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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아 May 17. 2021

타자에 나를 던진다는 것!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

나무를 다루기 시작한 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시작은 언제 가는 혼자만의 작업공간에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언젠가 나에게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은 사라져도  디자인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은 계속되길 바랬다. 막연하지만 그런 상상이 좋았다.  




타자에 나를 던진다는 것


요즘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을 읽고 있다. 아주 얇은 책이지만 책장을 넘기는 것이 쉽지 않다. 일단 그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 무척 고되다. 에로스의 의미에 대해 지금까지 한 번도 되짚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매우 막연하고 추상적인 이미지만이 머릿속에 그려질 뿐이다. 이 시대에 에로스가 종식되었나? 에로스가 충만하지 않나? 왜 저자는 현시대를 보며 에로스의 종말을 선언했을까?


에로스란 타자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라 했다. 타자는 사람일 수도 있고 일이 될 수도 있는데 에로스의 종말이 왔다는 것은 우리에게 타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타자는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생각해보면 어떤 것을 갈망할 때, 그 대상을 생각하면서 혼돈스러웠던 것은 그 대상이 도무지 잡히지 않아서였다. 그것은 미지의 영역에 있었고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무언가였다. 한병철은 그것을 부정형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부정형은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두가 닮아지고 동일시, 표준화되어가는 시대에서는 에로스적 경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목공을 시작한 건 한병철이 이야기한, 동일화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게 정말 이율배반적인데 나도 끊임없이 주변과 동일화를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해도 표준화된 어떤 것을 자꾸 따라 하려는 욕망이 있다. 그것이 주는 안정감과 안도감에 나를 내맡기는 것이 쉽고 편안하기 때문이다. 달라지기 위해서는 늘 위험이 따르고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달라진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어설픈 흉내로 달라지는 건 어림없다. 타자에 나를 던진다는 건 그래서 어렵다. 나이가 들수록 더 심각해진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더라도 남이 잘하지 않는 것을 홀로 시도하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주저하게 된다. 주변의 타자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모든 게 똑같아진다. 미지의 세계는 더 이상 없다. 그렇게 에로스는 사라진다.


열심히 나무를 만지고 있는 내 모습 ©boah




목공이라는 타자


일단 공구를 다루려면 엄청난 기계음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제도 2미터가 훨씬 넘는 나무를 재단하기 위해서는 절단기를 써야 한다. 나무를 절단기에 올려놓고 손잡이의 버튼을 누르고 아래로 내리면 칼날이 돌면서 위이~~~~ 잉하는 기계음이 요란스럽게 울린다. 그 소리는 나를 아직도 긴장하게 한다. 한 번에 자르려고 누르면 튕겨나갈 수 있기 때문에 조금씩 깊이를 더해가며 잘라내야 한다.  손잡이의 버튼을 누르고 나무를 자르기 위해 손을 움직일 때마다 가슴은 콩닥거린다. 뭔지 모를 긴장감이 가시질 않는다. 미세 가루는 더 최악이다. 누군가가 팬벨트로 가구를 샌딩 하기 시작하면 숨을 쉬기 어려운 지경이 된다. 테이블쏘 table saw로 나무를 절단할 때도 나무가루가 사정없이 날아와 얼굴을 가격한다. 지난번에는 나무가 잘리면서 튕겨져 나온 나무칩이 나의 눈으로 정확하게 날아오는 모습이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생생했다. 나의 영특한 반사신경이 아니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나는 일단 급한 대로 보호경을 구입하였는데 뭔가 불편해서 썼다 벗었다는 반복 하며 작업을 하고 있다.


