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쵸 Jan 09. 2024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24

양공장 원정대, 남바완의 고난의 대서사시 6

  <탈출까지 D-93:첫 출근/하베스트 1층:곱창방>



  <로동수용소의 새벽은 어둡다>

  5시 30분에 출근해 2시 30분에 퇴근하는 삶을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일과가 내 것이 되니 그간 내가 허상을 욕망했음을 깨달았다. 피로를 넘어 과로에 절은 뇌는 오직 잠만을 원했다. 알람이 잘못 울린 거 아닐까? 하지만 휴대폰 화면에 뜬 4시 30분은 내가 설정한 시간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뇌는 잠들었는데 몸만 억지로 일으키는 건 어찌나 고역인지.

  비척비척 거실로 나오니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한 굿가이가 있었다. 멍하니 앉아 우버가 잡히기를 기다리는데 자꾸만 벽에 걸린 호랑이들로 시선이 갔다. 이런 범상치 않은 집에서 3달을 더 살아야 한다니. 그것도 크리피 한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모든 게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동안의 모든 처음이 그랬듯 이 또한 아직 낯설기 때문이라고 되뇌었다. 익숙해지면 여기서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다행히 금방 우버가 잡혔다. 가로등 하나 없어서인지 하늘에 별들이 선명했다. 이 맛에 시골 오는구나, 따위의 감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도시에 비하면 후하지만 절대적으로는 옹졸한 양이었기에. 두 줌쯤 되는 별 보자고 문명의 오지로 낙향하느니 방구석에서 유튜브로 보는 게 낫다.

모니터 먼지라해도 과언이 아닌 옹졸한 별의 양

  커다란 차가 집 앞에 섰다. 덥수룩한 수염과 까만 가죽 장갑을 낀 그는 양공장 노동자와의 읍내 관광날 봤던 기사가 분명했다. 그는 새벽 근무 중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쾌활하게 인사했다.

  "하와유?"

  "피곤해.."

  사회생활 꽤나 했음에도 늘 맥 빠지는 답으로 대화 단절을 끌어냈던 나, 이번에도 단칼에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는 몇 차례 더 소통을 시도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내 차는 말 없이 어둠 속을 달렸다. 멀리 보이는 한 줌 불빛보다 먼저 도착을 알린 것은 냄새였다. 구역질을 참으며 게이트 하우스 문을 열자 익숙한 걸음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우리도 그들을 따라 작업복과 마스크를 챙겨 공장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향할수록 진해지는 냄새에 정신이 혼미했다. 이 냄새에 익숙해지는 게 가능한가? 가능하다는 증거가 여기 다니는 노동자들이겠지. 하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들처럼 되리라는 게.

  교육장에는 인덕션 때 봤던 사람들이 그대로 있었다. 서류에 서명을 한차례 하고서 먼저 끝낸 순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나와 굿가이가 서명을 마쳤다. 누가 봐도 죄수복 같은 오렌지 작업복을 입은 슈퍼바이저는 우리를 인솔했다. 미로처럼 배치된 컨테이너들을 지나쳐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 똑같아 보이는데 지도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일부터 혼자 길을 찾을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은 컨테이너에 들어가고 휘발되었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과 지독한 악취,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창자(추정)와 장기들, 그것들을 조물딱대는 작업자들... 그대로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슈바이저는 우리를 현장 관리자 얼에게 인계했고, 그는 우리를 구석에 난 쪽문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는 퍼런 비닐을 뒤집어쓴 작업자가 철판에 쌓인 허여멀건한 것들과 사투 중이었다. 나중에야 안 거지만 허연 주머니는 양의 위였다. 처음에는 정체를 몰라서 '곱창'이라고 불렀는데 그게 그대로 굳어져 우리에게 그곳은 곱창방이 되었다.

  "신입 왔다."

  그 말을 남기고 얼은 사라졌고, 우리를 가르쳐야 하는 노동자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한국분..?"

  "네. 맞아요!"

