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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아빠, 30대 아들의 페로제도 여행 21밤 1

8/8 흐리면서 맑음

by 페로 제도 연구소
1일차 동선
[숙소] Citizen M > [출발 공항] CDG > [경유 공항] CHP > [도착 공항] FAE > [공항] 렌터카 수령 > [마트] Bonus > [숙소] Hotel brandon > [뷰포인트] HOTEL FØROYAR > [식당] Katrina Christiansen > [뷰포인트] Saksin




개인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별로인 여행지 3곳을 꼽으라면 파리를 1순위로 얘기하는 편이다(2위는 런던, 3위는 베를린). 지저분한 도시, 소매치기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치안, 별로 볼 것도 없는 스폿들(예술에 관심이 없음), 소위 말하는 '파리 감성'까지 나랑 안 맞았기 때문이다,


파리에 저녁에 도착해서 1박 후 페로로 들어가는 일정이라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파리답게 방은 굉장히 좁았고, 두 다리를 뻗으면 맞은편 벽에 거의 닿을 정도의 숙소라 되게 별로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새벽에 일어나 씻고 조식을 먹으러 갔는데.


방컨디션에 비해 조식은 정말 굉장했다! 빵 종류가 진짜 많았는데 크루아상이 정말 맛있었고, 빵오쇼콜라는 한입 물자마자 입안에 빵과 초코 향기가 가득 들어차는 것이 역시 훌륭했다. 그리고 훈제연어가 정말 보기 좋게 놓여있었는데, 조금 짜긴 했지만 조식 퀄리티 치고는 굉장히 좋았다. 아빠는 크라상을 한입 먹어보더니 아재의 그것이 발동했는지, '이게 진정한 파리크라상이다'라고 했다. 그 외에도 웨지감자, 버섯볶음, 스크램블 에그, 구운 베이컨이 있었는데 냄비에 닫힌 채로 담겨있어 사진을 찍진 못했다. 영상을 위주로 찍다 보면 정작 중요한 사진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키위, 파인애플, 오렌지, 망고, 자몽도 있었는데 지금 보니 영상으로만 찍었네. 그냥 맛있는 게 앞에 있어서 마음이 급했나 보다.


조식이 놓인 테이블을 이곳저곳 둘러보는데, 버터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먹어본 적도, 실제로 본 적도 없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뭐지? 하면서 다가가는 순간, 얼마 전 유튜브 쇼츠에서 본 버터라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버터계의 에르메스니 샤넬이니 하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이 버터의 이름은 '라꽁비에뜨'. 한국에선 정말 비싸지만(15g*30개=3만 원 내외) 프랑스에서는 아주 싸니까 꼭 사 오든 먹든 하라는 내용이었는데, 몇 개 가지고 와서 먹어보니 정 말 정 말 맛있고, 부드러웠다. 이런 게 쇼츠의 순기능인가! 글을 쓰다가 아내에게 꼭 이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 쿠팡에서 주문하고, 다시 글을 쓰는 중이다.


작년 신혼여행 때 페로에 오기 위해 파리에 며칠 머무르며 그 부정적 감정이 조금 희석됐지만, 여전히 돈 줘도 갈까 말까 고민하는 장소였다. 그런데 이번에 크루아상에 이 버터를 발라먹으면서 파리에 다시 오고 싶다, 파리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가 최악의 여행지에서 좋은 여행지로 바뀌는 순간이었고, 아내랑 같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그릇 뚝딱 비우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체크인을 했는데, 아차. 사전 체크인을 안 했더니 서로 붙은 두 자리가 없어 아빠랑 떨어져 앉았다. 그리고 짐도 셀프로 부쳐야 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아빠도 새로운 시대에 그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할 것 같아 한번 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하필 기계 오류로 결국 에어프랑스 체크인데스크에 가로 가서 수속을 마무리했다.


