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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Dec 04.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23

양공장 원정대, 남바완의 고난의 대서사시 5

  <탈출까지 D-99~D-94:면접/인덕션(교육)>



  <내겐 플레처가 삼성이고 구글입니다>

  이른 아침, 웬일로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를 개통한 지 2달 동안 통화용으로 거의 쓴 적 없는데. 심지어 모르는 번호였다. 이는 받자마자 영어 폭격이 쏟아짐을 의미했다. 잘 못 걸린 전화나 스팸이면 좋겠다, 그냥 끊어버리게. 하지만 가려 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양공장에서 걸려왔을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여전히 나는 영어 하나 때문에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 발로 한국에서의 안락함을 팽개치고 온 이곳에는 피할 수 없는 것들 뿐인 것을. 그래도 다행인 건 뭐든 처음이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쪽팔린 경험이 쌓이다 보면 맷집이 생겨서 나중에는 별 것도 아닌 일이 될 것이다. 그 증거로 얼마 전 외국인 집주인에게 전화가 왔을 때처럼 휴대폰을 집어던지고 싶을 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여기 양공장인데, 오늘 면접 보러 올래?'

  당일 면접이라니! 한국에서였다면 근본도 없다며 걸렀겠지만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간의 고뇌와 속앓이, 모든 걸 내던진 무모함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양공장이 필요했으니까. 게다가 속전속결로 취직해야 떠날 날이 더 빨리 올 테니 오히려 좋았다.

  "제 대답은.. Yes여요..!"

  그렇게 호주에서의 첫 면접이 당일날 결정됐다. 어제 양공장 노동자를 만났을 때는 그가 우러러볼 수 없는 태산처럼 느껴졌다. 명문대 입학 후 학교 홍보를 하러 모교에 방문한 선배처럼. 그를 볼 때 '나는 대학이나 갈 수 있을까?' 부러움 반 막막함 반이었는데, 하루 만에 상황이 달라졌다. 나도 곧 그의 후배가 되어 양공장에 다니고, 돈도 벌고, 노동자들과 우정을 다지고, 세컨도 따고, 청춘을 즐기고, 나라를 구하고, 우주를 구하고, 세상을 구하고, 션 오프라이도 갖고...!(참고:션 오프라이는 미국인이다. 호주에는 미남이 없다) 전화 한 통에 무한대로 확장되어 가는 망상의 나래에 웃음이 실실 났다. 굿가이와 나는 곧 취직한다는 명목 하에 카페부터 갔다. 가난한 잔고가 더 가난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주 1000불 성공 신화'에 잔뜩 젖어있었기에.


  <과자에 눈먼 헨젤과 그레텔의 말로는>

  양공장까지는 차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차창밖으로 흩어지던 낙후된 2000년대 초반 풍경은 주택가에서 허허벌판으로 바뀌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우버 기사가 도착을 알렸다. 일단 내리긴 했는데 막상 마주한 비현실적인 풍경에 멍해졌다. 붙잡을 새도 없이 차는 떠났다. 마치 바비월드를 떠나 리얼 월드로 가는 것처럼. 물론 더보 읍내를 캘리포니아(리얼 월드)에 비교하는 건 캘리포니아에 대한 모욕이며 그렇다고 여기를 바비 월드라 빗대기에도 어폐가 컸지만. 넓게 펼쳐진 지평선, 땅 바로 위에 쌓여있는 구름들, 오른편으로는 황량한 모래바닥, 왼편으로는 잔디밭... 이런 곳에 덩그러니 놓이다니, 그야말로 거지 같은 섬에 버려진 게 아닌가. 어느 쪽으로 고개를 둘려도 시야를 가로막는 건 뒤편의 낮은 컨테이너 건물뿐이었다. 오는 길에 사고라도 나서 저 세상에 온 건가 싶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몽골 같은 풍경이 설명되지 않았다. 장담컨대 여기 다니다가는 몽골인들처럼 시력 5.0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공장 외벽에 위풍당당하게 걸린 수령님을 연상시키는 저 벽화는 뭐란 말인가. 사장 일가의 그림을 벽에 걸어놓은 것에 1차 충격, 그림 수준이 엉망진창이어서 2차 충격을 받았다. 분명 백인이라고 들었는데 그림 속 그들은 인도나 중동계로 보였다. 게다가 사장 부인의 양쪽 눈 위치는 위도로 따졌을 때 20도쯤(북아프리카와 남미) 차이가 났다. 물구나무서서 그려도 이것보다는 눈 위치가 수평일 텐데. 이 정도면 헌정이 아닌 조롱을 하기 위함이 아닌가? 대체 왜 걸어놓은 걸까? 안목이 없는 건가? 아니면 이런 그림까지도 관대하게 품는 그릇임을 드러내기 위함일까? 컴플레인을 걸기에 너무 여린 사람이라서? 미용실에서 '마음에 드세요?' 하고 물었을 때 '원래대로 돌려놔..'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듯이? 나는 수령님들의 용안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게 양공장은 삼성이자 구글이었는데... 하지만 사람은 투자한 게 있을수록 멈출 수 없는 법. 벽장 뒤에서 '안돼! 들어가지 마!' 절규가 얼핏 들렸음에도 나는 음산함을 풍기는 벽화 아래로 걸어 들어갔다.

