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우리 어디가?
페로 제도를 알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2016년 여행 중 유럽엔 뭐가 있나 스크롤을 확대하다가 우연히 바다 한복판을 확대했는데, 거기 뭐가 있었다. 좀 더 키워보니 되게 희한한 지형이 펼쳐졌는데, 그게 페로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애매하게 찢어진 것 같은, 서로 연결은 돼있나 싶으면서 너무 작아 지도에선 보이지도 않던 곳. 호기심이 동했다. '페로 제도 여행'을 검색하니 몇 건의 블로그가 나오지만, 별다른 여행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호기심만으로 9박 10일의 일정을 잡고, 토르스하운 공항에 발을 디뎠다. 동양인은 나뿐이어서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자동 변속 렌트 차량을 구하지 못해 뚜벅이로 여행한 주제, 게스트하우스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토르스하운 꼭대기에 숙소를 잡아 나가기가 귀찮았던 기억이 가득하다.
그래도 나름 핫한 스팟은 다 보고 다녀서, '세상에 이런 곳이 있구나. 다시는 올 수 없겠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2023년에 결혼을 했다. 신혼여행지 후보는 내가 제안했는데, 1번이 네팔(에베레스트 캠프 등정), 2번이 탄자니아/케냐(사파리), 3번이 아이슬란드였다. 내심 아내가 네팔을 골라주길 바랐지만 신혼여행은 평화롭게 다녀오고 싶다며 주저 없이 3번을 골랐고, 우린 아이슬란드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문득 페로 생각이 났다. 내가 느꼈던 그 바람. 땅. 풍광. 그리고 내가 서있던 그 장소를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 방문으로부터 7년 후, 아내와 함께 페로 제도를 밟았다.
날씨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1년에 260일 넘게 비가 오기로 유명하지만, 우리는 운이 좋았다. 일단, 우린 차를 빌렸다. 버스가 올지 안 올지 전전긍긍하던 7년 전과는 다르지. 마치 그때 못 누린 걸 이번에 다 누리라는 페로 신의 계시가 있던 것 마냥 10박 11일 간 비는 3일 정도 왔고, 맑은 날씨(일단 비만 안 오면 흐려도 맑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다.)가 우릴 반겨줬다. 내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꼽았던 미키네스는 더없이 맑은 날씨를 보여줬다. 이제 페로는 아쉽지만 안녕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즐겼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우리는 굉장히 만족하며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와 회사를 다니던 중, 나에게도 고비가 찾아왔다. 4년 가까이 회사에 몸과 마음을 다해 일했는데, 조직과 사람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니 동력을 잃었고, 그동안 몸으로 견뎌왔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이런 상태인지 전혀 몰랐고, 그럴 거라고 생각도 안 해봤다. 지난 2년 간 온갖 방법을 써봐도 나아지지 않던 기억력이 우울증 때문이라는 걸 알고 난 후로,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했다. 올해 초부터 마음의 건강 관리를 위해 감정과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을 기록하는 앱을 사용하고 있다. 그 앱을 쓰다가 어느 날 '긍정적 감정'일 때 영향을 미친 요소에 생각보다 '가족'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사실, 아내를 제외하면 '가족'이라는 개념은 내게 그렇게까지 큰 의미는 아니었다. 자식은 자식으로 태어나 살고, 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하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가족과의 대화나 그 존재가 내게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그동안 나는 가족에게 무엇을 주었나라는 생각을 해봤다.
내가 어릴 때, 아빠는 며칠씩 출장을 가 집에 못 들어오곤 했다. 어릴 때 추억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아빠와 아들이 원래 그런 건지 우리는 그냥 그런 한국의 아빠와 아들처럼 지냈다. 가족 여행이나 여름휴가를 가본 지는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도 안 난다. 엄마와의 추억, 아빠와의 추억은 뭐가 있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원래는 혼자 한 달 정도 떠나 있을 계획이었는데, 부모님이랑 같이 가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같이 여행을 가는 게 어떻냐고 물어봤다. 논의 결과 엄마는 체력 문제로 같이 갈 수 없게 됐고, 아빠와 둘이 가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아빠랑 같이 뭘 해본 게 정말 오랜만이다. 60대 아빠와 30대 아들의 여행이라니. 그럼 어디를 가야 할까? 아프리카나 중남미(위험해), 북미(내년에 갈 거야) 코카서스(힘들어), 중동(더워) 유럽(거의 다 가봤어), 아시아(언제든지 갈 수 있어), 발칸반도(좀 열악해), 호주(너무 넓어) 그럼 남은 건 북유럽 정도인데. 스칸디나비아 3국은 좋지만, 그렇게 오래 있을 곳은 아니지. 그럼 아이슬란드랑 페로 남았네. 근데 8월에 갈 건데, 아이슬란드는 지금 와서(7월) 예약하긴 너무 늦었어. 그럼 남은 건 페로네? 페로로 가자.
그렇게 2024년 8월, 아빠와 나는 페로를 밟았다.
페로 제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