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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Nov 21.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22

양공장 원정대, 남바완의 고난의 대서사시 4

  <탈출까지 D-100:양공장 노비.. 동자와의 읍내 관광>



  <이 시대 참 일꾼 양공장 노동자>

  양공장 노동자, 그는 가진 거라곤 양공장뿐인 더보에서 일 년 가까이 살고 있다. 대부분의 워홀러들이 짧으면 세컨을 따기도 전에, 길어야 써드(9개월)를 따자마자 도망가는 것과 확연히 대조되는 행보였다. 한때는 더보에 그의 친구들이 많았던 적도 있지만 자취방에서 술로 시간을 삭제하는 것도 긴 더보살이의 찰나에 불과했다. 친구들이 떠나도 그는 여전히 더보를 지켰다. 영화 노팅힐 기자회견 장면에서 '영국에는 언제까지 머무르실 건가요?'라는 질문에 줄리아 로버츠가 '영원히요.(Indefinitely)'라고 답했듯이. 어쩌면 그는 영원히 더보에 머무를지도 모른다.

  멜버른에서 처음 연락을 주고받은 이후 그와 한 달간 씨버 프렌드(Cyber friends)로 지냈다. 그는 양공장을 비롯한 더보 지역 생활 팁을 제 일처럼 알려주었고, 인사팀에 찾아가 '내 친구들 뽑아달라!'라고 피력하기도 했다. 아주 이른 저녁이면 연락이 끊겼다가 다음 날 새벽 4시경 답을 하던 그, 일반적이지 않아 신비롭기까지 한 생활 패턴은 그에 대한 호기심을 극대화시켰다. '설마 양공장 때문은 아니겠지.' 흐린 눈을 하고서 얼른 양공장에 다니기를, 그래서 그를 만날 수 있기를 고대했다. 책장 너머 미래의 내가 'STAY!'를 외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가든 여인숙 창문을 열어주오>

  양공장 노동자와의 첫 만남은 가든 여인숙 앞에서 이루어졌다. 로미오처럼 그를 데리러 가겠다는 내 제안이 '동선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소개팅을 앞둔 것처럼 반쯤은 들뜨고 반쯤은 긴장한 채로 그를 기다렸다. 얼마지 않아 가든 여인숙 창문을 열어달라는 그의 노래가 들려왔고, (DM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아직 노비가 되기 전인 나는 여인숙 계단을 자유의 날개로 가볍게 뛰어넘었다. 시시때때로 시시덕거렸던 것과 달리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뒤 조용히 읍내로 향했다.


  <특색 없는 쌀국수를 향한 목숨 건 무단 횡단>

  황량한 벌판을 10여분 걷자 불빛이 군집된 구역이 나왔다. 도무지 번화가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양새를 한 그곳은 읍내였다. 다운그레이드된 2003년 한국 지방 소도시 같은 풍경에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한국의 2003~2005년 풍경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때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볼 때면 아련한 감상에 잠기곤 했다. 어른으로써 그 시절을 향유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불가능한 아쉬움을 안고서. 그런데 이렇게 별안간 과거로 내던져진 것이다. 20세기 한국보다 후진 21세기의 더보로. 트루먼쇼의 주인공이 된 듯 혼란스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여기서 3개월을 살아야 한다니. 벌써 이렇게 갑갑한데 벗어날 길도 보이지 않아 막막했다.

  드디어 목적지인 다 쓰러져가는 베트남 음식점이 보였다. 길을 건너야 하는데 횡단보도는 없고 차들은 우리 앞을 빠르게 스쳐갔다. 양공장 노동자가 대장 고라니처럼 선두에 섰고 굿가이와 내가 그 뒤를 따랐다. 물론 차들은 보행자 따위가 알바냐는 듯 제 갈길을 가기 바빴다.

  "항상 이렇게 차에 치일 위험을 감수해야만 목적지에 갈 수 있나요...?"

  비 더보인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전제가 그에게는 너무 당연해 양공장 노동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본 나도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이래야 되는 거 아닌가?'와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로. 쌀국수가 뭐라고 목숨을 걸어야 하나. 앞으로 길을 건널 때마다 아직 명줄이 다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겠구나. 치이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다행히 숙련된 대장 고라니의 인솔 덕분에 죽지 않고 식당에 도착했다. 작은 마을이라 가는 곳마다 아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는지 그곳에는 양공장 노동자의 친구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는 주문을 받을 때도, 음식을 내올 때도 힐끗힐끗 양공장 노동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 마치 시작하는 연인들처럼...

  "둘이 뭐.. 썸 타는 사이예요...?"

  우리는 스프링롤과 일반 쌀국수, 매운 쌀국수,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더보에서 레모네이드를 시킬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레몬에드가 나올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캔음료와 얼음컵을 주는데 그 뻔뻔함에 놀라지 말고 자연스럽게 따라 마시면 된다. 스프링롤은 맛있었지만 매운 쌀국수는 맵지 않았고 일반 쌀국수는 더보만큼이나 특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음식정도면 여기서 최상급이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긴 더보살이 끝에야 깨달았으니까. 고립된 지역일수록 부르는 게 값이며 개똥 같은 수준으로도 손님을 유치할 수 있음을.


  <양공장 노동자와의 읍내 구경>

  더보 읍내는 내 손바닥만 했다. 어찌나 작은지 읍내와 내 손바닥을 번갈아 봤을 때 어느 쪽이 손바닥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간 읍내에 올 때마다 '설마 이게 전부일까?' 의구심이 들었는데 양공장 노동자로 인해 설마가 사실임이 입증 됐다. 마트 두 개, 영화관 하나, 상점 나부랭이... 대체 여기서 어떻게 1년을 산 걸까? 고시원에 간 정몽준 표정을 한 내게 양공장 노동자가 말했다.