우리의 항공권은 코펜하겐을 경유하는 루트인데, 파리-코펜하겐 구간의 운항사는 에어프랑스, 코펜하겐-페로 구간은 아틀란틱 에어웨이였다. 일반적인 경유라면 목적지까지 짐이 자동으로 가긴 하는데, 경유 시간도 50분밖에 안 되고 혹시 몰라 짐이 어디까지 가는지 에어프랑스 체크인 데스크에 물어봤는데 모른단다. 그저 코펜하겐에 가면 확인해 보라는 말뿐... 그래서 불안감을 안고 게이트로 일단 갔는데, 근처에 에어프랑스 서비스센터 같은 게 보였다.


잔뜩 희망에 부풀어 가서 물어봤더니, 코펜하겐 공항 가서 짐을 옮겨라 (또는) 옮겨달라고 해야 한단다. 50분밖에 없는데 그게 가능할까?라는 생각부터 들었지만, 여하튼 해결의 실마리는 얻었으니 가서 하기만 하면 된다. 근데 갑자기 직원이 '안녕하세요'라고 했다. 나는 한국인인 걸 밝힌 적도 없는데. 가끔 인터넷에서 한중일 외모 비교를 하면 한국남자 특징이 댄디함, 옷 잘 입음 뭐 이런 거던데 나는 그거랑 거리가 멀다. 중국인이랑필리핀인으로 오해받은 적은 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호텔에 체크인할 때도,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도 한국말로 인사를 들었는데, 기분은 좋았지만 느낌은 좀 이상했다. 한국인인걸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코펜하겐 공항에서 환승할 때, 터미널 3에서 2로 가야 해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지만 나중에 구글맵을 검색해 보니 걸어서 4분이라 좀 안심이 됐다. 7년 전 코펜하겐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공항이 이렇게 작았나? 싶었지만 어쨌든 가깝잖아? 한잔해~. 플랜 B가 없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고, 안전제일형인 나에게 변화를 줘보고 싶어서 모험해 본 건데 나름 짜릿했다. 사실 직항을 타기 위해 파리에 1박 더 해야 한다는 게 너무 싫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긴 했지만... 하지만 마음속에 경유 비행기를 놓칠 만큼의 리스크를 갖고 다니는 건 내 타입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남아 화장실에 갔는데 칸이 4개 있었다. 순서를 기다리는 대기줄이 잇었는데 그중 2번째 칸만 문이 열려있었다. 누구 하나 가보진 않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다들 직감했을 것이다. 그렇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한 용자가 캐리어를 끌고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 뒤론 어떻게 됐는진 모르겠지만… 그리고 나는 3번째 칸에 들어갔는데 마침 휴지가 다 떨어졌다. 그래서 기다리는 사람한테 저기 휴지 다 떨어졌다고 얘기해 줬더니, 고맙다고 한다. 작은 배려지만 어쩌면 '그 사람의 하루를 구해줬나?'라는 생각이 들어 혼자 조용히 웃었다.


올라오는 길에 당분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못 마실 것 같아 스타벅스에 들렀는데, 흥겨운 노래가 나오고 40~50대로 보이는 흑인 여직원이 주문을 받고 있다. 그런데 내가 톨사이즈라고 말하자마자 컵을 엄청 탁 탁 내려놓아서 '기분이 나쁜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뒤돌아 바로 커피머신을 만지며 나오는 노래에 맞추어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나는 자의든 타의든 즐겁게 일하는 사람을 보면 기분이 굉장히 좋아지는데, '저 사람은 자기가 즐겁게 일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물론 프랑스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코펜하겐행 비행기의 보딩이 시작되어 탑승을 시작했다. 탑승 전에 '아빠~ 자리 잘 확인해'라고 약간 놀리는 말투로 얘기했는데, 자리에 앉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 표를 보니 내 자리는 한 칸 뒤다. 아빠는 내 앞앞자리에 있어서 몰랐지만, 꽤나 민망했다…. 어쨌든 이제 페로 제도에 짐만 제대로 도착하면, 적어도 3주 간 별다른 걱정은 없는 것이다. 사실 걱정이 없다기보다는, 날씨가 제발 좋고(이 바람은 도착하자마자 제대로 바람에 날아갔다.) 3주 페로에서 파리로 돌아오는 항공기 지연이 없길 바라야 하는 거, 에어비앤비 세탁기가 제대로 작동할지 걱정하는 거, 그리고 혹시 어제 파리에서 묵은 숙소에서 빈대가 옮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함 등이 있다. 어젯밤에 뭐에 물렸는데, 딱 두 개가 작게 연달아 물렸기 때문이다. 제발 빈대만 아니길 바라며 잠시 눈을 붙이려고 하는데...


