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흐리고 비
8일 차 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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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당연히 아침에 비가 오겠거니 하면서 일어났더니, 진짜 아직도 비가 오고 있다. 이젠 화도 안 난다. 비구름 속에서도 비가 오지 않는 구역이 보였는데, 내 희망의 크기인 것 같아 웃음이 났다. 한 가지 희망적인 건 가링비 수준이라는 거? 그래서 체크아웃을 하고 북부에 있는 빌링거달스피옐(Villingardalsfjall)에 갔다가 돌아와 점심을 먹은 뒤, 클락스비크의 다른 숙소에 체크인하기로 했다. 이번에 묵을 숙소는 작년에 아내와 함께 머문 곳인데, 대로변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고 창문과 나무 테이블이 있어 아늑한 분위기이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내가 길을 나서기 시작하자 기적같이 비가 그쳤다. 이때만 해도 '기적이 찾아오나?' 하며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터널 앞에 도착했다.
작년에 페로에 와서 이 신호등을 처음 봤을 때, 내가 맨 앞이고 뒤에 차가 줄지어 서기 시작해 '내가 교통 체계를 잘못 알고 있나?'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신호를 거의 15분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엔 20분 만에 신호가 바뀌어 지나갈 수 있었다.
이곳의 신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일단 페로의 산 터널 운전 자체가 쉽지 않다. 터널은 양방향 통행이지만 길은 차 한 대만 지나갈 정도로 도로는 좁은데 옆은 깎아 만든 듯한 돌벽이고, 터널을 밝히는 등도 없기 때문이다. 반대편에 차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답답하다고 신호를 무시하고 가다가 앞에 차라도 나온다면 대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물론 피할 공간은 있지만, 사고의 위험이 너무 높으니 절대 신호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자.
터널 밖을 나와보니 반대편에도 차가 많았고, 질서 정연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인상 깊다.
가다가 무지개가 있어 잠시 차를 세웠다. 거긴 우리 말고도 세 명의 여행자가 있었는데, 아빠는 그 사람들에게 무지개 좀 보라며 연신 말을 건넸다. 아빠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말을 잘 거는구나.
마을에 도착했는데 기가 막히게 앞유리가 젖기 시작한다. 게다가 하필 이때부터 배가 좀 아팠다. 여긴 식당도, 공중화장실도 없는 마을이라 차라리 안 올라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긴 한데,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지….'라고 생각하며 올라가 볼까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트레킹 코스 자체의 난이도만으로도 상당한 편인데 멀리서부터 비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 위험할 것 같아 올라가는 걸 포기한다. 가장 아쉬웠던 건 그 와중에도 저 멀리 보이는 한 줌의 파란 하늘이다. '저게 곧 이쪽으로 오진 않을까?'라는 기대로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진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아쉬움을 토로했더니, 아빠는 사람이 물러날 때도 알아야 한다면서 무지개를 본 것에 만족한다고 했다.
아까 온 길로 돌아가는데 다시 무지개가 보여 차를 멈췄다. 트레킹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강한 바람을 맞는 것도 재밌고, 아빠의 조언을 받아들여 무지개를 코 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 보기로 했다. 뒤에서는 강한 햇볕이, 앞에서는 비가 오길 기도하는 아이러니한 바람이다. 이 강한 바람은 거의 30분 간 이어져서, 아빠와 나는 원 없이 바람을 맞으며 무지개를 봤던 기억이 난다.
여담으로, 나는 페로에 오기 전까지 무지개가 어떤 조건에서 생성되는지 몰랐다. 그냥 비 오고, 해 뜨면 생기는 줄 알았지. 그러다 나무위키를 보고 알게 된 건데, 더 복잡한 원리가 있지만 간단히 얘기하자면 해를 등지고 섰을 때 내 앞 쪽에 비가 내리고 있으면 거기에 무지개가 뜨는 거라고 했다. 아, 아이슬란드의 스코가포스(Skogafoss)에서 봤던 무지개가 그래서 생기는 거였구나. 폭포를 보고 서있는데, 뒤쪽에서 햇볕이 비추니 생긴 거구나. 나는 비가 정말 싫은데, 그걸 알고 나니 페로 여행에서 ‘조금의’ 비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도 생겼다.
