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농담(2)
대학, 낭만, 이념과 농담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은 한 사람의 삶이 농담 한 마디로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의해 공산화된 체코에서 대학생 신분이었던 루드비크는 열열한 공산당 지지자였고 학내에서도 인정받는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지적이고 유머러스했고 농담을 즐겨했다. 루드비크는 마르게타라는 여학생을 좋아했는데 방학 동안 수련회에 참석한 마르게타에서 온 편지가 온통 수련회에서 받은 공산주의의 은혜(?)에 대한 내용인 것을 보고 질투심에 휩싸인다. 루드비크는 그런 그녀에게 비아냥대는 농담 한 줄을 적은 엽서를 보낸다.
“낙천주의는 인민의 아편이다. 건강한 분위기는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
농담을 할 줄 모르는 마르게타는 이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동료들에게 전달한다. 루드비크는 그의 사상을 의심받고 대학에서 제명됨과 동시에 군대로 끌려간다. 그는 한순간에 공산주의에 반하는 인물로 간주되어 탄광에까지 보내져 오랜 기간 노동을 하게 된다. 루드비크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농담의 결과라고 하기엔 그의 매일매일의 삶은 너무나 처절하고 고통스러웠다. 대학생의 신분에서 군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단순히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속한 자리로부터의 쫓겨남은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관계과 존재의 상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라고 썼다.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집단을 이루어 권력을 휘두르며 약자를 괴롭히는 행위는, 상대가 사람으로 그 사회에서 존재하는 것을 위협하는 행동이다. 피해자가 긴 시간이 흘러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시간 동안 사람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은 생명을 잃어버리는 고통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렇게 약자에게 권력을 휘두르며 승승장구하던 그 사람도, 그 유명세가 크면 클수록 까닥 잘못하면 가차 없이 사회로부터 매장되는 것을 본다. 그도 이제 집단의 무서움을 보게 된다. 자비 없는 낙인과 사회로부터의 매장의 과정은 그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변명은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그 변명에 귀를 기울이려는 자의 목소리 역시 거대한 집단의 분노에 불을 지필 뿐이다. 그렇게 그도 자신이 사람으로서 존재하던 장소에서 쫓겨난다.
군대 : 이미지가 자신이 되고 자신이 이미지의 그림자 된 곳
루드비크는 이념에 반하는 농담을 한 대가로 군대로 보내졌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병사를 인간이나 시민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았다. 병사가 되는 순간 시민권이 정지되고 사람의 지위에서 총알이나 포탄과 같은 소모품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존재이기에 어쩌면 이미 죽어있는 존재라고 서술한다. 군대에서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농담? 어림도 없는 소리다. 루드비크는 제국주의자로 낙인이 찍혔다. 그렇게 확정된 이미지는 아무리 해도 바로 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저자는 그 이미지가 루드비크 자신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며, 루드비크의 그림자가 루드비크 자신이, 루드비크가 이미지의 그림자가 되었다고 서술했다. 자신의 이미지에게 왜 나를 닮지 않았냐고 탓할 수 도 없다. 오히려 이미지를 닮지 않은 것이 자신의 잘못이 되어버린 현실이었다. 군대라는 장소는 삶의 모든 끈을 끊어버렸다. 모든 연속성이 단절된 공간, 채워야 할 시간만 남겨진 현실에서 루드비크는 순수하게 남아있는 자신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존재성을 실감하는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일생을 수고한 엄마가 빈 둥지 증후군을 경험하는 것은 지금껏 견고하게 점유하고 있던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의 이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누구세요?라는 질문에 늘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던 사람은 그 명함에 새겨진 직함이 없어지는 순간,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자신을 환대하는 장소가 사라지면 곧 자신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 나는 결혼, 육아와 더불어 근근이 커리어를 이어가다가 세월의 파도 속에 8년이라는 경력의 단절을 경험했었다. 어느 날, 오래된 서랍 속에 있던 옐로 페이퍼를 발견하고 눈물이 났었다. 늘 끼고 다니면서 스케치를 했던 옐로 페이퍼가 더 이상 나와 상관이 없어진 사실이 새삼 나를 슬프게 했던 것이다. 나는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에 기대어 살았던 시간의 끝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나의 모습을 본 것이다. 나는 디자이너라는 이미지로 살았고 그 이미지가 지워진 나를 원망한 것이다. 나 자신이 이미지의 그림자가 된 것이다.