페로 가면 무슨 영상을 찍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짐벌과 핸드폰을 연결하는 작은 클램프처럼 생긴 부품을 챙겼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하필 딱 그 생각이 든 시점이 이륙 직전 활주로 택싱 중이라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에서 생각나서, 계속 불안감이 밀려왔다. '페로에 DJI 짐벌이 있나?', '있다면, 집게 부분만 살 수 있나?', '아니, 일단 페로에 전자제품을 팔긴 하나?'같은 걱정이 든다. '아니야, 이건 내 힐링 여행이잖아. 그리고 한 번쯤 되는 대로 해보기로 했잖아. 그냥 내려서 확인해 보자!'라고 마음먹은 지 5분 후, 짐칸을 열어 가방을 꺼낸다. 그 어느 때보다 떨리는 마음으로 빠르게 확인하는데, 정말 다행히도 그 파트가 있다. 그제야 피곤에 젖어있던 눈꺼풀이 슬슬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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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이 끝나고 활주로에 내려서 창밖을 봤을 때, 가장 처음에 든 생각은 '망했네'였다. 2016, 2023에 이어 세 번째 착륙도 이럴 줄은 몰랐지. 두 번은 우연이라 쳐도 세 번은 너무 하잖아. 그래도 이 회색이 가장 페로다운 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날씨가 맑으면 진짜 좋긴 한데, 오히려 맑은 날은 어쩌다가 한 번 있는 유니크한 이벤트 느낌이랄까? 뭐, 그래도 비는 부슬비정도니까 날씨가 완전 최악일 정도로 나쁘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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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속한 날씨지만, 바람소리만큼은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부슬비라 다행이라는 내 원영적 사고에 하늘이 감동이라도 한 건지, 비행기에서 내리자 이내 비가 그쳤다. 하지만 안개가 상당히 낮게 껴서 시야가 차단됐다. 한 가지 다행인 건 그래도 착륙은 했다는 거? 레딧에서 봤는데, 아틀란틱 에어웨이에서 운항하는 기종은 안개 시에도 착륙이 가능한 시스템? 같은 걸 탑재했다고 한다. 그래서 타 항공사의 페로행 비행 편은 취소됐는데, 왜 아틀란틱 에어웨이만 운항하는지 물어보는 글이 몇 개 있던 게 기억이 난다.


공항과 붙어있는 건물에 렌터카를 수령하러 갔는데, 작년에 있던 그 친절한 청년이 다시 나를 맞이했다. 물론 그는 나를 몰라봤지만... 이것저것 설명을 듣고 내 차종을 말해주는데, 폭스바겐 티크로스를 기대했지만 '닛산 니로'라는 말을 듣고는 좀 실망했다. 폭스바겐이 딱히 좋아서는 아니고, 그냥 니로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대학생 때 과 후배가 몰던 니로를 한번 타봤는데, 승차감이 그닥이었거든. 지금이 2024년인데 키를 꽂아 돌려 시동을 걸어야 하고, 사이드 브레이크도 있고 역시나 승차감이 약간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엔 사이드 브레이크가 걸린 상태인지도 모르고 '후진이 왜 안 되지?' 하면서 풀액셀 밟다가 큰일 날 뻔했다.


