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4 흐리고 비
7일 차 동선
[식당] Fish & Chips Klaksvik
아침과 함께 왼쪽 눈 뒤편에 통증이 찾아왔다. 한국에서 경추성 두통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느낀 것과 동일한 증상이다. 가끔 좀 더 자면 통증이 해결되는 경우가 있어 다시 눈을 붙였는데, 11시까지 한참을 더 아파 걱정이 됐다. 타이레놀, 애드빌, 알모그란(편두통) 약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통증이기 때문이다. 한 달 전쯤 한국에서 다 나아서 온 줄 알았는데, 최근 좀 피곤하더니 무리하면서 다시 생겼나 보다. 여하튼, 오늘도 날씨가 흐리고 여전히 비가 와 뭘 하긴 어려울 것 같다.
TMI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서울-파리 13시간 비행 후 착륙까지 13분 남은 시점이었다. 거의 기절할 것 같은 통증 속에서도 기록해 놓은 게 있는데, 비행기 하강 시 왼쪽 눈~코 안쪽 뒷부분이 바늘로 쑤시고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통증이 점점 심해져 비명을 지르기 직전이었다. 작년에 두 번째 비염 수술을 했는데 다시 부비동에 농이 차서 그런가? 싶어 코를 막고 숨을 불어넣어 보았는데 효과는 없었다.(그게 치료법이라기보단, 생각나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이때 고도는 대충 1,500m~2,000m 사이였던 것 같다. 왼쪽 눈 뒤가 가장 아팠고 치아까지 시린 느낌이었는데 착륙이 끝나니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통증의 잔상이라고 해야 할까? 코 뒤에서 시림이 계속 느껴졌다.
아빠는 내가 자는 동안 또 혼자 마을 구경을 다녀왔다고 했다. 아빠의 산책은 두 시간 정도 걸렸는데, 숙소 위치를 몰라 길을 잃을 뻔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며 아빠한테는 그냥 따라오라고 해 아빠는 숙소 주소도 모른다. 구글 맵 사용법을 알려 드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점심을 사러 가러 문을 열다가 집주인을 만났는데 날씨가 안 좋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페로인의 눈에도 오늘 날씨가 안 좋긴 한 모양이다. 만난 김에 화장실에 수건을 하나 더 달라고 했는데, 까먹은 건지 저녁이 될 때까지 수건을 주지 않았다. 처음 인사할 때 영어를 잘 못 한다는 느낌을 조금 받았는데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다.
오늘 일정은 그냥 휴식이다. 그래서 식사를 뭘 할지만 고민하면 됐는데, 아빠가 저녁으로는 김치볶음밥을 해 먹자고 해서 마트에 가기로 했다. 어느 마트에 갈까 하다가 클락스비크에 일주일 이상 머물 예정이니 작년에 한 마트에서 냉동 삼겹살을 샀던 게 기억이 나서 그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나간 김에 자자공인 클락스비크 최고의 맛집, '피시 앤 칩스 푸드트럭'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마트에 갔다 삼겹살이 없어 그냥 나오고, 50m 거리의 피시앤칩스 가게로 이동해 식사를 주문했다. 주문한 메뉴는 1/2 치킨 앤 칩스, 피시앤칩스(M)다. 주문 번호를 받고 나서 대기시간이 좀 필요해 나는 차에서 기다리자고 했는데, 아빠는 현지의 뭔가를 더 느끼고 싶은 건지 천막에서 기다리자고 했다. 대충 보니 안에 테이블이 깨끗할 것 같진 않아 얘기한 건데, 이걸 다 설명하기도 뭐해서 번호표를 받고 테이블로 이동했다.
