  양공장 노동자가 추천해 준 피자집에서 저녁을 먹고 장까지 보니 어느덧 밤이 됐다. 시골의 밤은 인적은커녕 불빛 한 점 없어 귀신도 기겁하며 도망갈 것 같았다. 첫날을 그냥 넘길 수 없던 우리는 빛을 찾아 헤매었고 축구 시합이 한창인 경기장을 발견했다. 구석에 자리 잡고 주섬주섬 가위와 이발기를 꺼냈다. 일각에서 결의를 다지기 위해 삭발식을 하듯 우리도 이발식을 하기로 했다. 양공장 골수를 쪽쪽 빨아 통장을 배불리 하겠다는 결의로. 병지머리만 다듬어 병지의 간극을 줄여나갈 예정인 굿가이는 중도 깎지 못한다는 뒷머리를 내게 맡겼다.

  "앞도 좀 자를까?"

  자꾸만 눈을 찌르던 앞머리를 잘라 시야가 확보된 내게 굿가이가 물었다. 굿가이의 앞머리도 미간까지 자라나 있었기에. 서걱서걱, 몇 번의 가위질에 그의 앞머리는 바가지의 형상을 갖추었다. 거울을 본 그는 눈썹 위로 자르면 어떡하냐고 울상을 지었다. 영화 집으로 에서 이발 후 울음이 터진 유승호 어린이처럼... 아직 흑화 하기 전인 그는 내 멱살을 잡는 대신 숱가위를 집어 들었다. 어떻게든 살리겠다며 숱가위를 마구 놀리는 손길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그렇게 쥐가 파먹은 듯 동그란 앞머리를 갖게 된 그, 결의를 다지기 위한 이발식에서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파라오의 저주보다 더한 더보의 저주>

  동거는 서로의 몰랐던 부분을 알아가는 것, 그리고 다름에서 오는 불편을 감수하는 것. 나와 굿가이의 생활 패턴이 다르다는 걸 첫날부터 알 수 있었다. 나는 올빼미족인 대신 잠귀가 어두웠고 그는 아침형 인간인 데다 잠귀도 밝았다. 한 시간마다 꺼지는 미니 전기장판을 켜는 딸깍 소리에 그가 눈을 떴을 때는 간담이 서늘했다. 잠은 잤지만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피곤에 쩌들었다.

  굿가이가 부시럭대며 준비를 하고 밖에 나가고 되돌아올 때까지 나는 침대를 지켰다. 정신이 일어나도 몸은 일으키지 않는 게 내 신조이기에. 나는 이렇게 나태해도 되나 싶을 만큼 뭉갠 후에야 눈을 떴다.

  "지갑이 없어요."

  굿가이는 어제부터 지갑이 보이지 않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했다. 가방에 넣어뒀겠거니 하고서. 아침에 가방을 확인했을 때 지갑이 없어서 어제 갔던 경로로 가봤지만 허탕이었다고 했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뿐이었다. 나는 모든 짐을 열어 지갑이 있는지 확인한 뒤에 다시 한번 찾으러 가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파라오의 저주보다 지독한 더보의 저주가 시작됐음을.

  결국 우리는 어제의 행적을 그대로 밟았다. 분실 장소를 추측하기 위해 어제 찍은 사진에서 손에 지갑을 들고 있는지도 확인했다. 하지만 몇 번을 되짚어도 지갑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은 경찰서행이었다. 멀기는 어찌나 먼지 가는 동안 나는 호주 경찰 후기를 검색했는데 어지간한 분실 접수는 받아주지 않는다는 글 천지였다.

  붉은 노을이 어둠에 물들고 나서야 우리는 경찰서에 도착했다. 쭈뼛쭈뼛 들어가자 아무도 없는 접수대가 우리를 맞았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긴장됐다. '영어도 못 하는 게 여긴 왜 왔어!' 혼나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경찰관이 나타났다. 대머리에 무섭게 생긴 얼굴, 팔에는 문신이 가득했다. 굿가이는 조그만 목소리로 '월렛..' 하고 말했다. 경찰관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굿가이에게 손가락질을 하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인종차별인가? 지금 우릴 모욕하는 건가? 짧은 순간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시 나온 경찰관의 손에는 굿가이의 지갑이 들려있었다.

  "아주 운이 좋은 경우야. 너 정말 운 좋다."

  경찰관의 말대로 카드와 현금은 물론 동전 하나까지 무사했다. 잔뜩 낙심했던 굿가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되살아나 땡큐를 연발했다.

  경찰서 앞에서 지갑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숙소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했고 피로는 한계치였다. 하지만 운이 지지리도 나쁘다는 생각은 더는 들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꽤나 운이 좋다고 느껴졌다. 다음 날 우리는 난방을 떼도 추운 객실에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인지 감기에 걸렸다. 헤쳐야 할 앞날이 구만리였지만 어쨌거나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꽤 낙관적이었다. 더보에서의 삶이 불행 같은 행운, 어느덧 불행이 된 행운의 연속일 줄 몰랐으니까. 알았다고 해서 그대로 짐을 챙겨 돌아올 수 있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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