  "저쪽으로 걸어가면 아시아 마트 있어요. 근데 여섯 시 넘어서 닫았겠다..."

  "한인 마트 아니고 아시아 마트요?"

  "네..."

  있는 게 없는데 그마저도 듬성듬성 있어서 아시아마트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양공장 노동자는 우리를 근방에 있는 오락실로 이끌었다. 창고를 통해 쪽방에 들어가듯이 오락실을 가기 위해 푸드코트 같은 곳을 지나쳐야 했다. 식당 안에는 백인 노인들 뿐이었는데 우리가 들어서자 시선이 집중됐다. 양공장 노동자는 익숙한 듯 시니컬하게, 하지만 여전히 진저리가 난다는 듯 그들을 지나쳤다.

  이후로 더보살이 100일간 왜 그가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많다고 했는지 실감하는 순간과 종종 직면했다. 인종차별에 급을 매기는 것도 우습지만 이곳의 차별은 1차원적인 배설에 가까웠다. 가볍게는 니하오부터 차 타고 가면서 욕하기, 심하게는 물건 던지기까지. 물론 그들 모두 그런 짓 하게 생겼으며 그렇게라도 안 하면 여기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처지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랬으리란 걸 안다. 더보에서 태어나 더보에서 죽다니, 그야말로 완벽한 저주가 아닌가. 오락실에 농구 기계와 스티커 사진 부스가 전부인 곳이 바로 더보니까. 인생 네 컷이나 어쩌고 필름 같은 기계를 상상했다면 조용히 머리를 박도록 하자. 외관부터 2009년을 연상케 하는 탈부착용 '스티커' 사진 기계, 그게 바로 더보다.

  "이게... 다 인가요?"

  "여기 그래도 클럽도 있어요."

  클럽이란 단어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라스베이거스 클럽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데 일행에게 '언니도 좀 놀아요~!'란 말을 들은 나, 홍대 클럽에서 테이블 잡은 남자가 먹던 술을 나눠주려 했을 때 역겨움을 숨기지 못했던 나, 호주 클럽에서 통탄을 금치 못했던 나... 내게 클럽이란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자니 민망해서 어쩔 수 없이 노는 척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대도시 클럽도 엉망진창이었는데 하물며 더보 클럽? 그야말로 시각을 포기하는 행위가 아닌가. (후에 안 사실이지만 더보에 있는 유일한 클럽에는 갈 때마다 양공장 남자들이 한 무더기라고 했다. 마치 회식 자리처럼.)

  다음으로 간 곳은 마트였다. 뜬금없는 행보에 '마트를 왜 가죠?' 의문을 제기한다면, 더보에서는 마트가 가장 핫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한국으로 치면 홈플러스와 이마트가 행리단길, 샤로수길인 셈이다.(핫한 지역 모르니까 대충 넘어가도록 하자.) 우리는 마트를 대충 훑어본 후에 마트 안쪽에 자리 잡은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평범한 동네 극장 정도는 됐다. 한창 바비가 상영하던 시기라 입구에 바비 인형 상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걸 만들 때 아르바이트생이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두보 놈들 승질머리 대박."

두보 바비
멜번 바비

  비슷한 시기에 멜버른에 사는 동년배도 바비 팝업 스토어에 갔었다. 그 사진에서는 자본의 내음이 느껴졌었는데... 멜버른 바비가 기능과 멋을 동시에 잡은 최고급 안경이라면, 더보 바비는 수수깡과 셀로판지로 만든 허접한 안경 같았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왜 두보 놈들의 성질머리가 저리 되었는가를 서서히 체감하게 되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살아남을 수 없는 더보이기에.

  아직 이른 시간인데 거리에는 죽은 도시의 기운이 감돌았다. 쪽방 오락실과 셋방 영화관까지 보고 나니 달리 갈 곳이 없어서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이름부터 환장스러운 몽키바로.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결론은 양공장으로 귀결됐다. 우리가 만나게 된 게 모두 양공장 때문이니까. 그런데 지원한 지 4일이 지났음에도 아직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양공장 노동자조차 셧다운이 끝났는데 왜 모집을 안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의아해했다.

  "여기 빵 공장도 있다던데 거기라도 지원해 보는 건 어때요?"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그로 인해 더 나은 곳에 갈 수도 있으리란 걸 안다. 마트가 가장 핫한 이 작은 도시에 공장이 하나 더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대로 돌아가느니 빵공장에라도 취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공장' 하나만 바라보고 왔는데 서류조차 통과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모두가 선망하는 꿈의 기업도, 세계적인 IT 기업도 아니면서, 양공장 따위가 뭔데 날 애타게 해...! 어쩌겠는가. 위로를 건네는 양공장 노동자를 그저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 뿐. 취업설명회에서 '우리 회사 입사하세요.' 여유롭게 웃어주는 성공한 선배를 보듯이.

  양공장 노동자의 이른 출근으로 인해 우리는 술 한 잔을 끝으로 헤어져야 했다. 우버가 귀한 더보 특성상 하루에 같은 기사를 몇 번씩 볼 때가 있는가 하면 뭔 짓을 해도 우버가 안 잡히는 때도 있다. 그래서 미리 우버를 부르기로 했다.

  "우버 올 때까지 수다 떨자고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근처에 있던 기사가 바로 호출을 잡았다. 우리는 허둥지둥 몽키바를 나섰다. 얼마지 않아 우버가 도착했고, 앞으로도 숱하게 볼 우리의 전용 기사 나단과 처음 만나게 된다. 얼굴이 벌게져서 가든 호텔로 돌아가는 그 길에는 그 사실을 꿈에도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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