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아노 Art Nomad
Dec 26. 2024
#44 「This Is Water」 10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데이빗의 아빠는 데이빗을 임신했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데이빗 역시 그의 아빠께서 얼마나 많은 정자를 뿌리고 다녔는지, 그런 식으로 태어난 형제들은 도대체 몇 명인지 몰랐다.
그런데도 데이빗은 한국인으로 살기를 원했다.
실컷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럴 리가 없는데 낯익은 길이 나왔다. 은혜는 점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낯이 익은데 도대체 언제 왔던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은혜는 홀로 앙헬레스에 올 때마다 모든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의 수첩을 앞뒤로 뒤져봐도 이곳은 온 기억이 없었다.
누런 녹이 나오는 다 벗겨진 철판 위에 라커로 쓴 글씨가 곳곳에 보였다.
‘House 4 Sale’
당장 오늘 밤에 자고 있는 얼굴 위로 천장이 다 무너져 내리거나 벽이 허물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그 창고 같은 귀신의 집에는 당당히 ‘판매하는 집’이라고 쓰여있었다.
집들 사이의 골목은 규칙적이지 않아 마치 미로와 같았다. 판매하는 집 서너 채 뒤에서는 뭔가 매캐한 냄새가 나는 골목이 시작되었다.
은혜의 오감은 이 익숙한 불쾌감을 기억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빠져나가야 한다’라는 기억은 아니었다. 오히려 측은함이 들었다. 꼭 들어가야 한다는 감정이 더 강했다. 다시 가서 확인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그간 다들 잘 지냈는지.
단 다섯 걸음 만에 펼쳐진 세상은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트라이시겔조차 들어오길 꺼리는 그곳은 방금 지나쳐온 다 쓰러질 듯한 슬레이트 집조차도 부잣집으로 느껴지게 했다. 은혜는 이제 쓰레기 더미 위에 집을 짓고, 쓰레기 더미에서 먹을 것과 필요한 것을 찾아 살아가는 쓰레기 마을에 서 있었다.
은혜는 데이빗을 힐끗 올려다봤다. 데이빗은 빙긋이 웃었다. 은혜는 이제야 조금 감이 왔다. 강렬한 충격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오래 지나도 적절한 자극만 있으면 다시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시 쓰레기 마을을 본 은혜가 딱 그랬다.
규칙에 따라 세워진 마을이 아니니 길은 없었다. 그저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유독 쓰레기가 닳아있는 곳이 길이었다. 동북쪽으로 가면 그 길 끝 집에 메스티사 할머니가 있을 것이다. 서북쪽 갈래에는 주로 아이들이 많았다. 한집에 적게는 다섯 명 많게는 아홉 명의 형제가 있고 표준어 따갈로그를 쓸 줄 몰라서 취직을 못 한다고 둘러대는 부모가 대다수였다. 말라비틀어진 부모와 그 아이들을 보며 은혜는 한때 정자를 만드는 데는 그리 많은 영양분이 필요하지 않다는 데에 놀랐었다.
그때는 은혜도 TV에 나와 징그러운 허세의 얼굴에 분을 교묘히 칠한 오진희 의원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은혜는 이곳에 오기 전 발밑에 쌓인 쓰레기들이 돈을 받고 폐품을 팔던 한국의 쓰레기 회사에서 나온 것임을 몰랐다. 누군가는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고도 쓰레기에서 지금의 신화를 이뤄낸 중국도 있는데 우리가 필리핀을 도운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도, 그런 비뚤어진 애국심을 측은지심과 동일시하며 오늘도 그 말간 얼굴에 자부심을 한껏 씌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그러나 이제 은혜는 안다. 아니,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쓰레기 마을이 지난 오 년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녀의 쓰레기 마을에 대한 생각 역시 멈춰 있었을 뿐.
은혜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것만으로 여기서 달아날 수 있을 것처럼 세게 꽉 감았다. 하지만 발밑의 감촉도 파리의 앵앵거림도 그대로였다.
은혜는 살며시 눈을 떴다. 발밑에 선명하게 ‘참이슬’이라 적인 푸르스름한 소주병과 ‘로스팜’이라고 찍힌 누런 캔 햄 뚜껑, 검붉은 ‘신라면’ 봉지가 뒹굴었다.
데이빗이 그 갈래 길에서 서남쪽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은혜는 울컥 목구멍에 신물이 올라왔다. 은혜는 그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데이빗을 지긋이 쳐다봤다. 은혜는 그제야 자신이 이 얼굴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생각났어요?」
그녀 기억 속의 데이빗은 유난히 적대감이 가득한 눈을 가진 꼬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