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가여운 나의 시절

by 주연

오죽하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청춘이었다. 아파야 청춘이라면 내가 바로 청춘의 대명사라 할 수 있겠다. 절대적인 어느 기준에서 나의 괴로움이 치사량이었노라 건방진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다. 다만 내가 나의 삶을 돌아볼 때 나는 불쌍하기 이를 데 없는 새파란 젊음이었다,라고 적었다가 젊음이라는 말이 아무래도 또 건방진 것 같아 조금 고쳐본다. 새파랗다기보다 핏기마저 덜 가신 어린이였다. 왜냐하면 나는 가난이라는 운명에서 긍정적이기보다 비관적이었으며, 밝게 웃기보다 엉엉 울었으며, 들장미 소녀 캔디라기보다 어느 비극이든 닥치는 대로 끼워 맞추는 비운의 여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없이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는 있으므로 잘 버티고 있다고 소문냈다. 소문을 들은 누군가 찬사와 비슷한 동정 하나를 던져주면 그것을 가슴에 훈장처럼 달고 존재의 증명이라 여겼다. 참 많이 울면서 지냈다.


가볍고 즐거운 이야기를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글을 읽는 독자들이 숨이 찰 수도 있다고 했다. 좋은 조언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껏 가벼운 글을 썼다. 그런데 그 글도 무겁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글이 가볍고 즐거운 글인지 한참을 고민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웃고 지낸 적도 많았던 것 같은데 쓰고 싶은 장면 속의 나는 울 준비를 하는 중이거나 울고 있거나 끝내 울어버리거나 했다. 기껏 생각해낸 웃어넘길 수 있는 사건도 남들이 보기엔 불쌍하거나 안타깝거나, 어쨌든 유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엇이 내 시절들을 웃음기 하나 없이 지루한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고민스러웠다. 내 글을 읽은 사람이 아주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찝찝한 감정의 원인이 되는 건 더욱 원하지 않았다. 너 이런 일도 있었잖아, 이걸 써보는 건 어때? 하는 예시까지 들었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 가볍다는 일을 글로 쓸 수는 있겠으나 진심을 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 일을 설명하는 내 글에 감정이 실리지 않을 것이 뻔히 보였다. 이쯤 되니 외면할 수 없어졌다. 나는 내 기록 속의 내 모습이 행복하길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고백하건대 내가 행복하길 바라지 않았던 나는 평범한 순간들에도 자주 울음을 터뜨렸다. 한 번은 자취방에 자러 온 언니에게 새우 버터구이를 해준 적이 있다. 언니와는 같은 대학교를 다녔지만 거의 번갈아 휴학한 탓에 함께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런 언니가 내 자취방에 자러 오는 일은 손에 꼽고도 손가락 몇 개가 남을 정도로 적었다. 그 귀한 밤에 언니에게 내준 요리는 하필 새우 버터구이였다. 새우를 좋아하는 언니의 취향을 고려하고 큰 맘먹고 버터를 사서 만든 요리였다. 바닥에 종이 하나를 깔고 프라이팬을 얹은 채로 구부정하게 새우를 먹었다. 언니는 진심으로 맛있게 먹은 것 같았다. 나도 잘 구워졌네, 하며 먹었던 것 같다. 그렇게 평범한 장면인데 며칠 뒤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베갯잇을 적셨다. 그 순간이 너무 귀하고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깔깔대며 웃어넘기는 추억일 수 있었을 텐데 기어이 가여운 장면으로 남겨졌다.


또 한 번은 생리통에 지쳐 앓아누워있는 나에게 남자 친구가 찾아왔다. 지하철 네 정거장 거리를 걸어서 왔다. 겨울의 한 복판, 몸의 열을 세상이 다 앗아가는 것 같이 추운 날이었다. 그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은 차가웠으나 안에 들어있던 순대는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입이 얼어 뭉개진 발음으로 요즘엔 왜 순대 파는 곳이 별로 없냐며 툴툴대는 볼이 너무 차가웠다. 순대를 입에 넣고 그의 볼에 손을 대는데 속절없이 울음이 터졌다. 그는 한겨울의 순대보다 귀한 웃음을 터뜨리며 엉엉 우는 내 모습을 카메라로 찍었다. 나는 볼이 너무 차갑다는 말을 열 번도 더하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에겐 그 일이 떠올리면 웃음 나는 추억이 되었지만 나에겐 떠올리면 울컥하는 눈물 어린 사건이 되었다.


그렇게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며 버텨온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는 지나가고, 있다. 눈물짓게 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나였노라고 받아들이기가 무섭게 일상이 변해간다. 사실은 가난이 아닌 내가 주체였음을 독자로 주연을 직면하기 시작하자 알 수 있었다. 그런 눈물뿐인 과거가 무색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사소하게 행복해지는 일이 잦았다. 행복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지난 삶을 그래도 살만했다, 고 말하기 시작한다면 간단하게 그렇게 될 것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기보다 ‘그래야만’ 했던 연민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성인이 되자마자부터 혼자 지내기 시작했던 부산에서의 생활을 마감한다. 영영 떠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갈 것이다. 엄마의 곁에서 시간을 보내고, 언니를 돕고, 아빠를 응원할 것이다.


울어댔던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물건들을 버린다. 가져갈 짐을 추리는 일이 지난 시간을 다시 바라보는 일이 된다. 불행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버리고, 어쩌면 지나치게 노력했던 어떤 것도 버리고, 남아 있는 미련들을 버리고, 무엇보다 나를 살렸던 연민을 버린다. 나도 모르게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었던 일상으로 갈 준비를 한다. 불쌍하지 않고, 귀하다고 해서 눈물이 나지도 않으며, 기쁨이 슬픔으로 치환되지도 않는 일상으로.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 더 많은 일상으로. 그렇게 덤덤하게 주연의 삶을 살아가야지. 진부한 말이지만 덧붙여본다. 이제는 웃을 일이 더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