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듯 모를듯한 소설의 이야기는 물처럼 흘러갔다
서늘한 매혹이란 이런 것 일까
한주가 지나 도서관 800번 현대소설 코너에 빼곡히 꽂힌 서고 813.7칸에서 소설
'당신의 아주 먼 섬'을 다시 찾았다
황급히 173쪽을 펼쳤다
메모 쪽지는 여전히 그대로 꽂힌 채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왔다
왠지 쪽지가 전에 것과 뭔가가 달라 보였다
순간 소리 없는 한기와 소름이 정수리까지 솟아올랐다
쪽지의 내용이 달라져 있었다
"왜 안 오셨어요 오랫동안 기다렸는데ᆢ
18일 13시 '창이공항' 4 터미널에서 다시 기다릴게요"
분명 또 다른 메시지의 메모가 새롭게 담겨져 있었다
도대체 이 메모는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 은밀한 전갈이란 말인가
책을 제자리에 꽂아놓고 죄인처럼 못 볼 것을 본 듯 나는 황망히 열람실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흰 낮달이 관악산 봉우리 위로 떠 있었다
마치 밀회의 현장을 엿 본듯 가슴이 튀고 있었다
이 소설은 2018년 1월 18일 1쇄를 찍었으니 작가가 죽은 지 1년 후에 발간된 작가의 유고작일 터이다
그런데 이 은밀한 메모지는 도대체 누군가에 의해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지 않은가
그럼 이 책이 이들의 연락 공간이란 말인가
양재 천변의 물은 비 온 끝의 첫물이라 정갈했고 팔뚝만 한 잉어들이 강물위를 유유히 떠 다니고 있었다
물줄기는 부림교를 지나 선바위, 경마장 여울목을 거쳐 양재 쪽으로 쉼 없이 흘러내려갔다
탄천으로 한강 잠실 선착장까지 이어지는 물의 행로는 자전거길로 함께 뚝섬까지 이어져 있었다
물줄기를 닮듯 백학의 놀이터가 된 갈대숲 천변은 또 다른 한 무리의 청둥오리의 생활 터전이기도 했다
후로 그렇게 놀란 가슴을 누르며 마치 남의 사생활을 훔쳐본 듯한 알 수 없는 죄의식과 두려움으로 한동안 도서관 서고와 열람실 쪽은 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멀리 하게 됐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창이'공항은 싱가포르 동북쪽에 위치한 세계 1위의 동남아시아의 대표 관문 허브공항이었다
몇 해 전 친구들과 동남아 8박 9일 자유 여행길에서 환승했던 그 화려하고 어마어마했던 그 공항이 아니던가
책의 제목 그대의 아주 먼 섬은 맹그로브 숲이 울창한 뻘밭을 지나 하얀 모래로 덮인 야자수 그늘 그 어디쯤이 아닐까 하는 생경스러운 상상을 잠깐 하기도 했다
그날 순천만 갈대 늪지를 지나 먼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등성이 전망대에서 수연은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노을은 홀로 붉게 타고 있었고
사막의 땅에 바람의 결로 새겨진 문신 같은 그대의 숨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오는 듯했다
"그곳에서 기다릴게요..."
어떻게 지내니?
시간이 흘러가니 모든 게 다 변하고 마는구나
하지만 널 원망할 순 없구나
세상엔 正道란게 없으니까
아직도 난 널 못 잊고 있단다
멀리 떠나보니까 알겠더라
빈곤해보니 더 알겠더라
사람이 사람을 잊지 못해 하는 까닭을
사람은 사람을 서로 이해 못해서
복잡하게 꼬인 사슬처럼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나 보다
어쩌다 한번 사기 친 사람은 늘 자기혐오에 빠져 죄스럽게 쫓기며 살아가지만
거짓말과 사기가 늘상인 사람은 죄의식도 없이 잘도 살더라
차라리 빨리 눈이라도 와서 세상이 다 뒤덮여버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사기 친 널 잡으러 고라니마냥 그 설야로 떠나기라도 하지 않겠니
언젠가 雪河에 두고 온 상처를 찾으러 가련다
남겨둔 아픔일랑은 서로 묻어 두기로 하자
너 없인 나도 없다고 속삭이던 유치한 거짓말과
눈을 감으면 네 생각만 난다던 감미로운 말장난의 유희에 서로 속고 속았음을 인정하자
사기꾼이 정직한 놈보다 떳떳하게 사는 세상
그렇지만 없이 살아도
두 다리 쭉 뻗고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모모야, 너는 아직도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사기 치는 일을 업으로 하고 살 테지만
그래도 네 거짓말, 달콤한 속삭임이 여전히 그립다
네 달달한 거짓말도 여전히 사랑한다
죽기 전에 한 번쯤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해 본다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