  "어휴, 다행이다. 영어로 가르쳐야 하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세컨 비자를 위해 겨우겨우 3개월 채웠다는 그는 내일이면 자유의 몸이 될 예정이었다. 3개월을 다녀도 여전히 이곳이 지옥 같아 못 견디겠다는 그에게서 나의 미래가 엿보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갈 사람이고 나는 이제 막 온 사람이라는 것. 내게 3개월 뒤란 너무 멀고도 까마득해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체험 지옥의 현장!>

곱창방 구조(천장에서 물이 새도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 않아 노예들이 직접 봉지를 설치했다)

  정식 명칭도 없이 그냥 안쪽 방으로 불리는 이곳(곱창방)의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포장 용기 준비하기. 리드(상자 뚜껑)는 위층에서, 상자는 바깥에서 가져오는데 직접 옮겨야 하는 상자와 달리 리드는 미끄럼틀을 통해 바로 아래층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러려면 미끄럼틀 앞에 있는 레일을 쪼그린 자세로 통과해야 했다. 그때마다 억지로 잠근 단추가 복부를 압박했다. 가뜩이나 짧은 밑위는 쪼그린 자세에서 더욱 날카롭게 파고들어 마치 가랑이 단두대형에 처한 듯했다. 퇴사날까지 잊을만하면 레일에 머리를 부딪히는 건 덤이었다.

  내 키만 한 높이로 쌓인 상자를 옮길 때는 여러 장애물을 통과해야 했다. 문에는 대체 왜 달려있는지 모를 발이, 머리 부딪히기 딱 좋은 위치에는 기계가 있어서 거길 지날 때면 상자를 앞으로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바닥의 턱과 푹 꺼진 부분, 계단 앞에서는 넘어지지 않게 주의해야 했다. 그렇게 옮겨온 상자에는 비닐을 씌우고 리드에는 스티커를 붙였다.

비위가 약한 분들을 위해 이모티콘으로 좀 가려보았읍니다..

  둘째가 위 뒤집기이고 셋째가 뒤집은 위를 용량에 맞게 포장해 올려 보내기다. 이 중 업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과정은 두 번째로 12분 간격으로 쏟아지는 내장을 8시간 동안 기계처럼 뒤집으면 된다. 이 작업에 필요한 준비물은 삽과 손. 곰팡이가 잔뜩 낀 삽으로 갓 삶아진 위를 퍼서 판에 고르게 분포한다. 위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는데 그 안으로 손을 넣어 잡아당겨 뒤집는다. 안쪽면이 바깥면이 되도록. 마치 중학교 기술가정 수업의 주머니 만들기 시간으로 돌아간 듯했다. 다름이 있다면 내가 쥔 것은 천이 아니라 장기라는 것. 이는 재빨리 뒤집지 않으면 위가 사후경직처럼 질기고 차가워짐을 뜻했다.

  교육 도중 갑자기 현장 관리자 얼이 굿가이를 데려갔다. 방에는 인수인계자와 나 둘만 남겨졌다.

  "원래 이 방 소속 인원이 3명인데, 슈퍼바이저가 여기 세 명이 있는 걸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다른 부서로 데려간 것 같아요."

  인수인계 첫날인데 이틀 뒤면 이 방에서 일해야 하는 교육생을 다른 곳으로 치우다니. 그 순간 나는 양공장을 꾸준히 증오해 오던 이를 떠올렸다. 아직도 공장에 불이 나지 않았냐며, 정의로운 방화범을 기다리던 양공장 노동자를 말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나도 곧 양공장 노동자처럼 이곳을 증오하게 되리라...

  숙련자 하나에 교육생 하나, 판 위의 위가 줄어드는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일은 자비 없이 12분 간격으로 새 위를 쏟아냈다. 뜨끈한 위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냄새는 익은 팽이버섯 냄새와 비슷했다. 하지만 내가 손을 쑤셔 넣는 이것이 얼마 전만 해도 풀밭을 거닐던 생명임을 알기에 속이 메슥댔다. 더불어 장갑을 꼈음에도 느껴지는 물컹한 촉감은 소름이 끼쳤다. 내가 먹는 고기가 어떤 공정을 통해 식탁에 오는지를 막연히 아는 것과 정확히 인지하는 것은 다르다. 그 과정을 알고 생명의 희생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양 도축 공장임을 알고 왔음에도 막상 그 현장에 던져지니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21세기를 5공 시절처럼>

