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한 달 살기 기록
2023년 1월 9일 월요일
불안해하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불안해하지 않는 엄마의 마음
싱가포르 한 달 살기 3일차
싱가포르에 온 지 3일째 되는 오늘, 저녁에 리버 크루즈를 타러 갔다가 갑자기 아들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 걱정이다. 싱가포르에서의 관광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다니기로 했으나 리버 크루즈는 여행 초반에 꼭 타고 싶어서 오늘 저녁으로 예약을 해두었다. 클라키에서 배를 타고 마리나베이 샌즈 쪽으로 한 바퀴 돌며 싱가포르의 멋진 건물들과 싱가포르의 상징인 머라이언 동상을 볼 수 있는 코스였기에 아들과 함께 멋진 야경을 보며 여행을 시작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낮엔 날씨가 너무 더워서 수영장에서 수영만 하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해가 질 때쯤 리버 크루즈를 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만 가면 되기에 가까운 거리여서 크게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도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 뒤인 포트 캐닝 역에서 내려 클라키 쪽으로 걸어가는데 아들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았다. 속이 울렁거린다고 하는데 체한 건지 다른 탈이 난 건지 짐작하기 어려워 일단 리버 크루즈 탑승하는 곳까지 천천히 걸어가 보기로 했다. 늦은 점심으로 먹은 것들이 탈이 났나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내가 걱정하면 아이는 더 불안할 것이기에 태연하게 대해줬다.
"엄마는 우리 아들이 제일 우선이야. 아들이 제일 중요하니까 어디가 불편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으면 무조건 아들이 하자는 대로 할 거야. 그러니 걱정 말고 다 얘기해 줘."
그랬더니 알겠다며 일단 걸어가 보기로 했다.
리버 크루즈 티켓 스탠드에 도착해서 바우처를 티켓으로 교환은 해놓고
아들 상태를 관찰하기 위해 바로 탑승 줄에 서지 않고 나무 옆 의자에 앉아 울렁거리는 속이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짙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배를 타고 야경을 즐기러 온 관광객들의 행렬이 꽤 길었다. 길게 늘어선 줄을 마주하고 주변을 구경하던 아들은 내 무릎에 반쯤 누워 기댄 채 쉬고 있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의 반대편에는 네댓 명 되는 남녀가 버스킹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데 얼핏 한국말도 들린다. 준비가 되자 영어로 인사를 하는데 영어의 뉘앙스가 역시 한국 사람이다.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다며 남자가 인사를 하며 먼저 노래를 시작했다. 제목은 You raise me up. 기타를 치며 부르는데 아.... 어쩌지?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주변의 다른 한국 관광객들이 박수를 쳐주며 호응은 했지만 노래를 너무... 못하는 것 같았다.
분위기 전환 겸 아들한테 "한국에서 온 형, 누나들이 버스킹을 하는데 좀 못하는 것 같아, 그치? 엄마가 더 잘 부르겠네~"라고 말하는데 그 순간 내 무릎을 베고 있던 아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두리번 거림과 동시에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아.. 역시. 아까 수영 후 늦은 점심으로 김치찌개와 불고기에 햇반 하나를 다 먹고도 라면이 또 먹고 싶다 하여 컵라면을 먹었던 게 소화가 안되어 그대로 밖으로 나와버렸다.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서 진짜 다 먹을 수 있냐고 배부르지 않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더 먹을 수 있다고, 먹고 싶다고 해서 줬는데... 내가 제대로 컨트롤을 못해준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게다가 오늘 낮엔 수영도 3시간 가까이해서 체력 소비도 많이 됐을 텐데 무리하고 과식한 상태에서 저녁 외출까지 감행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동남아 특유의 바깥 공기와 냄새, 텁텁한 기운을 마시면서 속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았다. 물어보니 지하철 타러 나올 때부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고 하니 내 짐작이 맞는 것 같다.
아이의 컨디션이 안 좋으면 다 엄마 탓으로 여겨진다. 아이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스스로 컨디션 조절을 할 수 없고 자신의 체력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곁에서 부모가 챙겨줘야 하는데 오늘은 내가 그걸 제대로 못해줘서 너무 미안했다. 멀리 여행 와서 몸이 아프면 안 되는데, 그 힘든 걸 겪게 하다니.. 자책을 하게 된다.
그래도 사람 많은 곳에서 토를 해서 부끄럽고 민망해할 아이에게 내가 우선 해줄 수 있는 건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토사물을 얼른 치우고 주변 흔적을 없애는 것. 그리고 빨리 그 자리를 뜨는 것.
나도 당황했지만 엄마는 당황하면 안 되기에 재빨리 일을 수습하고 싱가포르 강 따라 걸으며 그곳을 자연스럽게 벗어났다. 걷다 보니 저녁 바람이 선선히 불어 시원하고, 걷다 보니 아들도 이제 속이 괜찮아진 것 같다고 한다.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길이 나오는 대로 걷다 보니 알록달록한 창문들로 유명한 경찰서 건물이 보였고 라이트 쇼를 하는 빅토리아 홀이 나와서 우연찮게 밤바람을 맞으며 구경 할 수 있었다. 토를 한 이후로 부쩍 말수가 없어지고 기분이 우울해진 아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줘야 하나 고민이 되었고, 리버 크루즈는 못 탔지만 손을 꼭 잡고 같이 걷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전달해 주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컨디션이 안 좋으면 그럴 수 있으니까 괜찮아.
리버 크루즈는 못 탔지만
덕분에 아들 손잡고 이렇게 걷는 시간이 엄마는 더 좋네~
내 말에 아들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더 꼭 잡는다.
저 멀리 강 끝에 보이는 마리나베이 샌즈를 뒤로하고 우리는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너무 긴장하고 놀랐던 아들은 숙소에 들어오자 긴장이 풀려 그런 건지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얼른 씻기고 거실 소파에 앉아 내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 있게 했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잠든 와중에도 열이 계속 올라서 해열제를 먹이고 체온계를 옆에 둔 채 지금 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기에 아이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내 아이의 감정과 생각과 마음을 읽어 낼 수 있는 감(또는 촉)은 있다. 오늘 우리 아들은 즐거운 하루를 보냈지만 끝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토를 하는 바람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어쩌면 수치심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하고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생겼을 수도 있다.
엄마 10년 차인 나는 그 마음을 아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엄마 10년 차 내공이랄까.
그래서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아무렇지 않게 상황을 수습하고자 했다.
그리고 놓친 것을 아쉬워하기 보다 놓침으로써 얻게 된 소중한 시간에 대해 알려주고자 했다.
동시에 혹여 그 순간 내가 아이에게 실수하거나 아이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은 없는지 필름을 돌려 생각도 해봤다. 그래도 모르니 내일 아침에 아이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싱가포르에서의 세 번째 밤이 지나간다.
나는 오늘 아이가 겪은 상황에서 불안해하지 않고 엄마답게 잘 대응했는지 반성하며..
그리고 부디 남은 날들은 무탈하게 보내기를 기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