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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아 Apr 26. 2021

우연히 너를 만났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저


우연이라는 말이 담긴 그 두근거림은 그것을 겪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떨림이다. 뒤돌아보면 많은 것들이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우연은 내가 견딜 수 없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열망의 결과이다. 찾고 싶은 갈망, 알고 싶은 욕구, 벗어나고 싶은 올무,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위협할 때 그것들로부터 나를 지키고 싶을 때 나타난다. 우연은 저 멀리 모퉁이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어린아이처럼 나를 놀라게 한다. '아니 이런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방구석에서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그 운명이 우연을 가장하는 것이다. 그 우연은 때론 나를 뒷걸음치게 하고 갸우뚱하게 하지만 나의 내면은 내가 그 우연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다고 비겁한 변명을 한다. 내 마음인데 내 마음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 본다. 내 것이지만 유일하게 내 것이 아닌 것이 마음이라고 믿었다. 친구 N이 나에게 말했다. 아니라고... 그게 내가 그런 거라고 내 마음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고.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게 내 마음이라고? 이토록 낯선 마음이? 무슨 말일까? 내가 지금까지 알아 온 내 마음이 아니잖아. 나는 두리번거렸다. 예전의 나의 마음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이 낯선 마음은 어디에서 온 걸까? 어느 날 나에게 다가 온 이 우연은 내가 그동안 그렇게 기다려온 나의 마음이었을까? 나는 눈물이 났다. 나는 겁이 나고 무섭다. 어느 날 나의 마음으로 들어온 이 우연이 마치 이 자리의 주인이 원래 자기 인양 마음대로 허영을 부리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과 대치 중이다. 끊임없이 우연을 의식하면서 무시하지 못한다. 도대체 이게 뭔가 하는 고민에 빠졌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그 호기심이 철없다.  


어느 날 골목에서 튀어나온 우연은 나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 주었다. 그건 매끄러웠던 나의 삶의 균열을 만들었다. 우연과 마주할 때마다 그 균열의 틈은 커졌다. 우연이 내 마음의 틈을 만들 때마다 내 마음의 조각이 부서져 나갔다. 내 마음의 부스러기는 여기저기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우연은 기뻤다. 우연은 나의 마음의 틈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간 작은 흔적처럼 희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틈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림은 기괴했다. 그 그림에는 규칙이 없었다. 나는 어지러웠다. 때론 무서웠다. 나는 너무나 괴로웠다. 우연은 말했다. 


"너는 항상 뭔가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니? 네가 그렇게 열심히 계획을 세우는 이유는? 너는 뭐가 되고 싶은데? 그거 네가 원하는 것 맞니? 네가 생각하는 거, 왜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왜 나에게 왔니? "


"나는 너에게 간 적이 없어. 네가 어느 날 나에게 나타난 거라고"


"아니, 나에게 온 건 너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에게 걸어온 건 너의 힘이었어. 너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어. 회색빛으로 내려앉은 그 날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너는 그 골목을 걸어왔잖아"


"거기에는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 나는 무작정 걸었던 거야. 너를 만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고. 나는 이런 낯선 세상이 두려워. 왜 이곳에 나를 던져야 하지?"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 아름다워. 거기에는 네가 의도한 것을 찾으려 할 때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다양한 기쁨이 있어. 왜 그럴까? 거기에는 뻔한 게 없기 때문이야. 비의도적인 행위는 우리를 그 끝을 알 수 없는 길로 이끌거든. 그곳에는 새로움과 흥미로움이 있고 늘 예상치 못한 사건이 있지. 너는 네 자리에 머물지 않고 그 골목길을 걸었어. 그리고 이내 모퉁이를 돌아갈 때마다 네 안에서 용솟음치는 호기심과 궁금증과 마주했지. 그런데 뭘 망설이는 거야?"


"나는 깃털처럼 가벼운 것들을 경멸해. 순간 반짝하고 사라지는 것들은 의미가 없잖아. 나는 영원한 것을 추구했어. 그것만이 의미 있는 거잖아. 다른 모든 건 너무 허무해. 왜 그런 것에 나를 쏟아야 하지?"


"무엇이 영원하지?"


"신이 아닐까?"


"너는? 너는 신이니?"


"나는 인간이지"


"인간의 위대함은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르는 덧없는 것들에 자신을 건다는 거야. 절망하지 않고 자신을 던지는 용기, 그건 어쩌면 네가 가장 경멸하는 가벼움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가벼움의 힘을 누가 이겨내겠어. 이제 그만 모퉁이에서 서성이고 그 모퉁이를 돌아가 봐. 그러려면 지금까지의 너의 경험과 습관의 무거움을 버리고 발을 뗄 수 있는 가벼움과 용기가 필요해."




잭슨 폴록의 그림을 보았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를 바닥에 눕히고 공업용 페인트를 뿌리는 드리핑(dripping) 기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는 전통적인 방식의 회화에서 보이는 필연성, 즉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가지는 결과물에 대한 의도, 형태의 구체성을 구현하려고 했던 기존 방식을 버렸다. 창작자가 작품을 시작할 때, 그 작품의 구체적인 형태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는 전제 자체가 새로운 것이었다. 우연의 새가 물감을 흩뿌려놓은 듯한  캔버스는 그 누구의 통제나 규칙에 따르지 않는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형상의 발현이었다. 그는 결과물보다 작업 과정에서의 손놀림, 그 순간에만 단 한 번 행해지는 우연성, 자신의 순간적인 느낌과 감각에 의지한 것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형태와 색채의 뒤섞임은 우울했던 그의 유년 시절로부터의 해방, 자유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의지였다. 우연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잠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워주었다. 우연은 그에게 더 많은 세상을 보여주었고 더 많은 세상을 만난 그는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베니스)에 전시되어 있는 잭슨 폴록의 작품, "Alchimia"(1947),  폴록에게 영향을 미쳤던 미로와 피카소의 그림도 다수 전시되어 있었다.©boah

 


우연을 만나려면 모르는 길로 나가야 한다. 처음 만난 사람의 손을 잡아야 할 수 도 있고 무엇이 나타날지 모르는 길의 모퉁이를 돌아야 한다. 안전한 길을 가는 것보다, 후회하지 않는 최선책을 찾는 것보다 전혀 다른 세상과 섞일 때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어디쯤 왔을까? 이제 골목길 몇 개를 겨우 지난 것 같다. 새로운 골목길로 접어들 때마다 두려웠지만 그만큼 자유가 커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용기를 낼 때마다 나에게 주어지는 건 자유로움이었다. 우연이 나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우연의 새가 테레자의 어깨에 내려앉았을 때 그것은 필연이 되어 그녀를 토마시에게 이끌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밀란 쿤데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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