오늘의 첫 계획은 공항 앞 식당인 Cafe Zorva에서 점심을 먹고, 뷰포인트인 위치스 핑거 트레일(Witchis finger trail)에 갔다가 토르스하운으로 이동하는 거다. 날씨가 조금이라도 좋을 때 트레킹을 하려는 기가 막힌 전략이었지. 누구나 페로에 가면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날씨를 마주하기 전까진... 위치스 핑거 트레일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나올 때는 거의 그쳤던 부슬비가 도착하니까 하차하는 타이밍에 맞춰 강한 비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안개가 너무 짙어 트레킹은 포기하고 일단 숙소 체크인을 하기로 한다. 페로의 비와 바람을 맞으면서도 걷는 이유는 주변의 풍경을 보기 위함인데, 그게 없어지니 굳이 트레킹을 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페로에 오래 머물 거니까 토르스하운(Tórshavn)으로 가 체크인하기로 한다.


짙은 안개 때문에 보이는 것도 제대로 없었지만 토르스하운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빠에게 페로의 첫인상이 어떤지 물어봤다. 사실 긍정적 대답이 나오길 간절히 바랐다. 3주나 있어야 하는데, 첫인상이 안 좋으면 굉장히 난감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내 여행의 포커스가 힐링보다는 효도에 좀 더 가까워진 걸 이때는 몰랐지.) 다행히도 아빠의 대답은 ‘아직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노년에 살아보고 싶은 곳’이었다. 은퇴를 앞둔 사람에게 노년에 살아보고 싶은 곳이라니, 그만큼 긍정적이란 뜻이겠지?