돌아오는 길에 점심으로 뭘 먹을지 생각해 봤는데 아빠는 어제 점심에 먹은 피시 앤 칩스를 또 먹고 싶다고 했다. 역시 맛있는 건 못 참지. 먼저 작년에 아내와 묵었던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시내가 보이는 창가, 아늑한 나무 테이블, 넓은 화장실, 밖이 보이는 창문까지 작년과 그대로구나.
짐을 풀고 음식을 주문하러 갔다. 오늘은 어제와 같은 닭다리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1/2 치킨 앤 칩스를 하나 더 주문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감자튀김까지 전부 사면 양이 너무 많아 치킨 반 마리만 살 수 있을지 생각하며 메뉴판을 봤는데, 치킨만 판다는 문구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치킨만 해줄 수 있냐'라고 물어봤더니 '그래'라고 하길래 120 DKK(약 2.4만 원)을 전부 받고, 감자만 빼주는 걸로 이해했나 보다 싶었지만 100 DKK(약 2만 원)이라고 하길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여담으로, 페로에는 유리병이나 페트병에 든 음료를 구매할 때 보증금을 내야 한다. 가격은 대략 500ml 페트병 구매 시 2 DKK, 1.5L는 4 DKK(약 8백 원)이고, 아무 마트에나 가져가서 반납하면 돈을 돌려준다. 완전한 페트병 상태를 유지해 반납시키려는 의도로 뚜껑이 병에서 분리되지 않는 형태로 만든 것 같다. 그러니까 누군가 페로에 갈 일이 있다면 억지로 저 뚜껑을 떼어내진 말자. 물론, 음료를 컵에 따를 때 뚜껑이 미끄러져 음료가 묻는 경우가 있어 불편하긴 하다.
식사를 마치고 뭘 할까 생각하다 근처의 작은 폭포 스바르티달루포스(Svartidalurfoss)에 가기로 한다. 그 폭포가 볼만하다기보다는 페로까지 갔는 데 있는 스팟을 안 보기는 좀 아쉽고, 그렇다고 각 잡고 가자니 기대치가 낮아 투자한 시간 대비 만족도가 아까운 마음이었는데 시간 보낼 게 생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짧은 시간을 달려 도착한 그곳엔 우리뿐이었고, 작은 폭포이지만 아빠는 역시 좋아했다.
나온 김에 쿠노이(Kunoy) 섬의 맨 끝 마을에 지도를 찍고 가보았다. 도착해 차에 내리니 딱히 뷰포인트는 없었고, 다행히도 안개가 옅어 주변 섬의 대략적 윤곽이 보였다. 페로나 아이슬란드 같은 곳의 매력은 굳이 뷰포인트가 아니더라도, 내가 가는 곳이 뷰포인트가 되는 마법 같은 일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배가 불러 오늘 저녁은 안 먹기로 하고, 아빠는 올라가 잠을 잤다. 나는 뭘 할까 하다가 내일 식사로 먹기로 한 짜글이 재료를 준비하기로 했다. 마트에서 산 냉동 통삼겹을 꺼냈다. 1/3은 짜글이 재료로, 나머지는 모레 먹어야지. 페로의 삼겹살은 껍데기가 붙어있는 상태로 팔려서 좋다. 아, 그럼 오겹살이라고 해야 하나...? 오븐을 잘 쓸 줄 알았다면 심부까지 익히고 겉만 바삭하게 튀겼을 텐데, 오븐을 쓸 줄 모르니 나의 주 무기는 여전히 프라이팬이다. 버섯, 파, 양파 등도 썰어 냉장고에 넣었다. 한 시간 동안 재료를 준비하면서 '내일 아침 아빠가 이걸 보면 좋아하겠지?'라는 생각에 싱글벙글했던 것 같다. 옛날부터 느꼈지만, 나는 어떤 것을 꼼꼼하게 준비해 정성 들여 준비하고, 그게 잘 되어 사람을 뿌듯하게 만들 때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 적성에 맞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찾을 날이 올까?)
밤이 깊어질수록 빗줄기가 굵어지고 바람이 강해지는 걸 보니, 내일 날씨도 전망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페로에서의 여덟 번째 밤이 진다.
페로 제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