  컨테이너에는 흰 수염 끝을 앙증맞게 묶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안녕, 나 면접 보러 왔어."

  영어 못하는 사람의 특징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례한 화법을 구사한다는 것이고, 나머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알아듣지도 못하며, 마지막으로 대답은 무조건 '예스'로 통일한다는 것이다. 나는 충실히 세 공식에 맞게 행동했다. 누가 봐도 못 알아들은 얼굴로 '네!'를 뱉는 내게 그는 몇 차례 더 물었지만 역시나 알아듣지 못했다. 느낌대로 예스와 노를 번갈아가며 내뱉는 내 행태는 노인 우롱에 가까웠다.

  시드니에서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 옆에 병풍처럼 있기가 너무도 수치스러웠는데... 여기서는 병풍이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었다. 굿가이보다는 내 영어가 조금 더 나았기에 그의 길잡이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노인을 갖고 논 끝에 그의 질문이 '최근 코로나 검사를 한 적 있냐' 였음을 알게 됐다. 청기 백기 하듯 예쓰를 노로, 노를 예쓰로 돌려 막고서야 나는 최종 답안으로 '노'를 제출했다.

  코로나 검사 후 음성 판정을 받고 약식 서류를 작성했다.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 감옥 같은 철제문을 통과하고 나니 똑같이 생긴 컨테이너 여러 개가 우리를 맞았다. 간간이 보이는 노동자들은 머리에 배껍질 같은 망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그들이 입은 푸른 옷은 중국 농민공을 연상케 했다. 펄벅 '대지'를 읽으며 상상한 풍경이 왜 눈앞에 펼쳐져 있는가.

  정신이 혼미한 채로 안으로 들어가는데 점점 역겨운 냄새가 강해졌다. 모태 비염 3n 년, 그간 '어디서 이상한 냄새나지 않아?'라고 누군가 얘기했을 때 그게 무슨 냄새인지 맡아본 적이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 내게 냄새란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 공감각과 같은 것이었다. 어떤 냄새도 코를 때리는 듯한 강렬함으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수술로도 안 낫던 비염이 완치된 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으로 하는 호흡마저도 역겨우리만큼 구역질 나서 속이 울렁댔다.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엉뚱한 건물이었나 보다. 문을 열자 보이는 백인 세 명의 얼굴에는 '이 새끼는 뭐야'라고 적혀 있었다.

  "나 면접 보러 왔는데?"

  그러자 그들의 표정에 서린 '뭐야 감히'가 옅어졌다. 문가에 있던 거북목이 심각한 사내가 우리를 면접 장소로 안내해 줬다. 보건실 안에 사무실이 딸려있는 공간이었다.

