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은 20세기의 고전으로써, 1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공동저작이다. 우선 이들은 고의적으로 명료하지 않고 다방면으로 해석될 수 있는 단상위주로 책을 저술 -그 이유는 후술하겠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명료하고 객관적으로 정리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저자들이 원하는 바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사상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정리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다만, 이 요약 및 정리는 필자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위주로 편집되었으며, 필자의 해석이 강하게 반영되어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엔 충분한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할수도 있다. 이는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저작의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저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발생한 일이다. 또 독자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하고 싶다. 이 글은 무척 바쁘게 작성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검토되지 못했다. 이 점 너그럽게 용서해주길 바란다. 이 글을 읽기 전에, 필자가 쓴 다른 글을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정리 및 요약 을 통해 1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파악해볼 수 있을 것이며, 우울하게 문화산업을 보는 법을 통해 보다 간략화된 형태로 이 글에 대한 예습을 진행해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아도르노와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2차 텍스트를 작성함으로써 필자에게 도움을 주었던 한상원 교수, 정진범 교수, 문병호, 이병진, 홍승용, 이하준 작가. 마지막으로 연구 모임 사회비판과 대안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들이 없었다면 필자가 이 글을 작성하는데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서문
서문에서 두 저자는 “왜 인류는 징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에 빠졌는가?”가 바로 『계몽의 변증법』의 궁극적인 주제임을 밝힌다. 두 저자는 계몽과 진보가 지니고 있는 야만과 퇴보를 발견하였으며 그것을 총체적인 방법으로, 또 기존의 학문과는 다른 서술 방식으로 비판하겠다는 것이 바로 서문의 요지이다. 위의 야만상태란 바로 자본주의사회를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부정적 의미로- 물화시킨다. 두 저자는 정신은 물화에 대한 부정이라고 주장한다. 즉 -둘이 맑스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들은 정신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존 학문의 명료한 서술방식을 버린 채 단상 위주의 방식을 채택하였음을 밝힌다.
계몽의 개념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목적은 계몽을 비판하여, 계몽을 더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었다. 마치 칸트가 이성을 비판하여 이성을 올바른 사용처를 찾으려고 하였듯이 말이다. 우선, 이들이 염두에 둔 계몽은 넓은 의미의 계몽이었다. 즉 근세유럽 칸트, 루소, 볼테르, 괴테, 헤겔 등으로 대표되는 사상조류로의 계몽주의가 아니라, 인류의 지성사 전반에 걸친 계몽말이다.
이 ‘넓은 의미의 계몽’은 곧 인간을 미지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활동을 일컫는다. 그리고 그 대상은 보통 자연이었다. 자연스럽게 인간과 자연은 분리되며, 인간은 자연을 이해의 대상 또 지배의 대상으로 포착하게 된다. 반면 주술시대에 인간은 자연을 모방했다. 가령 곰을 숭배하는 부족이 곰가죽을 쓰고 그들의 모습을 흉내내는 듯이 말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신화도 곧 계몽이 된다. 왜냐하면 신화와 종교 따위도 결국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 저자가 이미 서문에서 신화가 곧 계몽이라고 서술한다.
