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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esy Oct 27. 2024

유산





내리는 안개비는 숲길의 저편 끝까지
뒤덮어 숲의 시작점을 지워버렸다
제주의 숲 속 도로에서 길을 잃어 어디로 가야 될지
알지 못하게 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오름과 해변의 위치를 이야기하고
아내, 아버지, 어머니, 동생과 누이, 태어나지 못한 아이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집과 파스타집이
어디인지 저지오름에서 보았던 일몰이 어땠는지

설명해주고 싶다

바다 위를 매섭게 몰아치며 배와 선원들을 위협하는 폭풍도
다음날 아침 거짓말처럼 사라지듯

성장할 수 없는 것들도
사라지기 전까지는 심장이 뛴다
사라지려는 의도로 가득할지라도

심장이 언제 멈출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심장이 뛰는 동안에는
세상의 예쁜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함께 웃을 수는 있다

따라서 나는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랬던 시간은 사실 없었다고 본다
절망의 구렁텅이는 혼자 내려가야 되는 이유를 아는가?
그건 둘이 함께라면 더는 절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일들은 시작되기 전부터

사라지려는 의도로만 가득하고

나는 아내의 어깨에 두 팔을 두르고
그녀의 따스한 이마에 나의 뺨을 붙였다

-여보, 우리 그만 슬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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