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허구 세계의 시뮬레이션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이 팬데믹 선언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마치 재난영화를 방불케 하는 불안과 공포가 심화되고 있는데요. 실제 바이러스의 습격으로 인류가 재앙에 빠지는 스토리를 담았던 영화나 소설에서 인류는 어떻게 전염병을 이겨냈을까요? 코로나19로 주목을 받는 영화, 소설, 게임 등을 살펴보고, 인간의 상상으로 창조된 바이러스는 실제와 어떻게 다른지 과학적으로 짚어보겠습니다.
지금의 코로나19 사태로 영화 '감기(2013년) 떠올리시는 분이 많습니다. 개봉 당시만 해도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큰 흥행은 거두지 못했지만, 5년 전 국내에 메르스 환자가 늘어나면서 재조명받았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바이러스는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 H5N1의 변종으로, 공기를 통해 전염되고 치사율 또한 100%에 달합니다. 밀입국자들이 타고 온 컨테이너 박스를 통해 한 도시에 퍼지는데요.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계대감염이 일어난 것입니다. 계대감염이란 한 숙주에서 출발한 바이러스가 연이어 숙주를 옮겨 전염시키는 것으로 숙주를 옮길 때마다 바이러스의 유전자에는 조금씩 변이가 생깁니다.
실제로 AI 바이러스는 국내의 조류 농가에 큰 고통을 안겨준 바이러스입니다. 인체 감염은 잘 일어나지 않지만 전염되는 경우 치사율이 60%에 가깝습니다. 2012년 네덜란드 에라스뮈스 메디컬센터 연구진은 H5N1에 유전자 돌연변이를 일으킨 뒤 실험용 족제비들 사이에서 계대감염을 시키자 10번째에 이르러 이 바이러스가 영화처럼 공기전염 능력을 획득하는 것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영화에서 정부는 초기에 대응하지 못하고 정치 싸움 속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감염지역의 사람들을 산 채로 살처분까지 하는 모습은 공포로 그려지죠. 반면에 영화이기 때문에 그려진 가상의 이야기도 눈에 띕니다. 감염자에게 나타나는 수포 증상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증상입니다.
또 이 영화를 접한 전문가들은 48시간 만에 100% 사망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대유행을 일으키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감염부터 사망까지 시간이 너무 빨라 다른 사람을 전염시킬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영화 속 결말은 바이러스를 이겨낸 사람의 항체를 통해 백신을 만들어 사람들을 구한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완치자의 혈액에서 항체가 포함된 혈장을 다른 환자에게 투여해 치료하는 혈장 주입 치료법은 최근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아직 그 효과에 논란이 있지만, 이번 메르스에도 이러한 치료법이 시도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됩니다.
‘아웃브레이크(1995년)’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보유한 아프리카 원숭이가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전염병을 퍼뜨리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원숭이를 싣고 간 배가 우리나라 배로 설정된 탓에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영화에는 에볼라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으나 그 특성이 에볼라 바이러스를 연상시킵니다. 출혈열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공기전염으로 변하면서 미국 전역이 일대 혼란에 빠진다는 내용인데요.
영화 속 바이러스의 치사율은 거의 100%에 달하지만, 실제 에볼라 바이러스는 그렇게까지 치명적이지는 않습니다. 또 에볼라 바이러스가 공기전염이 될 정도로 변하려면 수백 만 년은 걸려야 한다고 합니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서식지와 감염 방식이 공기전염 바이러스와 전혀 다르게 진화했기 때문이죠.
기침에 섞여 나온 에볼라 바이러스도 주변 사람에게 전염되려면 ‘세 가지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우선 코털과 기도 속의 섬모를 뚫고 기도로 진입하기가 어렵고, 그렇게 들어간다 해도 기도 상피세포의 세포벽에 가로막히게 됩니다. 통과한다 해도 기존 환경과 다르기 때문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증식하고 복제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소설 ‘28(2013년)’은 전직 간호사였던 작가가 응급실에서의 경험을 살려, 전염병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28일 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입니다. 수도권 인근의 한 도시, 개에 물려 빨갛게 눈이 붓고 온 몸에서 피를 흘리던 사람이 발견됩니다. 이 사람을 구조하던 119 구조대원들까지 같은 증상을 보이면서 정체불명의 전염병은 급속도로 퍼집니다.