아빠가 앉은 테이블에 굳은 새똥이 있었는데, 아빠는 그걸 못 봤는지 말할 새도 없이 팔을 올렸다. 내가 새똥이 있다고 얘기하니 아빠는 화들짝 놀라며 ‘여기도 새가 들어오냐’고 했다. 아마 천막이 쳐져 있어 평소에도 이런 모양인 줄 아신 것 같다. 해가 좋은 날에는 천막을 치지 않는 걸 테지. 차로 가고 싶다... 여하튼 앉아있으니 주인이 음식을 가져다줘 숙소로 돌아왔다.
포장해 오는데 차 안에 냄새가 바로 가득 차버려 참기가 힘들었다. 이곳의 백미는 바삭한 튀김도 튀김이지만, 저 두꺼우면서도 바삭하고 부드럽게 익은 감튀다. 짭조름하게 튀겨진 감튀에 달달한 레물라드 소스를 찍어먹으면, 지금까지 케첩에 찍어먹던 세월이 아까운 것이지. 식사를 시작하는데 1/2마리인 통닭에서 아빠가 먼저 닭다리를 뜯어가 동공지진이 일어났지만 내가 어릴 땐 아빠가 나한테 닭다리를 줬을 테니, 이젠 나도 드려야겠지. 아빠는 감튀가 두꺼워서 맛있다고 했다. 다 먹고 나니 졸음이 쏟아져 한숨 또 잤다.
자고 일어나 보니 아빠는 아직 자고 있길래 뭘 할까 하다가, 이번 여행은 아빠도 편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 저녁에 할 볶음밥 재료를 손질해 놓았다. 버섯을 썰다 보니 아까보다 더 거센 빗줄기와 바람이 찾아왔다. 그런데 여행기를 쓰면서 영상을 GIF로 변환해 올리고 나니 '칼을 원래 저렇게 쥐는 건가?' 싶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잘못된 방법이라고 한다 -.-
재료 손질을 끝내고 나니 아빠가 일어났는데 식사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아 믹스커피를 한잔 타드렸다. 아빠는 나를 도와주려고 식량 가방에서 소고기 고추장과 고추참치를 꺼냈다. 나는 그걸 보면서 '둘 중 하나만 넣지...'라고 생각했다. 불현듯 19년인가? 20년에 아이슬란드에 갔을 때 내 생일에 아빠가 끓여준 미역국이 생각난다. 그때 아빠는 라면에 오뚜기 미역국을 넣어 끌였다. 어떻게 하면 이런 맛이 나올까 싶지만 정성으로 먹었다. 이처럼 아빠는 종종 요리를 할 때 있는 거의 모든 재료를 막 넣고 비비거나 끓이거나 볶아버리는 습관이 있다. 예를 들면 전(!?)+파+버섯+새우+양파+고춧가루+김치를 넣은 라면이라든지… 그게 강화된 게 틀림없었다.
여하튼, 성인 남자 두 명이니 햇반을 3개 깠다. 그리고 나는 그냥 접시에 밥을 덜려고 했는데, 아빠는 볶음밥을 밥공기에 담아 뒤집어 중국집에서 나오는 볶음밥처럼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주었다. 이건 생각 못했는데, 내 볶음밥 스킬에 추가해야지. 계란 프라이는 내가 했는데, 아빠는 너무 익힌 계란은 싫다고 했다. 취향 파악 +1 완료. 남자 둘이서 햇반 3개 충분히 먹을 줄 알았는데 정작 둘 다 한 공기씩밖에 못 먹어서 1/3은 남기고 아침에 먹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는 나는 캡슐커피를, 아빠한테는 믹스커피를 타드리려고 아빠한테 ‘믹스커피 마실래?’라고 했는데, 아빠가 아까 마시던 믹스커피 잔에 ‘커피 남았을 걸?‘고 해서 ‘내가 없을 걸?’ 이랬는데 아빠가 계속 있다고 해서 가봤더니 빈 컵이었다. 아빠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방금 다 드신 것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시나?‘싶어서 좀 안타까웠다.
그렇게 페로에서의 일곱 번째 밤이 진다.
페로 제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