숙소로 가는 길에 페로의 대표적 마트 체인점 보너스(Bonus)에 들러 물과 과자, 과일을 샀다. 내가 첫 번째로 집었던 건, 사진의 맨 아래 있는 갈색 'KAKAO' 우유다. 우유의 진한 맛이 느껴지면서도 적당히 고소하고, 살짝 꾸덕하면서도 초코의 맛이 정말 잘 느껴진다. 가격은 11.9 DKK로, 한화 2,400원. 사악하다. 아빠가 생수를 집길래 한국에 비해 가격이 3~4배 비싸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이슬란드와 더불어 페로의 수돗물은 정말 깨끗한 편이라 화장실 물을 마시면 된다고 말해드렸지만, 아빠는 수돗물을 그냥 먹는다는 게 껄끄러웠는지 그래도 물을 사고 싶다고 한다. 처음부터 너무 내 생각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 그냥 물을 샀다. 아빠도 며칠 지내다 보면 페로 물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게 되겠지.(내가 아이슬란드와 페로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뜨거운 물로 샤워하며 하루의 피로를 샤워하다 갈증을 느낄 때 바로 찬 물을 틀어 벌컥벌컥 마시고, 따뜻한 물로 다시 샤워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아빠는 과일이 먹고 싶었는지 사과 3개를 샀다. 아빠는 아침마다 과일을 하나씩 먹는다고 했다. 아빠가 그런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해 보니 아빠가 무슨 과일을 좋아하는지 잘 몰랐는데, 사소하지만 아빠가 좋아하는 과일을 알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내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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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도착해 체크인을 했다. 생각보다 방이 넓고 뷰가 좋아 내심 만족스럽다. 숙소에만 있기 아까우니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창 밖을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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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스하운은 너무나 맑고(?), 우리가 온 쪽은 너무나 흐렸다. 나중에 계속 언급하겠지만, 이게 페로의 기본 날씨다. 왼쪽은 맑고, 오른쪽은 흐리다. '날씨가 괜찮으려나?' 싶어 나가면 비가 오고, '아, 안 되겠다.' 하고 돌아오면 하늘이 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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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일단 지금 날씨가 절반 정도는 맑으니 토르스하운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가장 먼저 아빠랑 간 곳은, 내가 페로에 처음 왔을 때 묵었던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숙소, 'HOTEL FØROYAR' 근처였다. 여기선 토르스하운 시내를 한눈에 내려볼 수 있기도 하지만, 내가 여기서 묵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도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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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아빠는 무척 신나 보였다. 신나서 이리저리 사진과 영상을 찍는 아빠의 모습을 보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 토르스하운 시내를 걷는데, 희한한 복장을 입은 사람 4명이 고래고기를 들고 다니며 한입 해보라고 권한다. 근데 비주얼이 너무 별로고, 조리도 안 돼 보이는 깍둑썰기 된 참치 큐브처럼 생겨 혹시나 먹고 아플까 봐 먹진 않았다. 갈 식당을 딱히 정하고 나온 것은 아닌데, 아빠가 페로 오기 전에 사전 조사한 게 있는지 나한테 Katrina Christiansen이라는 식당을 가자고 했다. 시간이 오후 4시쯤이었는데, 문을 슬쩍 열고 들어가 보니 딱 봐도 예약이 필요한 식당 같아 식사가 가능한지 물어본다. 오후 6시부터는 예약이 있어, 2시간 후에는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데 괜찮냐고 물어본다. 그럼요, 우리는 한국인인걸요. 음식 준비는 2시간 해도, 식사는 15분이면 충분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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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판을 펼쳐보니 5코스와 7코스가 있는 식당이다. 아빠는 음식점에 가면 배부르게 먹어야 한다는 주의고, 페로에서 첫 식사를 제대로 해보고 싶기도 해 7코스를 주문한다. 어차피 5 아니면 7 코스만 가능해 메뉴를 제대로 보지도 않았는데, 구글 리뷰를 빠르게 훑어보니 랑구스틴을 시키길 잘했다는 글이 있다. 아이슬란드 호픈(Hofn)의 유명 식당 파쿠스(Pakkhus)의 그 쫄깃하고 고소하면서도 감칠맛이 줄줄 흐르는 그 랑구스틴!? 그건 못 참지. 그런데 1인만 추가 가능한지, 사람 수만큼 시켜야 하는 건지 헷갈려 직원에게 물어보니 '너무 배가 터지지 않을 것 같으면 둘 다 시켜도 된다'라고 하길래 기뻐하며 하나만 주문했다. 묘하게 질의의 핀트가 나갔지만, 어쨌든 원하는 결과는 얻었으니 됐잖아? 한 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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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나니, 음식이 나오기 시작한다. 첫 번째는 3 가지 음식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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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QUETTES WITH LIGHTLY SALTED COD

1번. 크로켓같이 생긴 이 요리는 '소금에 가볍게 절인 대구 크로켓'인데, 되게 고소하면서도 짭짤한 맛이 나 굉장히 맛있었다.


E302149A-91F0-4F9B-83D0-7224DE2BB1DB_1_105_c.jpeg SMOKED SALMON TARTARE

2번. 연어 타르타르는 딱 생각하는 그 맛이었는데, 크래커 같은 빵에 올려 함께 먹으니 산뜻한 소스와 싱싱한 연어 맛이 입안에 퍼져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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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FOOD SALAD

3번. 그다음으로 이 고추장 수프같이 생긴 게 해산물 샐러드(?)라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먹는 건지 감이 안 와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식전빵 같은 걸 갖다 줬다. 빵에 올려 먹으니 고소한 빵의 맛과 짭조름한 소스, 새우 같은 해산물이 톡톡 터지는 느낌이 나 이것도 굉장히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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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페로 랑구스틴, (우) 아이슬란드 랑구스틴

랑구스틴은 결과부터 말하자면 대실망이었다. 첫째, 수율이 너무 나빴다. 둘째, 랍스터 식감의 탱글탱글한 랑구스틴을 기대했는데, 페로의 그것은 너무 연해서 입에 넣으면 바스러지는 부드러운 식감이었다. 셋째, 먹기가 너무 힘들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이슬란드의 랑구스틴은 껍데기 쪽만 나와 크게 손댈 일이 없었는데, 페로의 랑구스틴은 집게 부분까지 전부 나와 그걸 일일이 까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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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온 두 번째 요리들.


