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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아빠, 30대 아들의 페로제도 여행 21밤 9

8/16 흐리고 비

by 페로 제도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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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쯤인가 잠결에 눈이 잠깐 떠졌는데 아래층에서 요리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너무 졸려 좀 더 자고 12시 가까이 돼서야 일어났다. 역시나 오늘의 날씨도 비. 이젠 맑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은 페로다. 오늘은 정해진 일정도 없는데, 앞으로를 위한 휴식이라고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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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층으로 내려가 보니 아빠가 이미 짜글이를 끓여 놓았다. 그러면서 돼지 잡내가 조금 난다고도 하고, 볶음김치를 넣을까 했지만 그걸 더 넣는다고 잡히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끓였다고 했다. 근데 생각보다 되게 맛있어서 정신없이 햇반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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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을 보니 빗줄기가 더 거세졌다. 오늘은 뭘 할까 하다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아 산책 겸 마을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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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클락스비크 교회에 가보려고 했는데, 오늘은 열지 않는 날이라 내일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 다음으론 그릇가게에 들러 엄마랑 아내 선물을 뭐 살지 고민했다. 근데 잘 모르겠어서 엄마한테 물어보자고 했지만 아빠는 '그럼 엄마는 사오지 말라고 할 걸?'이라고 해서 가게를 둘러봤는데 이쁜 컵이 몇 개 보여서 살까 하다, 아직 떠날 날이 멀었으니 토르스하운에 가서 사기로 하고 가게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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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구경할 게 없어 모레 칼소이갈때 먹을 과자를 사러 마트에 들어갔다. 나는 아빠가 먹는 과자를, 아빠는 내가 먹는 과자를 가지고 왔는데 아빠가 그걸 보더니 '이젠 서로 먹는 과자가 정해져 있다.'면서 좋아한다. 집에 돌아와 아빠가 넷플릭스를 켜길래 잠시 바람좀 쐬고 오겠다고 하고 혼자 나갔다. 어제 고프로 배터리가 전부 떨어져 찍고 싶은 영상이 있기도 했고, 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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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찍고 싶던 길은 이거였다. 양방향 통행이지만 빠져나갈 곳도 없어 실수할 까봐 압박감이 느껴지는데 또 돌 높이는 그렇게 낮지도 않아서 옆으로 빠질 것 같다는 생각은 추호도 안 들게 해주는 이 안정감. 압박과 안정이 공존하는데 어제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포근한 느낌이 들었어. 가드레일을 설치 안 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보통 이런 건 돈 때문인데, 과연 페로에서도 그럴까? 아니라면 환경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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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돌려 나오려는데 앞에 댕댕이가 있다. 내려서 잠시 같이 놀고 싶었으나 남의 집 개이기도 해서 실례인지 아닌지 모르겠고, 경계인지 반가움인지도 모르겠어 그냥 떠나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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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내려볼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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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근처에 다 와가는데 웬 군함이 항구에서 물대포를 쏘고 있길래 '워터밤같은 건가?'라고 생각하면서 잠시 차를 대고 멀끄러미 쳐다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진짜 축제였다. 물을 뿌릴 수 있는 모든 게 전부 온 것 같은데 소방차, 어선, 군함(구조용인 것 같다)같은 게 있다. 아이들은 물총을 들고 있고, 어른도 있다. 배가 뿌리는 물은 못 참지.


숙소에 돌아와 에어비앤비 호스트 Jakup(야콥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한테 문자를 보내 쓰레기 비우는 법을 물어봤는데, 밖에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 문을 열어보니 문 앞까지 와있었다. 왜 직접 왔는진 모르겠지만 여튼 분리수거 방법을 설명해주면서 '내일 여기에 도넛, 커피같은 게 하루 종일 무료이며 싱싱한 생선들을 맛볼 수 있는 수천 명 규모의 축제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줬다. 아무래도 아까 군함이 물을 뿌리고 있던 게 축제의 일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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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다 저녁으로 먹을 삼겹살을 준비하는데 쓰려고 꺼내 놓은 프라이팬이 없어져서 '내가 착각했나?'라고 생각하고 작은 팬을 썼는데, 아빠가 큰 거 필요하지 않냐면서 내가 찾던 팬을 꺼내줬다. 그게 왜 거기서 나와...? 아마 아빠는 내가 꺼내놓은 것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아빠는 집에서도 물건이 보이면 치우는 버릇이 있어 엄마가 엄청 뭐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을지 생각이 났다. 그런데 나도 집에선 아내 물건 치워서 엄청 혼나긴 한다. 이게 부전자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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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비앤비에 누군가 남겨두고 간 쌀이 있어 냄비밥도 함께 했다. 여담으로 한국에서 주로 먹는 쌀인 자포니카처럼 통통하고 찰기있는 품종을 먹고 싶다면 이게 제일 비슷한 것 같다. 계피향이 난다고 써있는데, 계피를 싫어하고 입맛이 까다로운 내 입장에서는 그 향이 느껴지진 않았다. 밥 먹는 장면을 기록하려고 삼각대와 카메라를 놓고 밥을 먹었는데, 밥 다 먹고 나서야 촬영 버튼을 안 누른 걸 알아 현타가 잠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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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으면서 '앞으로 나 잘할 수 있겠지?'라고 물어봤고 아빠는 진인사대천명을 얘기하면서 한우물을 파야된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감동의 식사가 끝나 뒷정리를 하는데 아빠가 또 그릇을 기름 묻은 프라이팬에 넣어버려서 내가 또 잔소리를 했다. 아빠는 설거지할 때 항상 그릇을 푹 담그는 습관이 있는데, 그게 설거지거리를 늘린다고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항상 얘기하는데 쉽게 바뀌기 어려운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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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자러 갔고, 나는 1층에서 혼자 TV를 보고 있는데 축제 기간이라 그런지 자정이 넘어까지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애들 셋이서 오토바이를 타는 소리가 들렸다. 그... 택트라고 하나? 2천년대 초중반 동네에서 조금 노는데 돈이 있는 친구라면 엑시브, 없다면 택트였는데 택트같은 소리가 나는 걸 몇 시간 째 타고 있다. 아이패드로 찍으려고 했는데 나랑 눈이 마주친 것 같아 황급히 다른 걸 하는 척을 했다. 돌을 던져 창이 깨지는 상상을 했고 괜히 나가서 문 잠겨있나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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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다행이라면 하루 종일 집에 있을 뻔했는데, 축제 구경이라도 하러 갈 수 있다는 거? 축제 같은 걸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무 할 것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라고 생각하며 침실로 올라갔다.


그렇게 페로의 아홉 번째 밤이 진다.




페로 제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airspace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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