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 맑고 흐림
6일 차 동선
[숙소] Gjogv 체크아웃 > [뷰포인트] 후닝구르(Funningur) > [트레킹] Klakkur > [점심] Firoa Kaffihus > Gjogv > [마트] Bonus > 숙소 체크인 > 동네 산책
요즘 새벽같이 눈이 떠진다. 아침에 잠깐 일어나 밖을 나가보니 적막 속 여전히 날씨는 흐리다. 일어나 씻고 조식을 먹으러 간다.
식당에 들어가려는데, 아빠가 문 앞에 멀뚱멀뚱 서 있다. 전날 저녁을 먹은 식당과 같은 장소였는데, 아마 저녁 식사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고 들여보내는 시스템이라 아빠가 또 들어가도 되는지 헷갈렸던 것 같다. 들어갔는데 캐나다에서 온 부부가 어제와 똑같은 창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어 웃음이 났다. 식사를 하며 아빠는 이 동네는 참으로 깨끗하다고 얘기하면서 전날 찍은 페로의 집 지붕 사진을 보여줬다. 이곳은 지붕에 잔디를 심어놓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그냥 풀을 심은 게 아니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고정 장치를 해두었다는 걸 알게 됐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아빠가 여기와 레퍼런스를 얻어간 것 같아 다행이다.
아까 나올 때 비가 좀 올 것 같아 도보 3분 거리 식당까지 차를 갖고 가자고 아빠한테 얘기했는데, 좀 걷다 보니 되니 비가 너무 많이 와 아빠한테 '내 말대로 했으면 좋았을 걸'이라면서 투정을 부렸었다. 가끔 계획대로 안 되면 이럴 때가 있는데, 그 말을 하자마자 후회가 돼서 사과하려다가 아빠는 신경도 안 쓸 것 같은데 내가 왜 사과하는지 설명하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아 '다음엔 이러지 말아야지'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결국 밥을 먹다 비가 더 많이 올 것 같아 식사를 멈추고 나만 숙소로 가서 차를 가져왔는데, 밥을 먹고 나오니 때마침 비가 그쳐서 머쓱했다.
체크아웃을 하러 리셉션에 갔는데 8시부터 18시까지 운영된다는 종이가 붙어있었는데, 현재 시간은 8시 반이지만 아무도 없고 체크아웃을 위한 키박스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아빠가 어떻게 체크아웃을 해야 하는지 궁금한 표정이길래 저기에 키 박스를 놓고 가면 되는 거라고 알려드렸다.
아직은 날씨가 흐리지만, 곧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노르웨이 기상청을 한번 믿어보자! 회색이지만 여전히 페로는 멋있다. 교그브를 떠나는 길에 너무 멋진 뷰포인트가 있어 내려서 영상을 찍었다.
저 멀리 파란 구름이 보이는 걸 보니, 오늘 날씨가 괜찮을 것 같다. 아빠는 계속 저기가 우리가 가는 곳인지, 위로 올라가는지, 어제 여기를 왔는지 안 왔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런데 난 페로의 지명이 너무 어렵고, 생긴 게 비슷해 설명을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공식적인 한국어 표기가 없어 읽는 사람이 정답인 그런 상황이라...
어쨌든, 오늘의 첫 목적지인 후닝구르(Funinngur) 마을을 볼 수 있는 뷰포인트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날이 개서 온전한 모습의 후닝구르를 볼 수 있었다.
클락스비크로 목적지를 정하고 이동하는데, 몰랐던 뷰포인트가 있길래 잠시 가보기로 한다.
트레킹 코스도 아니고 그냥 돌길이라 걷기가 무척 편했고, 무엇보다 뷰와 날씨가 좋아 아빠가 신난 게 보여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여행기를 쓰는 지금 지도를 보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인데, 'Støðlafjall'이라는 3km 정도 되는 트레킹 코스가 있었다. 알았다면 올라가 봤을 텐데, 지금 와서 보니 너무 아쉽다. 알고 안 간 거랑, 몰라서 못 간 건 천지차이니까. 리뷰가 하나도 없는 지점이라 못 찾은 것 같은데, 다음엔 꼭 가봐야지.