우리는 계몽의 특징을 몇 개 꼽아볼 수 있다. 하나는 체계성이다. 국소명제를 귀납법으로 얻을 수도 있고 연역법을 통해 획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험론이든, 합리론이든 이 명제들을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체계로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학문은 각각의 명제를 정합적으로 연결하는데, 이 과정에서 추상화와 동일화가 나타난다. 사물 각각의 공통된 점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의 개념을 산출해낸다. 셰퍼드, 리트리버, 치와와등의 서로 다른 개체를 보고 하나의 개라는 개념으로 묶어내는 것이 바로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계몽의 마지막 특징은 ‘자아’다. 저자들은 칸트와 니체라는 두 상방된 사상가들을 계몽주의자라고 묶으며 해당 대목을 설명한다. 칸트는 인식들을 통합하는 존재를 ‘자아’라고 말했다. 니체의 경우는 ‘힘에의 의지’로 향하는 일련의 존재를 ‘나’라고 말한다. 이들의 자아는 결국 모두 시간 상의 일관된 나를 자아라고 정의한다. 문제는 자아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타자를 전제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나’는 ‘나’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외부의 것들을 수단화한다. 즉 계몽은 타자-특히 자연-을 추상, 동일화하여 ‘나’ -넓게는 인류, 좁게는 개인- 을 위해 이용하는 폭력을 행사해왔다. 여기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말이 인용된다. 더 큰 문제는 계몽의 폭력이 인류에게도 향한다는 것이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며, ‘나’가 아닌 인간은 결국 타자일 따름이다. 이렇게 세상을 추상화하는 과정에서 도입된 것이 바로 수학이다. 모든 것을 수학으로 따지는 자본주의의 도래는 어쩌면 역사성 필연성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본래 ‘계몽’은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허나 계몽에 의해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세계대전이 연이어 횡행했으며, 이후로는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착취가 발생한다. 또 인간은 계몽에 의해 야만상태에 빠졌으며, 사회는 전체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이전하였으나 이전보다 더 철저하고 세련되게 개인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계몽의 모순이 발생한다.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이름은, 계몽의 내재적 모순을 지적하며 이러한 부조리를 돌파하는 것에 결국 책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계몽의 또 다른 모순은 자기파괴적인 속성에 있다. 이는 단순히 고대철학이 신화를 -저자들이 신화=계몽이라고 정의했음을 상기해보자- 근대철학이 중세철학을 대처한 일뿐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계몽은 스스로 본래적 가치를 퇴락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보아 저자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계몽의 최전선에 위치한채 여러 내재적 모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 모순은 인간의 수단화, 진보의 야만화, 정신의 물화, 자유주의국가에서의 관리 등 다양한 분야와 주제들이 포괄된다.
부연 설명1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
『오디세우스』는 동명의 주인공이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묘사한 서사시다. 책의 두께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그 과정이 상당히 길고 수난스럽다. 아도르노는 -이 장은 라틴어와 고전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아도르노가 썼기로 추측된다.- 아도르노는 이 고전작품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계몽에 대해 부연설명한다. 이 장에는 ‘신화가 곧 계몽이다.’ 라는 명제와 계몽의 자연 지배에 방점이 찍혀있다.
오디세우스는 지적이며 계략을 잘 다루는 인물이다. 그는 자기자신을 지키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이성을 이용하는, 그렇게 자연∙미신 따위를 상징하는 반동인물들을 무찌르고 때론 약탈하기도 한다. 자연 앞에서 물리적으로 나약했던 그는 일종의 성장을 거듭하지만 결국 집으로 귀환한다. 즉 원래의 목적을 수행한 셈 -어쩌면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인에게 청혼하겠답시고 그의 집에서 재산이나 축내던 자들에게 피의 복수를 감행한다. 아도르노의 설명으로는 오디세우스는 고대에 나타난 근대적 자아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계몽은 곧 신화라는 공식이다.’다만 더 세밀히 파고들어보면 계몽의 특징 몇 가지가 구체화됨을 알 수 있다. 1. 자연은 인간이라는 주체의 타자로써 자연을 ‘이성’적으로 착취한다. 2. 자아의 목적은 결국 ‘자기 보존’이다. 3. 자연 -신화에서의 신 등의 존재- 에게 인간은 무언가를 받친다. 이는 탄복의 의미처럼 보이나, 특정한 목적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가령 가축을 죽이고 풍년을 기원한다던가.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이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교환’이고 ‘거래’이다. 자본주의적 행동 양식은 이미 고대부터 싹을 틔우고 있었다. 『계몽의 변증법』에 언급되는 예는 아니지만 인도 자이나교는 자신들의 ‘주문’을 통해 신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도 위의 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싶다. 4. 인간의 자연착취는 ‘다른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실제로 오디세우스는 같은 인간에게도 칼을 휘두른다. 또 거시적인 측면에서 인간은 자연과 상호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자연의 일부이지만, 인간의 내면에 감정∙욕구 등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시적인 점에서도 자연이다. 5. ‘근대적 주체’는 더 이상 신과 거래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보존을 위해 ‘지극히 합리적’으로 자신의 무언가와 ‘자기 보존’을 교환한다. 여기서도 일종의 모순이 발생한다.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일부를 희생시키는 것이니까. 이는 보통 이성을 통한 감정의 억압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정체성의 상실로도 발현된다. 인간의 행복과 보존을 위한 계몽은 결과적으로 인간 본연에 대한 착취로 현현된다.
