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는 그녀

26주 차

by 당케맨

학식 테이블에 둘러앉아 처음 만난 동기들과 어색한 대화를 하던 중, 물끄러미 나를 보던 그녀.


그녀가 물었다. "너는 고향이 어디야?"

나는 답했다. "나 삼천포."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삼천포가 어딘데. 북한에서 온 줄 ㅋㅋ."

촌놈에게 그 말은 발작버튼이다.

나는 그만 "니 진짜 싸가지없네."라고 말해버렸다.


그게 우리 첫 대화이자 첫 만남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녀의 아버지는 고향이 강원도이신데, 마치 강원도 할머니집에서 듣던 사투리 같아서 강원도나 이북 쪽 말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해명 아닌 해명을 듣게 된 것은 시간이 흘러 그녀에게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우리의 첫 대화를 내가 상기시켰을 때였다.


그렇게 다른 쪽으로 강렬했던 첫 만남과 함께 나의 대학생활도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그녀가 눈에 밟혔다. 우선 이뻤다. 분명 싸가지 없어야 하는데, 밝고 쾌활한 그녀는 어디서나 분위기를 주도하는 관심받는 학생이었다. 반면에 나는 재수를 알아보다가 정시 추가합격으로 부랴부랴 도시로 온 촌놈이었다. 당연히 오티도 참석해 본 적이 없었고, 거기서 선배들이 친절하게 학교 생활을 알려주고 마음 맞는 동기들과 같이 시간표를 짠다는 사실도 몰랐다.


나에게 참고할만한 대학생활은 시트콤 '논스톱' 뿐이었다. 혼자 집에서 시간표를 짰다. 역시 대학생활의 꽃은 공강이 아닐까 생각하며 동아리방이나 잔디밭에 앉아 기타를 치고 막걸리를 마시는 상상과 함께 말도 안 되는 공강 시간표를 만들고야 말았다. 친구도 없는데, 혼자 강의를 듣고 게다가 오전 첫 수업을 듣고 오후 마지막 수업까지 공강인 시간표라니. 갈 곳 없던 나는 도서관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책 많이 읽었다..


그때 나를 구원해 준 사람이 그녀다. 먼저 말을 걸어주고, 친구 사귀려고 가입한 학회에서 겉돌던 나를 다른 동기들에게 소개해줘서 같이 밥 먹을 친구도 생겼다. 물론 시간표가 달라 혼자 수업 듣고, 도서관 가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화장실에서 혼자 도시락 까먹는 불상사도 생기지 않고, 저녁에 술 마실 사람이 생긴 게 어딘가.


첫 만남이 좋지 않았던 우리가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된 수많은 스토리를 생략하고(우리 딸은 이 뒷이야기가 궁금하겠지?) 그 친구가 연인이 되더니 지금은 아내가 되었다.


2012년 10월 2일. 아내와 연인이 된 날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24년 10월 5일. 12주년을 맞아 우리는 청도로 여행을 갔다. 무려 10여 년 전 군대 휴가를 나와서 기차를 타고 갔던 청도. 이번에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차를 타고 출발. 아내와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결혼하고 내가 운전도 하게 되면서 국내 여행도 이곳저곳 다니고 있다. 국내 여행도 무척 재밌다는 사실. 우리 딸에게도 실컷 알려줘야지. 이쁜 사진도 많이 남기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다.


운전을 하며 시간여행을 하듯 10여 년 전 빡빡이 군인 시절로 돌아갔다. 나는 아직 꿈이랄 것도 없던 시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뚜벅이 여행이라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줍게 자기 꿈을 이야기하던 아내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멋지게 해내고 다른 목표도 이룬 아내. 나와 달리 성실하고 계획적이고 목표지향적인 그녀에게 오랜 세월 참 많이 배웠다. 반대로 아내는 나에게서 많이 배운다고 늘 말하는데, 관계의 지속은 상호보완적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옛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청도에 도착했다. 온통 책인 내 취향 가득한 숙소에서 아내 취향 가득한 커플 사진을 잔뜩 찍고 놀았다. 요즘 아내는 아이가 자라면서 쉽게 피곤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안 그래도 편하게 쉬려고 예약한 숙소. 체크인하고 그냥 푹 쉬고 낮잠도 실컷 잤다. 여행 가면 돌아다니기 바쁜 우리인데, 달라진 모습도 즐겁다. 숙소에 분위기도 좋고 맛도 좋다는 식당이 있어 근사하게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아내는 지나오면서 본 청도역의 추어탕을 떠올렸다. 음식 취향 참 확고하다. "너는 나랑 국밥만 먹고 친구 만날 때만 스테이크, 파스타 먹더라?" 내가 자주 하는 핀잔인데, 사실은 나랑 제일 좋아하는 걸 먹고 싶은 그녀가 좋다. 알고 보니 역전추어탕이라고 청도 명물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닌데, 청도 명물은 다 즐겼다. 소싸움만 빼고. 청도 옹치기(찜닭 같은 데 매콤하고 맛있다.)와 강이 보이는 이쁜 카페에서 청도단감과 청도복숭아로 만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아. 청도 산성도 보고.. 먹은 것만 기억나네..^^;;


오래 만나 오면서 좋은 점은 함께 공유하는 추억이 많다는 거다. 많은 장소와 음식이 있는데, 에이 그러면 뭐든 싱겁지 않냐고 생각하겠지만 오래전 추억을 꺼내며 같이 다시 먹는 음식과 다시 걷는 길이 얼마나 좋은지는 그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다. 우리 딸도 이 추억에 풍덩 빠질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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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