영화관 : 현실과 등을 맞댄 장소
아무리 부정해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고통은 지속되었다. 그런 시간의 끝에 루드비크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 삶의 연속성을 상실했다는 것, 그것이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는 것, 이제 나는 결국 아무 가망 없이 내가 지금 놓여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마저도,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내 시야는 이 비인격화의 어스름에 적응해갔고 주변 사람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보다 분명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내가 그들에게 완전히 이방인이 될 만큼 아주 늦은 것은 아니었다." ("농담" 중에서, 밀란 쿤데라 저)
현실에 대한 인정과 동시에, 나락에 떨어진 루드비크를 구원한 것은 루치에, 사랑이었다. 루드비크는 영화관에서 루치에를 만난다. 삶의 바닥에 있었던 두 사람이 잠시 현실을 등질 수 있는 장소가 어쩌면 영화관이라는 공간이었을지 모른다. 공산주의라는 사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녀, 아니 그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루치에 와의 운명적인 만남, 그것이 그를 구원하였다. 사랑이라고 느낀 순간 그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를 구원한 건 그의 신분이 복귀되어서도 명예가 회복되어서도 아니었다. 그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이었다. 공허한 그의 마음에 생기가 돌았고 멈추었던 생의 시계가 다시 움직였으며 멈추지 않고 흘렀던 마음의 눈물이 마르게 되었다. 루드비크를 운명 지었던 그 어떤 사상이나 과거의 행적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루드비크를 파멸로 이끈 농담의 원인은 사랑으로 인한 질투였다. 무기력한 그의 삶을 무한한 에너지로 이끈 것 역시 사랑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처도 나락으로 떨어진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었던 루드비크가 잘 알지도 못하는 한 여자의 등장으로 구원되는 것이 농담 같은 사랑이었다.
고향 : 복수를 꿈꾼 장소
루드비크는 자신을 파멸시킨 제마네크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가 택한 복수의 방법은 제마네크의 아내를 유혹하는 것이었다. 루드비크는 제마네크의 아내를 유혹하는 것에 성공하지만 제마네크는 이미 아내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린 여제자에게 마음을 뺏긴 제마네크는 오히려 자신의 아내의 마음을 가져간 루드비크에게 고마워하는 상황에 이르고 루드비크는 어린 여자와 함께 하는 제마네크를 부러워한다. 더욱이 날카로운 잣대로 루드비크를 제명시킨 제마네크는 변화하는 시류에 따라 너무나도 편리하게 자신의 신념을 둔갑시켰다. 길고 긴 시간을 기다려 기껏 복수의 칼날을 휘둘렀지만 헛 방이었다. 복수란 상대방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행동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내 맘대로 당해주질 않는다. 제대로 된 복수를 하는 건 제대로 된 농담을 하는 것만큼 어렵다. 상대방을 생각하면서 독기를 품고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함정을 파지만 생각처럼 상대방은 곤경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은 구덩이를 가뿐히 넘어가는데, 그걸 보고 당황하던 자신이 발을 헛디뎌 허우적거리게 된다. 루드비크는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던진 한심한 농담과 그로 인해 증식된 괴물 같은 사건들, 삶이 농담이 된 현실을 치우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끝나버리는 현실이 마지막까지 그와 마주하고 있었다.
세상은 내가 계획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계획이라는 것,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아 이루어야 하는 그 목적에 메이는 순간 이미 약자가 된다. 집착으로 인한 과대한 몰입은 객관화되어야 할 사실들을 왜곡시키고 그로 인해 판단력을 상실시킨다. 복수로 인한 대결구도는 삶을 지치고 피곤하게 한다. 나의 적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고 나를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나를 세우는 것이 더 이길 승산이 있다. 적을 그냥 놓아버리는 순간,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순간이 상대방에게 복수하는 순간이고 내가 이기는 순간이다. 농담에는 농담으로 대할 필요가 있었다. 아쉬울 것 없다는 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넉살, 신경 안 쓴다는 초연함으로 가뿐히 농담의 덫을 뛰어넘어 보는 건 어떨까? 어차피 삶은 늘 그런 식으로 농담을 건네 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