부연 설명2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
이 장에서 저자는 계몽주의자를 빛과 어둠의 계몽주의자 둘로 구분한다. 빛의 계몽주의자는 당연 칸트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니체, 사드 등이 속한다. 우선 계몽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미성숙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것.” 즉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로 거듭나자는 것이 곧 계몽이다. 칸트는 이 판단 중 이성적 판단을 옳은 것으로 보며 감정을 배제한다.
호르크하이머는 이 장에서 니체와 사드, 특히 사드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들은 어느정도 비슷한 결을 가진 인물들이다. 이들은 칸트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의 계몽주의에 의해, 오히려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미성숙한 상황이 되었음을 비판한다. 또 인간의 이성보다 감성을 중점적으로 조망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측면에서 이들은 계몽의 계몽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니체는 이성주의를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이라고 비판한다. 인간은 자연적 욕구를 가진 존재이나, 당시의 계몽주의는 그런 요소들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위의 장에서 자기보존을 위한 자기희생을 상기해보자. 이러한 연유로 니체는 칸트의 이성주의적 노선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에 있는 의지를 지향하고, 스스로의 신념과 판단을 가지라고 촉구한다.
사드는 칸트의 이성주의가 차가운 부르죠아의 행동 논리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칸트는 이성을 통해 도덕적 세계가 오길 바랐지만, 이는 역으로 타인에게 공감을 하지 못하고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양산했다. 또 사드는 과장된 어법을 통해 “어떤 감정도 배제하고 욕망에 의거해 행위하라”고 지시한다. 이는 칸트와 반대되는 명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명제는 칸트의 그것과 동일하다. 칸트도 “어떤 감정도 배제하고 이성의 의거해 행위하라.”고 말하지 않는가?
니체와 사드는 지배올로기로 전락해버린 이성주의를 비판하며, 인간 내면의 욕구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현상황을 극복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 두 계몽주의자의 논리는, 칸트가 ‘차가운 부르죠아의 행동원리.’가 되었듯, ‘피가 끓는 나치즘의 구성원리’로 왜곡되고 만다.
문화 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자본주의는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듯 보인다. 이들은 개인들에게 자유를 선물해준 듯 보이지만, 이들은 더 세련되고 은폐된 방식으로 대중들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관리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나치즘은 동일하다. 이 장에서 주로 다뤄지는 내용은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관리하는 방법 중 하나로써 문화산업이 어떻게 기능하는지이다.