  "여기란다..^^"

  웃고 있지만 가짜 웃음임이 역력한 그에게 나도 가짜 땡큐를 시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로 앞에 배치된 자리에 흑발 외국인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 머리가 알록달록한 외국인이 서 있었다. 나는 아까처럼 '면접 보러 왔는데.'를 내뱉었다. 그러자 알록달록 머리가 우리를 차례로 가리키며 목청 좋게 외쳤다.

  "유 갓 더 잡! 유 갓 더 잡!"

  가뜩이나 큰 눈이 어찌나 번들대던지 뒷걸음질로 다시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내게는 플레처가 삼성이고 구글...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려 해 봐도 역부족이었다.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냄새와 꼬질꼬질한 환경, 불행해 보이는 노동자들까지... 흡사 이건 노동수용소가 아닌가! 이 면접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음을 광기 어린 알록달록 머리의 눈알에서 눈치챘다.

  예상대로 면접은 아주 간단했다. 시력과 악력 검사 같은 간단한 신체검사와 약물 검사, 서류 작성 및 간단한 질문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개인의 역량 파악을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피를 무서워하는지, 우리 둘의 근무 일정을 맞춰줘야 하는지, 오전 근무가 좋은지 마감 근무가 좋은지 따위의 이미 뽑기를 내정한 질문들이었다. 면접관은 외국인 노동자가 많은 업종 특성상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고,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으면 번역기로 손수 번역도 해주었다. 면접 말미에 우리는 여권 사본까지 제출했다.

  "별다른 문제없으면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쯤 연락 갈 거야. 그럼 수요일에 교육받으러 오면 돼!"

  똥을 싸며 리코더를 불지 않는 한 떨어질 리가 없었다. 아니, 뭔 짓을 해도 약물 검사 결과만 깨끗하면 붙을 면접이었다. 그의 말대로 월요일에는 연락이 왔고 수요일에 교육을 받으러 가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도 착잡했다. 더는 내게 플레처는 삼성이고 구글이고가 아니었기에.


  <태풍의 눈은 고요해서>

  일촉즉발의 순간을 포착한 적 있는가. 몇 초 뒤 그 상황 속 인물들이 세상에 사라지리라는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순간들 말이다. 가령 맹수 우리 문이 열린 줄도 모른 채 그 앞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입을 크게 벌린 거대한 파도 앞에 놓인 쪽배, 다시 몽골 한복판 컨테이너 앞에 선 우리... 여전히 땅과 맞닿아있는 하늘에는 잘게 찢은 솜사탕 같은 구름이 잔뜩 쌓여 있었고, 높은 곳에서 수령.. 아니, 사장 일가가 사악하게 웃으며 우리를 내려보고 있었다. 태풍의 눈은 너무 고요해서 그 중심에서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때의 우리도 그랬다.

  백인 뿐이던 읍내와 달리 교육실은 유색인종 대잔치여서 한 두 명 껴있는 무색인종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현지인들이 기피하는 일을 외노자를 통해 메꾼다는 정부의 방침이 외국인들을 이렇게 한데 모았구나... 새삼 블루칼라 노동직 일원이 되었다는 게 실감 났다. 돈이 아쉬워 온 외노자, 비자를 볼모 잡힌 외노자, 영어가 안 돼서 온 외노자, 3개월(세컨 비자), 혹은 6개월(써드 비자)만 있다가 도망갈 예정인 외노자... 계기는 제각각이겠지만 확실한 건 우리 모두 무언가를 볼모로 잡혔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비스트 부서에 배정되었다. 대체 뭐 하는 부서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면접 때 콜드룸에 친구가 있다고 이야기했기에 당연히 양공장 노동자와 같이 일하게 될 줄 알았다. 거긴 작업장 분위기도 좋고 팀원들끼리도 친하다고 들었기에 더 실망감이 컸다. 하지만 하비스트가 더 좋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희망 회로를 돌렸고 더보에서의 매 순간이 그랬듯 희망은 이내 절망 속에 처박히게 된다.