  현장 관리자 얼의 업무 중 하나는 사물함에 숨겨둔 시계 달기다. 그가 오기 전까지는 창문 하나 없는 감옥 같은 방에서 시간을 가늠할 방법이 없었다. 해가 떴는지, 날씨가 어떤지, 도망가기 좋은 날인지 무엇 하나도. 휴대폰을 보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꾸 쌓여만 가는 위를 뒤집는 와중에 휴대폰을 확인하기란 불가능이었다. 니트릴 장갑을 꼈음에도 손이 축축하게 젖은 데다 장갑 위에는 양 즙과 허연 찌꺼기가 묻어있었다. 3년을 쓴 휴대폰이라 언제 놓아줘도 이상할 게 없지만 이 손으로 만지고 싶지는 않았다. 닿자마자 부패할 것만 같았으니까. 그 모든 걸 헤쳐도 시간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통신제한구역'표시다. 그 단호한 제한 표시 앞에 서면 21세기 물건을 들고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한 것 같았다.

  고기를 뒤집고 뒤집고 뒤집고 뒤집다 보면 또 쏟아지고 삽으로 푸고 뒤집고 뒤집고 포장하고 레일에 싣기를 반복하고, 또다시 고기가 쏟아진다. 뒤집다가 내가 뒤지겠다 싶어도 레일은 자비 없이 새 위를 선물했다. 쉬는 시간만을 바라고 있는데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마치 무지개를 쫓는 사람처럼 내가 시간이란 허상을 꿈꾸는 걸까?

  "쉬는 시간은 40분에서 45분 사이에 바깥 방 사람들이 쉬면 저희도 쉴 수 있어요."

  인수인계자는 명확한 쉬는 시간을 알려주지 않고 눈치껏 쉬러 가면 된다고 했다. 눈치껏이 라니, 영어에는 눈치라는 단어가 없는데 어떻게 눈치껏이라는 시간이 성립하는가. 여기 한국인가?

  "그리고 쉬는 시간은 20분, 30분 두 번 해서 총 50분이에요. 그때 밥도 먹고 쉬면 돼요. 저는 냄새 때문에 입맛도 없고 화장실 가는 게 싫어서 밥 안 먹지만."

  아니, 21세기의 한국을 갖다 대기가 미안할 정도다. 흡사 5공 시절의 노동 환경이 아닌가. 노동자가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밥을 굶다니. 시드니에서는 3시부터 펍에 퇴근한 직장인들이 가득했는데... 여기가 노동자들의 천국이라는 호주 맞나?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오고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이 오듯, 지옥 같은 로동수용소에도 쉬는 시간은 온다. 바깥 방 노예들이 나갈 준비를 했고 나도 인수인계자를 따라 장갑을 벗고 장화를 씻었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해를 봤다. 형광등 불빛이 서슬 퍼런 음침한 작업장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출소한 기분이 들었다.

  이 많은 인원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식당은 노예들로 바글댔고 승냥이 떼들이 쉴 곳을 찾아 두리번댔다. 나는 인수인계자를 따라 탈의실로 갔다. 문가에 설치된 온풍기에 선 그는 내게 몸을 녹이라 권유했다. 비록 열악하기 그지없지만 따뜻한 바람을 쬐니 몸이 노곤노곤했다. 하지만 엿장수 맘대로 같은 눈치껏 쉬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쉬는 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 나갈 준비를 할 수는 없지만, 노역장에 제 때 도착하려면 출발은 미리 해야 했기 때문이다. 왔다 갔다 하는 시간 빼면 실질적으로 얼마나 쉴 수 있을까, 계산해 봐야 도망갈 이유만 늘기에 잠시 뇌의 전원을 껐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굿가이>