예술과 문화산업 -아도르노는 문화산업과 대중문화를 구분하며, 후자에 대해서 비판하진 않았다- 은 모두 양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져있다. 양식은 ‘소통가능성’과 연관된다. 즉 작품이 양식에서 완전히 이탈하게 된다면, 그것은 어떤 독자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이 양식이란 일종의 폭력이기도 하다. 작품을 작가 개인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이 양식은 그 표현을 사회적인 프레임 안에 가둬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진정한 예술은 이 양식의 폭력성을 인지하고 받아 들이면서도, 그 안에서 혁신을 이뤄내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가 예를 드는 사람들은 피카소, 보들레르등 -이렇게 보들레르를 칭찬하면서도 유머감각이 없다고 깐다- 이다. 아도르노에게 예술이란 긍정 -양식- 을 통해 부정 -사회에서 쉽사리 인정받지 못하는 것들- 을 드러내어 독자들에게 성찰가능성을 제공하는 작품들이다. 이런 정의는 어느정도 모순되어 보이는 점이 있는데, 아도르노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문화산업은 자신의 장기적인 존속을 위해 예술을 차용한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과 작용 따위는 예술과는 완전히 다르다. 문화산업은 양식을 무참히 짓밟는 동시에 양식에 철저히 종속되어있다. 우선 문화산업은 욕구충족을 위해 욕망을 여과없이 배설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식에 무엇보다 철저하며 거기서 벗어나는 작품들을 작품들을 배척한다. 이는 양식을 따를 수록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어 그런 것인데,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양식에 순응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문화산업은 대중의 성찰능력을 말소시키고, 또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을 소멸시킨다. 이런 점에서 문화산업은 예술의 기능을 수행하진 못한다. 물론, 문화산업의 제작자들도 창의적인 작품, 또 창의적인 예술가들을 기용할 때가 있다. 허나 이 창의성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한에서만 허용되며, 그 목적은 산업의 장기화와 더 많은 돈벌이를 위한 것일 따름이다.
문화산업은 유흥으로서의 기능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유흥이란 노동과 노동 사이의 긴장을 푸는 행위다. 허나 문화산업으로서의 유흥은 철저히 조작되었으며 사람들의 개개인의 시간 사이에 틈입한다. 그리고 문화산업은 유흥을 노동으로 변화시킨다. 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 째, 우리는 문화산업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기 보단 스스로를 소비한다. 다음 해석은 유흥이 부조리한 노동을 연장시킨다는 점이다. 문화산업은 사람들의 고통을 단기적으로 잊게 만들고 정신을 빼놓고는 다시 노동현장으로 내몬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이렇게 지속되고 반복된다.
문화산업이 기만적인 이유는 이러한 과정에서 추론해낼 수 있다. 우선 문화산업은 욕망을 충족시켜주려는 듯 행동한다. 문화산업은 마치 포르노그래피와 흡사하다. 허나 우리가 포르노그래피를 본다고 그 욕구가 본질적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산업은 욕구의 해소를 약속하지만 해소시켜주지 않고 오히려 뒤로 미뤄둔다. 이는 어떠한 면에선 인간의 욕구를 억압이다. 욕구에 대한 억압은 욕구를 왜곡적으로 해결하도록 부추긴다. 이 장의 제목이 ‘문화 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인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기도 하다.
또 자본주의사회에서 진정한 개성은 존재할 수 없다. 문화산업의 제작자들은 수 많은 것들을 카테고리로 만든다.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미리 조직되고 선택지내에서 고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화된 카테고리들은 결국 자본이라는 하나의 요소로 집중된다. 우리는 신념 역시 악세사리가 되고 상품으로 판매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미국에선 체게바라의 얼굴이 프린팅된 티셔츠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환경주의자임을, 또는 소수자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에코백을 구매한다.
마지막으로 현대사회가 이단자들을 어떻게 처단하는지 언급하고 싶다. 우선 필자는 문화산업이 인간을 양식에 순응시킨다고 전술했다. 이 순응이란 사회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마치 필연적이고 자연적인 무언가로 변모시킨다는 것도 포괄한다. 이런 순응 속에서 이제 사회의 지도자들은 이단자에게 물리적인 처벌을 내리지 않는다. 그들은 이단자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든 내버려둔다. 다만 그들은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히며 대중에게, 또 사회적으로 배제될 뿐이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점에서 이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다. 개인을 중시한다는 개인주의에서 개인은 오히려 무가치해졌다. 이는 보다 세련화된 파시즘이다.