  교육은 한국에서 들었던 산업 안전 보건 교육과 큰 차이가 없었다. 안전 규칙을 지키라는 내용을 길게 늘여놓은 영상을 시청하고서 사내 규칙에 관한 서류와 서명을 해야 하는 서류들을 배부받았다. 영어가 빼곡히 적힌 무수히 많은 서류들, 죄다 번역기를 돌리기에는 너무도 방대한 양이었다. 한국에서는 약관을 읽지도 않고 잘만 서명했는데, 여기서도 그러자니 너무 찝찝했다. 예전에 읽은 아는 것이 힘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까막눈인 아버지는 총명한 자식에게 글을 뭐 하러 배우냐 타박한다. 어느 날 사기꾼이 아버지에게 접근해 '땅을 헌납하겠다는 서류'를 '땅을 공짜로 받는 서류'로 속인다. 때마침 자식이 나타나 서류의 내용을 멋들어지게 낭송해 땅도 지키고 아버지를 계몽시킨다. 이 이야기의 교훈을 파악하고서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 나는 십여 년이 흐르고서야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 까막눈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 문명이란 어찌나 달콤한가, 내겐 총명한 자식 대신 스마트폰이 있으니 가볍게 극복할 수 있... 지 않았다. 첩첩산중 두메산골에서도 터지는 인터넷이 양공장에서는 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터 연결 상태를 나타내는 칸에 모두 불이 들어오지 않은 건 물론, LTE가 3G로 바뀌어 있었다. 와이파이를 연결하니 칸 하나가 간신히 깜빡일 뿐, 인터넷은 간헐적으로 됐다 안 됐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인터넷이 되는 찰나의 순간에 까막눈을 탈출해 간신히 서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서류가 워낙 방대해 나중에는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고 나는 기계다... 외며 무분별 서명을 했지만.

  다음으로 우리는 머그샷.. 아니, 사원 얼굴 식별용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교육관으로부터 자물쇠를 강매당했다. '10불인데 안 사고 싶으면 안 사도 돼~'라며 농담을 가장한, 하지만 사지 않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함이 깃든 어투가 약장수를 연상케 했다. 당연히 아무도 사지 않겠다며 손 들지 않았고, 그는 자연스럽게 자물쇠 설명으로 넘어갔다. 늘 그렇듯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첫 단계부터 막혔다. 알고 보니 비밀번호를 맞추기 전에 오른쪽 방향으로 돌려 0에 세 번 맞춰야만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그 후 세 개의 비밀번호를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번, 다시 오른쪽으로 한 번, 총 다섯 번을 돌려야 했다. 자물쇠 크기도 크고 숫자가 39까지 있어서 한 바퀴를 크게 돌리는 게 벅찰 때도 있지만 멈춰서는 안 됐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싸구려 자물쇠도 2불이면 사는데 이딴 걸 10불을 받고 팔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분노라기보다는 '이거 개발한 새끼는 누굴까?' 정도의 의구심에 가까웠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을 한 이후로는 만든 놈에 대한 분노를 참기가 어려웠는데 특히 출근 준비를 할 때 그랬다. 바쁘고 정신없는데 방향을 바꿔가며 다섯 번씩 돌리는 삽질을 하다 보면 자물쇠를 망치로 부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심지어 틀려서 다시 해야 할 때는 문짝을 아예 뜯어버리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교육복을 배부받기 위해 게이트하우스로 향했다. 삭을 대로 삭은 티셔츠 한 장과 가랑이가 몹시 끼고 허리 단추는 잠기지도 않는 바지, 발가락이 오므라진 감이 있지만 신을 만은 한 장화를 받았다. 대기 시간이 워낙 길어 기가 빨린 데다 잠깐 입었을 때는 괜찮았어서 옷에 죄수번호.. 사원번호 722를 새겼다. 당장 내일부터 그 불편한 착장으로 8시간을 서있어야 하는 줄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사진도 새겼다. 마치 노예가 제 노예 사슬이 더 화려하다고 자랑하듯이... 그게 일터에서의 회한이 담기지 않은 마지막 웃음이 될 줄은 알았더라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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