가장 힘든 것은 완성을 코앞에 두고 다시 만들어야 하는 허망한 실수를 할 때이다. 얼마 전에 리트벨드 Reitveld의 스텔만 의자 Steltman Chair 만들기에 도전했었다. 형태적으로 매우 단순하고 도면도 널리 퍼져있어서 만만하게 시작했다가 낭패를 봤다.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짜임법을 쓰기도 하고 나무에 구멍을 내서 작은 나무칩(도미노칩)으로 연결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그 구멍을 잘못 뚫으면 말할 것도 없이 전체적인 형태가 망가진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가 연이었다. 생각해보면 너무 바보 같은 일이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나의 무지함의 결과였을 뿐이다. 알 수 있다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 아주 오랜 시간 리트벨드가 고민한 과정을 겉모습만 보고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나의 오만함이 자초한 실패였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나는 결국 완성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의자에 대해 완벽하게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리트벨드의 지그재그 의자 Zigzag Chair도 마찬가지였다. 언듯 보면 4개의 판자를 연결하면 되는 아주 단순한 형태다. 나는 또또또 경계심 없이 너무 쉽게 이 낯선 의자에 나를 던졌다. 역시 지그재그는 만만하지 않았다. 의자를 구성하는 4개의 나무 판재의 이음새를 정확하게 맞추는 작업은 난이도 "상"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나는 실패를 거듭하면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이 의자를 이해하게 되었다. 예각을 절단하면서 한 번에 나무를 절단하려고 했던 처음의 생각을 수정하게 되었다. 어지간히 힘센 사람이라면 어쩜 가능할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무리였다. 나는 여러 번에 나누어 각을 쳐냈다. 천천히, 여러 번, 인내심을 가지고 시도해 보았다. 테이블쏘로 나무를 절단할 때 내 몸에서 출력되어야 하는 힘의 크기와 속도는 이론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직접 해보아야 아는, 오롯이 내가 직접 나무와 공구에 나를 부딪혀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다행인 것은 이 두 의자 모두 여전히 나에게 잡히지 않는 부정형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리트벨드를 흉내 내 보았지만 그가 설계하면서 고려했을 비례와 균형감, 특히 완벽한 무게중심을 맞추기 위해서 그가 고심했을 디자인 요소에 대한 이해가 턱 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목공은 나에게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고 타자이다. 에로스가 여전히 살아있다.


 

여러번의 시행착오 끝에 완성한 Steltman Chair ©boah
아직 진행 중인 Zigzag Chair ©boah





에로스의 종말이 오지 않기를,


지난달부터는 토요일 아침마다 소목장(인간문화재)님이 직접 가르치시는 전통 소목 클래스에 참석하고 있다. 오히려 옛 방식이 너무나 참신하고 새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먹장의 짜임을 만들기 위해 모눈종이에 손으로 일일이 그려서 본을 뜬다. 정말 얼마 만에 그려보는 손 도면인지 모른다. 소목장님이 내가 그린 도면의 선이 아주 깔끔하다면 샘플로 사용하셨다. 얼마나 뿌듯했는지 그때만 생각하면 좋아서 웃음이 스멀스멀 난다.


토요일 아침, 쉬고 싶은 주말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며 나는 나에게 질문해 보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쉬는 날에도 이렇게 집을 나서고 있을까? 내가 목공을 시작한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정말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 타자에 나를 던짐으로써 타자를 알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타자를 통해 결국 나를 확인하고 싶어서일까? 성과를 바라는 인간의 본성은 자꾸 타자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면서 타자를 소비하려는 성향을 드러낸다. 성과를 기대한다. 내가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를 계산한다. 아무도 강제하지 않았는데 나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며 착취하기 시작한다. 머리를 저어보았다. 목공을 하는 것도 이렇게 글을 쓰는 일도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쪼개서 내가 글을 쓰고 가구를 만드는 이유는 바로 그 순간에 느껴지는 나의 생기 때문이었다. 나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의 기쁨들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내가 어떤 성과를 기대했다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는 아마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목공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일도 나에게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다. 그것은 나에게 종속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더불어 아무런 목적 없이 나를 던질 수 있는 타자가 더 늘어나기를 바란다. 그럴수록 나의 에로스의 시간은 더 유효하게 될 것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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