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농담(1)
죄책감은 어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까?
추석명절 때였다. 우리 가족은 막내 동생집에서 모였다. 점심을 잘 먹고 디저트에 커피까지 마셨다. 소파를 보니, 남편과 제부 그리고 아들내미가 꿀 같은 잠에 빠져 있다. 딸내미와 조카는 방에서 알콩달콩 쉼 없이 재잘거렸다. 나도 살짝 낮잠을 잤다. 조금 더 자고 싶었는데 부엌에서 나는 달그닥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동생이 새우튀김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들 말렸다. 먹을 게 너무 많은데 뭘 또 하냐... 쉬어라... 하지만 식구들 먹이는 걸 낙으로 하는 동생이 벌써 새우 손질을 다 했다며 들떠있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하면 또 다들 잘 먹겠지 하며 나도 거들기로 했다.
"여보, 전분가루 좀 사다 줘"
동생은 자고 있는 제부를 깨워 전분가루 공수를 부탁했다. 제부가 옷을 챙겨 입자 엄마가 따라나서셨다. '나도 같이 갈까' 했는데 아직 덜 달아난 낮잠의 취기가 발목을 잡았다. 방에서는 아빠가 뭔가를 열심히 쓰고 계셨는데 조금만 더 마무리하고 따라 나간다고 하셨다. 평화로운 추석 전날의 오후였다. 아이들은 윷놀이를 하자고 거실 한가운데 담요를 폈다. 나와 동생은 전분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인터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경비아저씨였다.
"여기 어머님이 넘어지셔서 다리가 부러지신 것 같아요. 119 불러야 해요!!!"
엄마의 대퇴부는 골절된 후 회전되어 있었다. 한 눈에도 큰일이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병원으로 달려갔고 추석을 넘기고 수술을 받았다. 오래전 디스크 수술로 좋은 않은 왼쪽 다리, 7년 전 부러져 수술한 오른쪽 발목, 이번에는 왼쪽 다리 대퇴부 골절이었다. 그 날 우리는 각자 괴로웠다. 나는 '그때 내가 엄마를 따라나섰더라면', 동생은 '그때 새우튀김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빠는 '하던 일을 멈추고 엄마와 동행을 했더라면', 제부는 '내리는 빗방울에 엄마를 혼자 들어가시라 하지 않았다면', 모두가 자신을 자책했다. 그중에서도 새우튀김을 고집한 동생이 가장 힘들어했다. 우리 모두 엄마가 다치신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불행이 닥치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일에 발생했는지에 골몰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곧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죄책감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
소설 "농담"속 루치에
루치에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했다. 그녀는 살기 위해 집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녀를 받아줄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의지한 것은 동네의 패거리들이었다. 나이 열여섯에 그녀는 그 마음의 모든 사랑을 패거리들에게 주었다. 그들을 믿고 의지했다. 그들과 웃고 그들과 마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했다. 그 일이 몇 달간 계속되어도 빠져나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동네의 수치가 되었고 패거리들은 형무소로 그녀는 감화원으로 보내졌다. 감화원에서 나와 그녀는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루치에는 쉬는 날, 홀로 시간을 보내며 침잠 속에 머물렀다. 그러다 루드비크를 만났다. 루드비크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에서 제명되어 군대에 보내졌다. 열열한 공산당원이었던 루드비크은 순식간에 반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삶은 비참해졌다. 루드비크도 루치에도 삶의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루치에의 순수함, 우울한 고요는 루드비크의 마음을 흔들었다. 루치에는 루드비크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로 다가갔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채우는 빛을 그는 사랑이라고 믿었다. 삶이 나락으로 떨어져 있을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그의 삶은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휴가를 받아 부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루드비크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사랑보다 가치 있는 신념도 주의도 없었다. 그저 사랑 하나로 그의 삶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루치에는 마음속 공허함을 루드비크로 채웠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루드비크의 몸짓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루드비크의 사랑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루치에는 루드비크를 밀어냈다. 루드비크는 절규했다. 루치에에게 닿기 위해 자신이 달려온 그 험란한 길을 떠올렸다.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라고 확신한 순간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루드비크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루치에가 마음을 열기를. 그러나 루치에는 여전히 루드비크를 밀어냈다. 루드비크는 좌절과 분노로 휩싸여 모진 말을 쏟아 내고 돌아섰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며 영화 "Good Will Hunting"을 떠올렸다. 어쩌면 루치에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윌(Will)과 같은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양부의 학대를 받으며 자란 윌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간다. 자신의 재능도 무시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린 시절 그에게 부모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가 경험한 세상은 무지막지하게 그를 찌르는 송곳 같은 거였다. 세 번의 입양과 세 번의 파양을 겪으면서 그는 새로운 세상과 늘 거리를 두면서 자신을 보호하는데 익숙해져 갔다. 그러다 어떤 세상이 거리를 지키지 않고 다가오면 윌은 그 세상을 거칠게 몰아붙여 스스로 떠나게 만들었다. 그런 윌의 상처를 알아본 건 션이라는 심리학자였다.
"It's not your fault." 션은 윌에게 학대를 당한 건 네 잘못이 아니었음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했다. 윌은 통곡했다. 악독한 어른들이 윌을 학대하기 위해 그 아이의 머리 위에 얹어 놓은 죄의 무게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버텨온 서러움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윌은 타자로부터 받은 상처보다 학대의 원인을 제공한 자신을 탓하며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다. 윌은 자신의 불완전함, 자신의 미숙함 어쩌면 자신의 연약함까지도 죄라고 생각하고 살았을지 모른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션의 말은 죄책감이라는 구덩이로부터의 윌을 해방시켰다.
루치에는 루드비크와 어긋나 다시 홀로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왜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루드비크를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그녀는 모진 부모 아래 태어난 자신을, 그리고 패거리 악당들에게 당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을 죄가 없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왜 벌어진 것일까? 그건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고통에 대한 대가를 늘 자신이 치러왔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님을, 나쁜 패거리와 어울려 다닌 것이 그녀에게 행해진 나쁜 짓을 합리화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당한 고통 위에 죄책감까지 얹어 스스로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형벌을 주고 있었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감옥에 갇힌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창살이 늘 두 사람을 차갑게 갈라놓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려고 해도 온전히 그 사람과 맞닿을 수 없다. 창살 사이로 뻗어온 상대방의 손이 나를 잡아 닿기면 창살에 내 몸이 끼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그 사람이 화를 내며 멀어져도 창살 밖의 사람을 따라가 붙잡을 수도 없다.
그런 루치에를 마음의 감옥에서 나오게 한 것은 코스트카였다. 코스트카는 그녀 안에 있는 두려움을 보았다. 거기서 그녀가 나올 수 있도록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알려줬다. 더 이상 자신을 고문할 이유도 자신을 옥죄던 멍에를 짐어질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늘 무서운 과거로부터 달아나야 했고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불안한 미래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루치에에게 안주할 수 있는 현재를 선물로 주었다.
루치에가 벗어나야 했던 것 역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덫, 죄책감이라는 굴레였을지 모른다. 우리는 농담처럼 다가 온 불행 앞에 늘 스스로를 책망한다. 만약 내가 그때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그때 내가 더 잘했으면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을까? 나의 부족함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건 아닐까? 하지만 이제 깨닫게 된다. 그 일이 일어난 건 나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