5FC568CF-390D-4381-99B1-178AAF56A6D4_1_105_c.jpeg BRAISED LEG OF LAMB WITH FRIED POTATOES, LEEKS & ESPAGNOLE SAUCE

메인 요리인 '튀긴 감자, 대파, 에스파뇰 소스를 곁들인 찐 양고기 다리'. 견과류를 싫어하는 내 입장에선 잣인지 견과류인지 모를 저것만 없었어도 아주 훌륭했을 텐데.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소스와 양고기의 익힘 정도가 좋아 균형 잡힌 맛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가지 웃긴 건, 내가 양고기를 먹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흑백요리사에서 배운) 이븐하게 익었는지와 '양 누린내가 나는지'이다. 어느 식당에서는 죽을힘을 쒀서 잡아낸 양냄새겠지만, 내게는 그 냄새가 '내가 먹는 게 양고기다'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빠는 한 입 드셔보더니, '양 냄새가 안 나서 좋다'라고 한다. 나는 분명 은은한 양고기의 향을 맡았는데.


나는 편식이 꽤 심한 편이다. 양파는 한 번에 두 개도 먹을 수 있는데, 연근, 생오이, 생당근, 마늘쫑같은 건 씹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린다. 그중 내가 최악으로 치는 재료가 브로콜리, 셀러리, 아스파라거스인데, 컬리 플라워로 만든 음식이 나왔다.


75DE97C4-C1A7-4E14-9590-68FA06E3A15B_1_105_c.jpeg ASPARGUS SALAD WITH SHRIMPS & ORANGE

다음 메뉴는 아스파라거스와 새우입니다. 그런데 오렌지를 곁들인. 새우는 상큼한 오렌지와 어울려 정말 맛있었는데, 문제는 밑에 깔린 아스파라거스. '새로운 경험이니까 한번 먹어보자.' 했는데, 역시 그 아스파라거스의 향이 강하게 올라오며 속이 울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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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FRIED CAULIFLOWER WITH BROWNED BUTTER, JAMON HAM & PISTACHIOS

같이 나온 요리는 '태우듯 끓인 버터와 팬에 구운 컬리 플라워, 하몽, 피스타치오'였는데, 역시나 맛이 없다. 되게 돈 아깝다고 생각했음. 그저 나 같은 짧은 입맛에는 구운 고기나 생선이 최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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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COLATE BOWL WITH WHITE CHOCOLATE GANACHE, RHUBARB & WARM CARAMEL SAUCE / 커피 제외

마지막으로 문제의 이것, '루바브와 따뜻한 캐러멜 소스를 곁들인 화이트 초콜릿 가나슈'가 디저트로 나왔다. 처음엔 되게 맛있어 보이는 초콜릿이 나와 굉장히 기대했는데, 숟가락으로 한 입 뜨려고 갖다 댔더니 후드득 무너져 내리며 안에 처음 보는 재료들이 쏟아져 나온다. 무슨 맛인지 먹어나 보자 하고 한 숟가락 떴는데, 웬 김치 식감의 시큼한 게 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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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루바브'라는 야채였는데, 이 식감이 너무 강렬하고 초콜릿이랑 안 어울려서 초콜릿만 싹 긁어먹고 식사를 마쳤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 식감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고 몸서리가 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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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쳐갈 때 즈음, 직원이 커피나 차도 마실 거냐 물어보길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있는지 물어봤지만, 없다고 해 그럼 따뜻한 것으로 달라고 했다. 그런데 서버가 잠시 고민하더니, 한번 만들어봐도 괜찮겠냐고 한다. 맛있는 따아보단 맛없는 아아가 나으니까, 그저 고마웠지. 감사하게 커피를 마시고 계산을 했는데 거의 2만 원이 추가 청구됐다. 뭐지?라고 생각하던 찰나, 차/음료가 세트에 포함됐다고 착각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게 됐다. 커피의 씁쓸한 맛이 두 배로 강해지는 느낌이다. 맛이 두 배니까 반값, 실제로는 오천 원이라고 생각하며 되지도 않는 위로를 해본다.