11시 반쯤 클락스비크에 도착했는데 예보와 달리 날씨가 너무 좋았다. 아직 배는 안 고프고, 체크인까지 네 시간은 남았으니 작년에 아내와 왔던 클라쿠르(Klakkur)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작년에 아내와 함께 왔을 땐 안개가 자욱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여기 이런 곳이었구나... 여하튼 트레킹 초입으로 가는 동안 등산화를 안 신고 온 걸 깜빡했는데, 날도 좋으니 그냥 가기로 했다. 그리고 이는 엄청난 후회를 불러왔다.
계속 걷다 보니 아빠는 저 앞에 있다. 작년에 아내와 함께 왔을 때도 그렇고, 주위를 보니 같이 온 사람도 걸을 땐 따로 걸어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함께 여행을 왔어도 각자만의 페이스대로 움직이는 게 필요한 거겠지.
정상이 가까워 보이는데, 걸어도 걸어도 끝이 안 난다. 게다가 운동화를 신고 올라왔는데 어제 온 비 때문에 군데군데 진흙 웅덩이가 많아 걷기가 꽤 힘들었다. 점점 아빠랑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고 따로 다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다.
잠시 경치에 감탄하는 시간을 갖고, 하산해 밥을 먹기로 한다. 내려가는 길에 날씨가 또 흐려지며 페로의 본모습을 보여준다.
점심을 먹으러 클락스비크의 인포 센터에 위치한 식당 'Fríða Kaffihús'로 들어갔다. 작년에 왔을 때 있었던 알바가 있어 내심 반가웠다. 아빠는 햄버거, 나는 생선 수프와 양고기 소시지빵을 시켰다. 생선수프는 대구가 크게 두 덩이 반 정도 들어가 있었는데 대구가 정말 쫄깃하고 맛있었다. 나는 당근을 싫어하지만, 당근들이 채 썰려 들어가 있었는데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고, 국물에선 깊은 맛이 났다.
식사를 하다가 페로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이전 숙소였다. '무슨 일이지? 돈을 덜 냈나?' 싶어 전화를 받아보니, 거기서 내가 청바지와 셔츠 등을 놓고 갔다고 한다. 근데 난 놓고 온 짐이 없는데? 혹시나 싶어 아빠한테 물어봤더니 아빠가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옷장 속에!'라고 했다. 아빠는 엄청 자책하는 듯이 보였고, 나는 아빠를 위로해 주기 위해 '교고브 드라이브하기 좋은데 한번 더 갈 수 있어서 오히려 좋다'라고 했다. 아빠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며 연신 미안해했다. (근데 진짜 좋았던 건 함정)
클락스비크로 진입하는 해저터널에는 페로의 국기를 상징하는 빨강, 파랑, 흰색 조명이 있다. 아빠는 이게 신기했는지 사진을 찍으려는데, 그때마다 차가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 계속 사진을 찍지 못했다. 교고브에 도착해 옷을 픽업하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아빠한테 해당 조명이 나오는 구간을 미리 알려주고 사진 대신 동영상으로 찍으는 조언을 해드린 덕분에 아빠는 드디어 원하는 것을 찍을 수 있었다. 이렇게 또 아빠의 작은 기쁨에 보탬이 되다니 기쁘구만?
