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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노 Art Nomad Dec 20. 2024

#38 「This Is Water」 4화

눈을 감으면 그날, 거기, 그곳에 서 있었다. 


은혜는 ‘휴가’라는 말을 알지 못했다. 이십 대 때의 은혜는 여행을 ‘스펙’으로 여겼다. 이름 있는 대학을 나와도 불안한 취업 시장에서 방송사 공채 외 작은 외주 제작회사 상시 채용까지 연달아 탈락한 이후, 십 대 스펙은 물론이고 잉여 스펙에까지 목을 매었다.      


울리지 않는 전화 앞에서 꼭 드라마 PD가 되어야 하는지, 영상을 포기하면 안 되는지 수십 번을 되물었지만, 역시나 극영상 기획과 제작이 자신이 제일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을 뿐이었다.     


때로는 일할 수 있었다. 대기업의 프로젝트성 인턴 채용이나 외주 제작사 정규직 직원들의 휴가철에 단기로.     

하지만 개인 작업과 취업 준비, 단기 채용으로 인해 시간은 더욱 지체되었고 졸업하자마자 취업에 성공한 여성 상사들보다 나이가 차곡차곡 들어갔다. 결국, 면접을 아무리 잘 보고 와도 끝내 전화가 울리지 않았다. 스물여덟, 아직 산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그녀는 상사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번번이 탈락했다.      


여러 번의 고배를 마신 뒤에 일하게 된 국제적 기업 SP 필름에 대한 그녀의 애정도는 절실했던 만큼이나 컸다. 대표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스펙 여행이었던 휴가는 취업 사기를 당한 이후 사기꾼 추적으로 바뀌었다.      


필리핀의 한인 사회는 좁으면서도 은밀하다. 누군가 그놈 뒤를 캐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추격이 느슨해서도 안 되었다. 그놈을 쫓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가는 걸 원망하면서도, 무너져 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끌어당겨 꺼지지 않는 불처럼 버티길 벌써 오 년.      


그런데 하필, 이제 겨우 시간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겨가는 차에 이딴 COVID-19가 터지다니. 망할. 여러 피노이들에게 뒤통수를 맞아가며 겨우 신뢰의 가느다란 끈을 겹으로 꼬아 그놈이 흘리고 간 역겨운 정액 자국을 겨우 몇 방울 발견한 이때, 지난 백여 년간 잠잠하던 세계적 전염병이라니.      


자칫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은혜도 알았다. 어쩌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허망하게 전염병으로 뒈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리수를 두어야 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염병에게 그 옘병할 놈을 양보할 수는 없었다.      


쇼핑몰 입구에 장총을 들고 보안을 서고 있는 남자가 은혜 쪽으로 눈을 찡긋거렸다. 은혜는 그를 무시하며 그저 건너편 비스타 베르드 리조트와 그 리조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경찰서를 노려보았다.      


친구를 사귀러 온 것도 아니었고 남자와 만나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자고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온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범인은 사건 현장에 꼭 다시 나타난다고 했다. 살인사건이 나오는 영화나 소설에서는 늘 그랬다. 하지만 사기꾼도 그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도 은혜는 묘하게 그가 다시 이곳으로 올 거라 생각했다.     

 

정보에 의하면 그는 도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뻔뻔하게도 그 근처에 기거하며 드라마에 종사하고 싶은 한국 청년들을 상대로 같은 사기 행각을 벌였다. 은혜가 당하고도 아홉 번이나. 하지만 단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그날, 거기, 그곳에 서 있었다.      


얼마나 많이 되풀이했는지 그저 눈만 감아도 그를 잡아 경찰서에 넘기러 가던 그 골목의 습도를 느낄 수 있었다.      


회사의 숙소였던 비스타 베르드 리조트에서 나오면 골목 입구에 필리핀의 편의점, 사리사리가 있겠지. 사리사리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주인 여자의 알 것도 같다는 눈빛과 그럼에도 콜라만 들이키며 꽉 다문 입술도 보이는 듯했다.      


사리사리 옆의 노점에서 구운 닭다리와 튀긴 어묵의 냄새도 기억한다. 맵기는커녕 아무 맛도 나지 않지만, 끝맛이 입술을 살짝 치고 지나가는 고추 식초 소스의 시큼한 내음도 여전히 선명했다. 열심히 닭다리를 뒤집던 노점주인의 얼굴도 눈에 선했다. 한 무리의 한국 사람들이 누군가를 양쪽에서 팔에 끼고 비참한 얼굴로 지나가자 그저 눈만 깜박이던 그 얼굴. 실컷 떠들어 대며 미지근한 맥주와 함께 밤참을 즐기던 사람들도 일순 말이 없어졌었다. 닭다리에 불이 옮겨 붙자 짧은 비명을 시작으로 다시 시끄러워졌던가.     


노면에는 아무렇게나 자란 풀들의 냄새가 났고 길에 즐비한 개똥 냄새도 간간이 맡을 수 있었다.      


그날은 특히 필리핀 특유의 더위 냄새가 났다.      


묘하도록 지치게 하는 냄새.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냄새, 수영장에 들어가 배를 동동 띄우고 밝은 달이나 보며 상큼한 깔라만시를 넣은 맥주나 마시고 싶게 하는 그런 긴장을 허무는 냄새였다.     


그러나 그날 밤만은 그걸 이겨야 했다.            


은혜와 그녀의 동료들은 충성을 다 바쳤던 사장님 혹은 이상향을 먼저 걸어간 선배, 그리고 진짜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같이 여겼지만, 허울이 벗겨지자 그 무엇도 아니었던 한 남자, 청춘이라는 피를 빨아 내장을 채운 쓰레기를 신고하러 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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