이날 지불한 금액은 7코스 메뉴(645 DKK*2)+랑구스틴(235 DKK)+에스프레소(35 DKK)+카푸치노(49 DKK)로, 1,609 DKK. 총 32만원이었다. 아빠가 고른 식당이니 아버지께 감사를 표하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잘 먹었습니다, 아버지. (이래서 자식 키워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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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작년에 아내랑 간 식당에서는 카페라떼를 시키고 만 원이 찍힌 계산서를 받았는데, 아내는 그게 사기가 아닌지 엄청 의심했다고 한다. 메뉴판에 가격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한국에서 만 원짜리 커피는 어지간한 매장에서 찾기도 힘드니까. (그리고 어김없이 초콜릿 안에는 이상하고 달콤한 하얀 가루가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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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돌아와 짐을 정리하며 장비를 세팅하는데, 고프로 케이스를 집에 놓고 온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뭐 조심해서 쓰면 되는 거 아니냐 싶을 수 있는데, 이번에 고프로를 가져온 목적은 차 본넷에 석션컵을 부착하고, 고프로를 끼워 바깥을 녹화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걸 위해서는 석션컵과 고프로 본체를 이어주는 케이스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지금 몸통과 머리는 있는데 목이 없어서 몸과 머리를 통째로 못쓰게 된 상황이지. 거기다 배터리 충전기, 배터리 3개까지 쓸모가 없어져 짐이 된 것은 덤이고.


아, 비행기에서 'DJI 짐벌 부품을 놓고 온 게 아닌가?' 하는 찝찝함이 이거였구나. 너무 당황스러워서 구글에 '페로제도 고프로'를 검색했는데 마침 레딧에 누가 페로의 전자제품 매장 이름을 댓글로 적어놔서, 내일 오픈하고 가기로 했다. 다행히 시내가 작고, 숙소 바로 주변이라 조금 안심이 됐다.


숙소 내부가 조금 더워서 창문과 문틀 사이에 고프로 배터리를 고정해 놨는데(페로의 호텔은 비상시를 제외하고는 창문이 아주 조금만 열리게 되어있다.), 아빠가 그걸 못 보고 낑낑대며 닫으려고 해서 배터리가 터지는 걱정을 했다. 아빠는 뭐가 안되면 너무 힘으로 해결해보려고 한다. 고프로를 어떻게 써먹을까 하다가 타임랩스를 찍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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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프로를 설치하고 첫날의 긴장이 풀리고 너무 졸려서 오후 8시에 잤는데, 배터리에 관한 악몽을 꿨다. 미키네스에 투어에 참여해 전자제품 매장에 갔는데(실제로는 없음), 고프로 마운트를 구할 수가 없어서 좌절하는 꿈이었다. 중간에 자다 깨서 고프로로 찍던 타임랩스 때문에 배터리가 방전되어 비몽사몽 한 상태로 어둠 속에서 배터리를 갈았는데, 아뿔싸. 앞뒤를 거꾸로 넣어버렸다. 문제는 손가락으로 배터리를 뺄만한 힘을 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서 아무리 빼려고 해도 자꾸 미끄러졌다. 손톱을 깎은 게 너무 후회됐다. 10분간 씨름하다가, sd카드를 지렛대 삼아 들어 올리기에 성공하고 다시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렇게 페로에서의 첫 번째 밤이 진다.




페로 제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airspace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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