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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san Sep 18. 2016

그녀의 이름은 테레사

라민과 죠세핀의 엄마, 테레사는 특급 요리사! 

오전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으며 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창 밖으로 키가 크고 마른 여자가 서 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었더니, 여인은 망설이다가 말한다. "저는 테레사예요. 로산나 수녀님이 편지를 써 주셨어요." 그녀가 하얀 쪽지를 하나 내민다. "일단 들어오세요." 여인에게 앉으라고 의자를 권하고 쪽지를 펴 보며 머릿속으로 로산나 수녀님을 그려본다. '누구시더라......?' 쪽지에는 필기체로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쥬디, 마르코 가족에게 

테레사는 우리 수녀원에서  3년 간 일했답니다. 요리는 물론이고 빨래, 청소, 다림질 모두 깔끔하게 잘한답니다. 테레사는 정직하고 일을 열심히 하는 편이랍니다. 가정에 도움을 줄 사람이 사람이 필요하다면 테레사를 추천합니다. 

로산나 수녀가


남편에게 로산나 수녀님이 누구시더라 하고 물으니, "며칠 전 학교에서 인사했던 미국 수녀님!"하고 대답한다. 처음 만난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여간해서 기억하지 못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한 번 만난 사람의 얼굴과 이름은 절대 잊지 않는다. '아, 이곳에서 50년도 넘게 생활하시며 대학에서 영문학 강의하시는 노트르담 수녀원 수녀님들!' 우람한 체격의 쾌활한 로산나 수녀님과 아담한 체격에 꼼꼼한 엘레노어 수녀님은 일흔도 넘는 나이에 매일 강의를 하고 계셨다. 


테레사라는 여인의 쪽지는 로산나 수녀님의 추천서였다. 나는 아직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을 두어본 경험도 없고, 고려해 본 적도 없었다. 또 낯선 사람이  추천서를 들고 찾아온 것도 좀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말을 시작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내내 말이 없던 여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한다. 

"저는 3년간 로산나, 엘레노어 수녀님이 계신 수녀원에서 일을 도왔고, 지금은 대학의 주방에서 일하고 있어요.

 조만간 대학 주방의 일은 그만 둘 생각이라서...... 대학의 루이스에게서 당신 가족들이 1년 동안 이곳에서 지내게  될 것이라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집에서 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실 테니까...... 제가 일하게 해주세요."

"저희는 가족이 많지 않아, 집안일에 도움이 필요한지 아직 모르겠어요.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적응 중이라서...... 필요하면 꼭 테레사에게 연락할게요." 나의 대답을 듣고 여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실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녀가 돌아가고,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그간 이곳에서 살아보니, 식구는 적지만 집은 넓어 청소할 공간은 크고, 빨래는 많지 않지만 세탁기가 없어 손빨래를 해야 하니 일은 많고, 특히 익숙지 않은 석유곤로를 사용해서 식사를 만드느라 조리시간이 엄청 오래 걸렸다. 이 일을 누군가 도와준다면 삶이 한결 편해질 터였다. 


 며칠 후, 학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테레사가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다가왔다. 한참 뜸을 들이다가 그녀가 말을 꺼냈다. "생각을 좀 해 보셨나요? " 나는 아직 결정을 못 했기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게..... 아직요."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세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로산나, 엘레노어 수녀님이 돌봐주셔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로 진학을 했는데, 남편을 만나서 학교를 마치지 못했어요. 그 후 아이들이 생겼는데, 남편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지금은 14살 아들과 9살 딸을 저 혼자 키우고 있어요. 학교 식당일은 이제 그만두어서, 정말 당장 일이 필요해요." 조용조용 말을 이어가던 그녀의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한편으로 가엾고, 또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일을 주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 마음이 조금 심란해졌다. "테레사, 지금은 남편이 없으니 저 혼자 결정할 수는 없어요. 내일 다시 우리 집에 와서 그때 얘기해요. 그리고 아이들을 생각해서 기운 내요." 


다음날 테레사는 밝은 표정으로 집으로 왔다.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임금과 도와주어야 할 일 등을 의논했다. 테레사는 평일 아침에서 9시에서 오후 2시쯤까지 장보기, 청소, 빨래, 점심준비, 설거지, 다림질 등 집안일을 담당하기로 했다.  임금은 월급으로 250,000 리온으로 정했는데, 우리 수입의 1/4-1/5 정도 되는 수준이었다. 테레사는 드디어 미소를 지으며, 각 방과 부엌 그리고 화장실까지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나는 갑자기 테레사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내 눈에 익숙한 아시아인이라면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을 텐데, 아직 이곳 사람들의 나이를 짐작하기에는 내 짬밥이 모자랐다. 나이를 대뜸 물어보니, 스물다섯이란다. '잉? 아들이 14살이라면서, 그럼 아들을 열한 살에 낳았다고?' 서른은 넘었을 것 같은데 스물다섯이라니..... 왠지 신빙성이 없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스물다섯이 맞다면, 나보다 어리니까 앞으로 도움을 청하기가 좀 수월하려나?' (어딜 가도 나는 유교적인 관념에서 쉽게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테레사가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짐작해서 이것저것 일을 시키면  왠지 겸연쩍어질 것 같았었다.)          