서양인들의 부실한 점심 도시락보다 더 부실한 노예용 새참

  두 번째 쉬는 시간에야 굿가이를 다시 볼 수 있었다. 환멸이 가득한 얼굴, 목까지 튄 자잘한 핏자국... 묻지 않아도 그가 최악의 시간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끌려간 곳은 전반적인 도축을 담당하는 하베스트 2층이었다. 이곳에서 양의 형상을 하고 있던 '사체'는 가죽, 털, 장기, 비계 제거 공정을 거쳐 '고기'로 거듭났다. 굿가이는 극초반 공정에 투입되어 워셔를 맡았다. 레일을 타고 온 양 사체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는 간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낡을 대로 낡은 레일이 멈추기 일쑤여서 노예들이 '퍽킹 레일!' 욕을 하며 수습하는 동안 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구리 앞에 장사 없기에 그는 양들의 인해전술에 정신적으로 패배했다. 아무리 자극이 지천에 널린 세상이라 할지라도 장기를 훤히 드러낸 사체 앞에 멀쩡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일이 끝났을 때 그는 닦아낸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였다. 그는 망나니가 된 것 같아 착잡했지만 사정을 알 길 없는 주변 노예들은 그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굿 가이!"

  그는 그닥 착하지 않으며 머리가 짧을 뿐 가이도 아니다. 하지만 머리만큼이나 짧은 영어의 한계로 그저 '노, 노 가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는 화장실 앞에서 또다시 가이가 아님을 입증해야 했다.

  "헤이 브로, 거긴 레이디 용이야. 가이는 그 옆이라구."

  "노 가이, 노 가이."

  굿가이라 불리기 전에는 하나의 노동자에 지나지 않던 그는 그 순간 비로소 플레처 공식 굿가이가 되었다.


  <페가수스를 못 타서 일당을 기부할 수 없다>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추억의 TV 프로그램을 아는가? 일일 직업 체험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는 방송으로 말미에 일당을 기부하며 끝이 난다. 페가수스에 올라타 기부함까지 날아가 봉투를 넣으며 말이다. 모든 회차를 챙겨보지는 않았지만 거기 나온 어떤 일도 이보다 고되지 않으리.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헐레벌떡 공장을 벗어났다.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듯이 나를 맞이한 건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탁 트인 몽골 풍경이었다. 체험 삶의 현장이 사람 내음 가득한 우리네 인생이라면, 9시간 만에 탈출한 플레처는 지옥이었다. 이게 현실이 아니라 하루면 끝나는 방송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안전이별을 위해서라면 일당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살육과 피비린내, 아비규환의 현장에 페가수스가 있을 리가. 내게 남은 3개월이란 무한과 같은 시간을 단축할 수만 있다면, 나는 케르베로스를 타고서라도 일당을 던져주고 싶었다.

  2시 30분에 퇴근하면 하루가 길 줄 알았다. '갓생'을 살겠다는 계획이 무색하게 멍하니 드러누워 있었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도시락도 싸야 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 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배달은커녕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무엇도 없었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코팅이 말끔하게 벗겨진 프라이팬, 최고 온도로 설정해도 태양열을 모으는 돋보기 수준인 인덕션을 보니 한숨만 나왔다. 와중에 아직 노동자의 비애를 모르는 아손(아들인지 손자인지)이 주변을 얼쩡대며 관심을 끌려고 애썼다. 설상가상 누가 그 애비에 그 자식 아니랄까 봐 노인도 합세했다. 사회적 가면을 뒤집어쓸 기력조차 없는데 좁은 부엌에 네 명이 버글버글대니 미칠 것만 같았다. 굿가이는 영어를 아예 못 하니 노인은 내게만 말을 걸었다. 마지못한 웃음과 단답으로 일관한 건 이 집에서 마음에 드는 건 개 밖에 없어서였다. 하지만 눈치 없는 노인은 번역기까지 써가며 소통을 시도했다. 내가 영어를 잘했다면 '귀찮은 새끼야, 저리 꺼져'라고 말했을 테고, 더 빨리 쫓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대신 묵묵히 서양인들의 부실한 점심 도시락 같은 저녁 식사를 한 뒤, 도시락을 쌌다. 크림치즈 햄 토스트, 아침까지만 해도 맛있게 잘 먹었던 메뉴인데 구역질이 치밀었다. 옥자를 처음 본 순간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작가의 이전글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2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