섬뜩하고 잔인한 느낌이 생생히 그려지고, 개와 인간, 인간과 인간, 그 사이에서 그려지는 인간의 잔혹성이 읽는 내내 불편하게 만듭니다. 작가는 치명적인 빨간 눈 괴질이 사람과 개를 공통으로 전염시키는 '인수공통 전염병'이라는 특성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사람하고 동물이 함께 걸리는 전염병. 이를테면 광견병이나 이볼라 같은, 아니, 어쩌면 이볼라보다 훨씬 강력할지도 모르지. 잠복기가 짧고 경과도 몇 배 빠르고. 개가 개한테, 개가 사람한테, 사람이 사람한테, 사람이 개한테 전염시키는 게 모두 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 소설 '28' 중에서
코로나19, 메르스, 신종플루, 조류독감 등 최근 들어 인류를 위협해온 바이러스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감염되는 인수공통 전염병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이우송 책임연구원이 지난달 작성한 연구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에 퍼져 있는 인수공통 전염병은 120여 종에 달합니다. 국내에선 이 중 30∼40%가량이 발병 가능합니다.
인수공통 전염병은 다른 감염 질병과는 달리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기본적으로 동물의 생태계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물과 사람을 모두 통제하기 힘들고 바이러스의 잦은 돌연변이로 백신과 치료제 개발도 쉽지 않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외국에서는 위성 지리정보시스템 같은 IT기술을 전염병 관리에 적용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합니다.
바이러스가 등장하는 게임 '전염병 주식회사(Plague Inc.)'는 영국에 기반을 둔 독립 게임 스튜디오에서 개발한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입니다. 2012년 출시 이후 1억 3000만 명이 넘는 유저를 확보해온 인기 게임입니다.
게임의 목표는 섬뜩하게도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로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인데요. 플레이어의 목표는 병원체를 만들고 진화시켜 치명적인 역병으로 인류를 전멸시키는 것입니다. 게임을 시작할 때 먼저 ‘손 씻기’로 난이도를 선택하는데요. ‘쉬움’ 난이도에서는 게임 속 사람들이 아무도 손을 씻지 않기 때문에 전염병이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갑니다. 반대로 ‘어려움’ 난이도에서는 사람들이 강박적으로 손을 씻기 때문에 전파가 어려워지도록 설정했습니다.
게임에서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균류, 원생동물 등에서 병원체를 선택하고, 기후를 비롯한 바이러스 적응 환경을 고려해 처음 전염병이 발생할 국가를 정할 수 있습니다. 감염자 수가 늘어날수록 돌연변이나 진화할 수 있는 ‘DNA 점수’가 늘어납니다. 실제로 숙주를 옮길 때마다 바이러스가 숙주에 더 잘 적응하는 방향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는 현실과 일맥상통합니다.
또 공기전염을 일으키면 감염환자 수가 빠르게 증가하고, 인간과 야생동물, 가축의 생활구역이 뒤섞이면서 변종 바이러스가 등장하면 더욱 위협적입니다. 폐, 면역계, 신경계, 피부, 소화기관 등을 타깃으로 장기부전, 출혈열, 사이토카인 폭풍 등 현실 가능한 치명적인 증상들을 일으키면 게임 속에서도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가 빠르게 늘어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항하는 인류의 노력이 방해 작용을 하는데요. 서아프리카 에볼라 바이러스 사태에서 볼 수 있듯 전 세계가 막대한 자본을 투여해 치료제를 개발하기 시작하면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병원체는 거꾸로 멸종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이 게임이 오랫동안 인기를 끈 이유는 다양한 전략을 사용해 흥미진진하게 플레이할 수 있는 매력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전염병이 어떤 경로로 퍼지게 되는지 알게 되고 어려운 의학용어를 자연스럽게 접하는 것은 덤입니다.
사람들은 전염병으로 세계를 멸망시키는 이 게임을 통해 거꾸로 코로나19의 종식을 시뮬레이션해보는 것일까요? 중국에서는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전염병 주식회사의 인기가 급상승했습니다. 지난 1월 중국의 애플 앱스토어 차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했으나, 중국 사이버 관리국에 의해 불법 콘텐츠로 분류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참고
<사람마저 살처분하는 세상 오나>, 동아사이언스 2014년 1월 30일자
<에볼라, 공기로도 전염될까>, 동아사이언스 2014년 8월 26일자
<인수공통감염병 연구동향>,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전염병 게임 Plague Inc, 코로나 바이러스 발생 후 차트 상승> 가디언 2020년 3월 21일자
이종림
과거 기사 원문 http://dongascience.donga.com/news/view/5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