석유를 넣어야 하는 곤로는 번거롭고 기름값이 많이 든다며, 테레사는 다음날 숯을 사용하는 흙으로 빚은 화덕과 양은 냄비와 국자를 사 왔다. 어디선가 숯이 가득 담긴 자루를 짊어진 청년이 그녀를 따라 부엌까지 숯을 배달해 주었다. 테레사는 매일 현지식 점심을 준비했는데, 하얀 쌀밥에 빨간 팜오일(palm oil)과 땅콩, 땡고추를 듬뿍 넣고 만든 소스를 함께 내었다. 이곳 사람들의 주식은 쌀밥이고, 그 위에 소스를 얹어 비벼 먹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았다.

매일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때웠던 우리는 이제 테레사의 점심을 맞이하게 되었다. 윤기가 흐르는 쌀밥 위에 카사바 잎 소스(마른 생선과 으깬 카사바 잎을 벌건 팜오일, 땅콩 소스와 함께 끓여서 만듦).  고소한 오크라 소스(팜오일, 땅콩소스와 오크라를 넣고 되직하게 만듦), 크링 크링(팜오일과 마른 생선, 크링 크링이라는 채소를 넣어 만듦) 소스...... 다양한 소스를 넣고 비벼먹는 음식은 예상 밖으로 아주 맛있었다. 


유일한 문제라면 테레사가 밥을 할 때 한 솥 가득, 소스도 한 냄비 가득 만들어서 우리 가족 셋과 테레사까지 네 명이 배불리 먹고도 늘 음식이 반쯤 남는다는 점이었다. 첫날 점심을 먹고, 남은 밥과 소스를 테레사에게 싸 주었는데, 그다음 날부터 테레사는 매일 남은 밥과 소스를 싸 갔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밥과 소스의 양을 늘 반은 남을 정도로 넉넉히 만들었다. 왠지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테레사에게 점심 양을 반으로 줄이면 어떻겠냐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차피 한 솥을 요리하는데 양을 적게 하면 음식의 맛도 덜하고 숯도 아까우니 차라리 저녁까지 먹을 수 있도록 많은 양을 하는 것이 경제적이라고 조목조목 설명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맞았다. 숯불은 가스나 전기와 달리 밥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활활 타오르게 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밥과 소스를 완성할 때까지 화력을 유지하는데 줄곧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서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점심에 양껏 만들어서 저녁에는 남은 음식을 먹는 것으로!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매일 집에 돌아가면서 밥과 소스를 덜어 가져가는 것이었다. 때때로 우리는 저녁을 먹을 때 음식의 양이 넉넉지 않아 또 불을 피워야 했고, 또 한편으로 기름이 많이 들어간 현지 음식을  끼니마다 먹는 것도 그리 건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점심을 마치고 그녀에게 말했다. "테레사, 아무래도 남은 음식을 집에 가져가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저녁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점심 만드는 양을 점심 먹을 만큼만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테레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저는 점심을 먹고 남은 음식을 싸가서, 아이들에게 저녁으로 먹어요. 음식을 싸가지 않으면, 집에 가서 따로 불을 피워서 새로 요리를 해야 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숯도 들고 해서...... 화덕도 사야 하고, 냄비도 필요하고...." 그녀의 대답을 듣고 있자니, 가슴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뻔뻔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일을 시작해서 돈도 벌 텐데, 그 돈으로 스스로 생활을 꾸려갈 생각은 없는 것인지? 그리고 형편이 어려우니까 우리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싸 가야겠다는 생각을 당당하게 이야기하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시에라리온에 도착하던 첫날 공항에서 세관직원들에게 수없이 받았던 돈 요구, 다짜고짜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하다가 행패를 부리 던 불청객, 우리가 경찰을 부르니 금을 팔고 돈을 못 받았다는 둥 얼토당토않은 거짓말로 구금형을 받았던 청년 등 사건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마음을 독하게 먹고  테레사에게 말했다. "테레사의 딱한 사정은 알겠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서 매일 음식을 싸가는 건 안 되겠어요." 그런데 말을 하면서, 갑자기 엄마의 음식을 기다릴 그녀의 아이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얼떨결에 한 마디가 또 나왔다. " 집에 돌아가서 새로 밥을 짓는 것이 힘들면, 차라리 우리 집에 와서 아이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면 어때요?"                              


그 날 이후, 점심때면  훌쩍 큰 키에 엄마를 도와서 물도 길어오고, 불도 지피는 14살 소년 라민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이 예쁜 테레사의 아홉 살짜리 딸 죠세핀은 유치원에서 돌아온 안토니오와 놀아주었다. 테레사의 아들 라민은 우리 대학 옆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중학교(St. Francis secondary school)에, 죠세핀은 동네의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음식이 귀할 뿐 아니라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학교 급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모든 학생들은 오전 수업이 끝나면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시에라리온에서는 딱히 정해진 식사시간이 없고,  보통 하루에 한 끼를, 먹을 기회가 있을 때 먹으면 그게 식사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테레사네 세 식구, 우리 세 식구는 매일 점심을 함께 먹게 되었다. 테레사는 더욱 정성을 들여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냈고, 우리는 오전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특급 요리사의 오찬 시간에 맞춰 발걸음을 재촉하여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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