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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그림 Dec 08. 2023

카레는 거들뿐

남친의 대학원 입학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쉬는 날이었다. 내가 조금 더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역시 자취생에겐 카레지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카레는 치매예방에 좋은, 기억력에 도움이 되는 음식이다. 게다가 맛있고 꽤 오래 두고 먹을 수도 있으니 바로 이거다란 생각을 한 것이다.


시험 전에 예민해질 수 있기에 괜히 응원한단 티는 팍팍 내고싶진 않고, 바빠서 요리해먹기 쉽지 않을 것 같은 남친에게 집밥을 주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서프라이즈를 포기하고 직접 물어봤다. 결과는 반가이 내가 해준 밥을 먹겠다는 것! 평소와 다른 예민상태였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까칠하게 대하지 않는 것에서도 남친의 성품을 보았던 것 같다. (요리 받고 플러스 점수도 얻어가는 너란 남자..)


정성스럽게 요리에 들어갔다. 쉬는 날이라 시간과 체력을 내어 준비하는 데 왠지 모르게 힘이 더 들어가 나는 비장하게 한우 양지도 샀다. 힘 많이 들텐데 그냥 돼지고기 카레 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이렇게 공부할 때 먹는 것에 아끼지 않는 문화는 어려서부터 내가 겪은 원가정의 문화인 것 같다.


어려서 공부하고 있는 것을 엄마는 참 중시했다. 그래서 엄청 비싼 과일을 사다 준다거나, 학원을 왔다갔다 하는 차 안에서 시간을 세이브하며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도록 진수성찬의 도시락을 싸주시곤 했다. 그 땐 엄마 차 안타고 대중교통 타고 다니며 친구들과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친구들이 약간 부럽기도 했지만, 공부가 워낙 중요한 분위기였기에 그냥 순응하며 먹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정성스러웠던 음식들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남친에게 카레를 끓여주며, 좋은 사랑이었든 고생을 자초하는 사랑이었든 좋은 것을 넣어 먹여 힘을 주고 싶은 마음만큼은 그때의 엄마와 내가 같은 거라고 믿고 싶어졌다. 엄마가 자신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정말 나를 위해서 그랬던 거라고 믿고싶어졌다. 사실 그 둘의 경계가 불확실하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지만 말이다.


나는 남친이 시험에 떨어질 것 같지 않다는 식으로 말해서 웬만하면 잘 하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한편으론 이 사람이 시험에 떨어졌을 때 용기를 주고 곁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랑이 나에게 있는지 묻게되었던 것 같다. 여러 사건들이 주는 진지한 생각들이 촉발한 진짜 성찰이 나를 더 성숙하게 해주었던 것 같다. 남친이 시험에 떨어졌다면 지금은 아마 하하 웃으며 늙다리 신부를 맞을 셈이냐고(김칫국) 얘기했을 것 같다. 그러곤 다시 묵묵히 갈 길을 갔겠지.


카레에 담긴 마음과 사랑을 점검하며 정성스레 끓인 음식은 남친이 시험 전날 잘 먹고 떡 합격했다.


앞으로 어떤 음식을 해주든, 한결같은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길 소망해본다. 맛은 흔들릴 수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요리해줄 수 있기를. 깊은 성찰과 회개, 하나님에 대한 의지함으로 생겨나는 사랑할 힘을 가지고 사랑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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