반유대주의적 요소들: 계몽의 한계
국가를 포함하여 동일성을 가진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적이 필요하다. 모순적이게도 동일한 존재들의 공동체는 이질적인 존재를 필요로하고 포함시켜야한다는 것이다. 두 저자는 유럽에서 이러한 존재가 유대인임을 지적한다. 그들은 자신만의 전통을 고수했다. 여기서 저자들은 인간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투사임을 지적한다. 이는 필연적인 일이고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 없는 현상이다. 문제는 이 왜곡된 투사다. 이 왜곡된 투사는 편집증의 증상인데, 두 저자는 마치 사회와 대중들 전체가 편집증적 증상에 사로잡혀있는 것처럼 본다. 유럽인들은 왜곡된 투사를 통해 자신들의 분노와 죄 따위를 모두 유대인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두 저자는 이러한 왜곡된 투사에는 자본가들의 계략도 어느정도 연관되어있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착취되어있음을 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자신들도 결국 노동자일 뿐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착취하는 대상이 은행을 포함한 유통업계로 지목한다. 그리고 이 유통업계에 주로 종사하던 자들이 바로 유대인이다. 또 나치나 러시아는 자신들이 이미 압박을 받고 미래에 공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미리 전쟁을 선포한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이 바로 왜곡된 투사가 지배하는 편집증적 사회의 예에 포함된다.
자유주의는 이념적으로 옳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를 이미 선취한 것으로 여기게 함으로써 아직 남아있는 부조리를 옹호하거나 외면하게 만든다. 또 추상적인 평등 -형식적 평등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는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힌다, 즉 자유주의는 추상적 이념에서 실질적, 구체적인 무언가로 발돋움해야만 한다.
또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리적 차이도 중요하다. 기독교는 신이 인간이 되어죽었다. 즉 인간=신이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현실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허나 유대교에서는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한 여러 관습과 의례를 지켜나간다.
인간은 자연적인 생존방식으로 이디오크리진 -대상을 향해 가지는 비합리적 공포나 혐오-과 모방이라는 본능을 가진다. 허나 문명은 모방본능을 억압한다. 이 모방본능의 한 얘는 필자가 이미 위에서 언급하였다. 문명은 모방을 하는 대신 ‘개인’이 되라고 강요한다. 동시에 자연을 변형시킨다. 이에 모방본능은 왜곡되어 표출된다. 1. 모방본능은 이디오크리진과 결합하여, 자신이 다른 존재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조형한다. 즉 대상을 나처럼 만들기 위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2. 호르크하이머가 말했듯 문명은 자신이 자연의 지위를 대체한다. 파시즘은 모방본능을 억압하는 동시에 특정한 방향으로 표출시킨다. 그러한 폭력이 목표물이 대표적으로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보호받지 못하는 대상은 누구나 유대인과 같은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저자들은 명시한다. 문명은 자연에 대한 적대자임과 동시에, 자연을 함유하고 이들과 같아지려고 한다.
왜곡된 투사에 대한 주제를 이어가보자. 이런 인식 방식에서는 개인의 성찰이나 반성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래 자신이 고쳐나가야할 단점들을 상대방에게 전가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편집증적 사고는 자본주의의 강화와 발맞춘다. 왜냐하면 교양 역시 자본을 위한 상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본래 교양이란 비판적 사고능력 역시 포함하고 있었다. 허나 현대의 교양은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단편적이고 스낵적인 지식이 되어버렸을 뿐이다. 사유방식이라는 진정한 교양은 점점 축소되었고, 그에 따라 인류사회의 파시즘적 요소는 반대급부로 점점 강화되었다. 성찰을 위해선 부정적 사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긍정이 정녕 옳은 것인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과정이 곧 성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과 거짓된 유흥에 지쳐버린 노동자들에게는 더 이상 비판적 사고를 행할 여유가 남아있지 않다. 긍정은 종종 긍정되지 않은 것에 대한 폭력으로 발현된다.
이 장에서는 이전까지 저자들이 비판들을 강요하고 강화하는 동시에 통합시키고 그를 통해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비판하던 일련의 사고는 ‘티켓파워;라는 개념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로운 선택을 하며 살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시장에 나와있는 티켓들 뿐이다. 이 티켓들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조직되고 미리 제시된 것들이다. 저자들은 이런 티켓사고 자체가 반유대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반유대는 언제나 반XXX가 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이는 반도덕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