보너스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를 샀다. 고기 코너를 갔는데 새우살이 붙은 등심이 두 덩어리에 177 DKK, 3만 5천 원이었다. 한국에선 비싸서 못 사 먹는데 이 정도면 진짜 싼 편이지. 아마 비슷한 무게의 살치살이 저 정도 하려나? 그리고 버섯과 마늘을 구매했다. 그동안 아빠는 과일을 고르다가 사과를 한알 떨어뜨렸는데, 그게 박스 밑으로 들어가 아빠가 꺼내질 못했다. 결국 내가 꺼내드렸는데 이때 감정이 참 복잡 미묘했다. 아빠가 사과도 잘 못 꺼내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조금 슬펐고, 나 없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할까 봐 걱정이 됐다. '어렸을 적 아빠는 슈퍼맨이었는데 이제 크고 나니 ~~~ 어쩌고 하는 그런 얘기가 잠시 생각났다. 여하튼 그다음엔 과자를 보고 있었는데, 아빠가 말하지도 않은 내가 먹는 과자를 갖고 와선 '넌 이거 먹지?'라고 하길래 감사한 생각이 든다.
클락스비크의 첫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원래 묵고 싶은 숙소가 있었지만, 날짜가 맞지 않아 잡은 숙소였다. 새로 생긴 숙소라 반신반의하며 잡았지만, 생각보다 컨디션은 괜찮았다. 그런데 사실상 반지하 같은 집이라, 뷰를 볼 창문이 작은 게 아쉬웠다.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커피머신과 무료 캡슐이 있어 지내는 내내 아주 잘 이용했다. 또, 여기도 넷플릭스를 볼 수 있는 스마트 TV가 있어 다시 로그인해 드렸다.
세탁실에 들어갔는데 2층으로 연결되는 나무 계단이 있고, 마감이 덜 된(?) 콘크리트 공간 같은 게 있고 작업복이 널려있었다. 아무래도 집주인과 같이 쓰는 공간 같다. 세탁기를 쓰려고 했는데, 번역기를 써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감으로 했다. 아빠가 산책 나간다길래 같이 나갔고, 20분가량 산책을 하고 들어왔다.
들어와 저녁을 준비했는데 주방에 식용유처럼 생긴 것이 있어, 혹시 세제일까 봐 무서워서 식용유가 맞는지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페로 지역 뉴스에 외국인이 세제로 고기를 구워 먹고 복통으로 입원했다는 기사가 나는 걸 상상했다.
인덕션 쓰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일단 구는 4갠데 조정하는 버튼이 뭔지 모르겠고, 온도를 조절하는데 0.5 단위로 올라가서 조작이 너무 많이 필요했다. 여차저차해서 사용법을 깨닫고 고기를 올렸는데, 심부온도를 탐지하는 온도계가 있어서 처음 써봤다. 그런데 아무리 구워도 50도 이상으로 안 올라가길래, 내 감이 틀렸겠지 하면서 계속 굽다가 너무 이상해서 그만뒀는데, 웰던 중의 웰던이 되어버렸다. 이 맛있는 고기를 웰던이라니... 그리고 페로의 에어비앤비에는 집게가 없어서 뒤집개로 고기를 뒤집었는데, 마치 스테이크 전을 부치는 것 같았다. 나중엔 뒤집개도 자꾸 미끄러져서 나이프 두 개로 고기를 구웠다.
근데 아빠는 웰던이 더 좋다고 했다. 마늘도 엄청 맛있게 됐고. 아빠가 맛있다니 만족이지 뭐. 햇반도 돌렸는데, 아빠는 고기를 다 먹고 나서 고추장과 김을 따로 싸서 먹었다. 근데 굽는 동안 기름이 엄청 튀어 얼마 남지 않은 키친타월을 다 써버렸는데, 아빠가 이거 새로 사놔야 하는 거냐고 물어 웃으며 아니라고 얘기해 줬다.
아빠가 믹스커피를 한잔 하면 좋을 것 같아 물어봤는데 흔쾌히 필요하다고 하셨다. 아빠가 좋아하는 고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 시간이었다. 그리고는 피곤하셨는지 바로 잠이 드셨다. 나도 자려고 했는데, 세탁실 쪽에서 사람이 계속 한 시간 정도 왔다 갔다 하는 워커 발자국 소리가 들려와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하고 과자를 까먹으며 넷플릭스를 봤다.
그렇게 페로에서의 여섯 번째 밤이 진다.
페로 제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