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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새벽

용역 사무실

by 남지만 작가


새벽 네 시.
고시원 벽시계의 초침이 마치 얼음 위를 걷는 듯한 소리를 내며 시간을 깎아내고 있었다.
좁은 복도 끝, 공동 부엌의 형광등이 힘없이 흔들렸다.
나는 허리 굽은 커피포트를 켜고, 낡은 냄비에 물을 올렸다.
라면을 끓이며 김치 몇 조각을 꺼냈다.
김이 피어오르는 냄비 속을 들여다보던 순간,
이 새벽만큼은 어쩐지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오늘은 꼭 불러줬으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뜨거운 국물을 한입 삼켰다.
속은 잠시 따뜻해졌지만, 마음 한편은 여전히 싸늘했다.
용역 사무실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네 시 사십 분이었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각, 사무실 앞은 이미 사람들로 빽빽했다.
이른 새벽 공기를 뚫고 피어난 담배 연기가 희미하게 흩어졌다.
대기실 안에는 싸구려 커피 향과 눅눅한 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모두가 침묵 속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소장이 등장하자,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한두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이름이 불린 이들은 작은 승리를 얻은 듯, 말없이 짐을 들고 문을 통과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문이 닫힐 때마다 고개를 떨구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침이 마르기 시작했다.
시계는 일곱 시를 가리켰지만, 내 이름은 끝내 불리지 않았다.
새로 온 사람이라, 얼굴도 익히지 못한 소장의 눈에 띄기란 애초에 어려웠다.
나보다 먼저 온 이들, 오래 일한 이들, 기술 있는 이들에게 기회는 당연하다는 듯 돌아갔다.
여덟 시가 다 되어서야 마지막 다섯 명이 불렸다.
그중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소장이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사람들이 의자를 밀고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섰다.
남은 네 명의 얼굴에는 실망보다는, 익숙한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기대보다 포기가 더 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밖으로 나서자, 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손끝이 시렸다.
출출한 속을 달래려 근처 순댓국집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허기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왔어요?”
낯익은 얼굴이 나를 보며 웃었다.
용역 사무실에서 내 옆에 앉아 있던 김 씨 아저씨였다.
그 역시 오늘 일을 받지 못했는데 집에 간 줄 알았다.
우리는 말없이 마주 앉았다.
순댓국 두 그릇, 그리고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처음엔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한참 뒤, 김 씨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나, 오늘까지 사흘째 일 못했어요. 근데 내일은 꼭 나가야 돼요. 아내가 병원비 기다리거든.”
그 말이 유난히 오래 남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가 잔을 채우고, 또 비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서로의 지난날을 조금씩 꺼내놓았다.
누군가는 공장에서, 누군가는 건설 현장에서,
모두가 한때는 ‘일이 넘쳐났던 시절’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는 허탈했지만, 그 안에 안도감이 도사렸다.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더라도,
이렇게라도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이 왠지 사람답게 느껴졌다.
술병이 열 개쯤 쌓였을 무렵,
김 씨 형님은 조용히 읊조렸다.
“이게 다 지나가면, 우리한테도 봄이 오겠지?”
나는 대답 대신 웃었다.
그 웃음엔 아무런 확신도 담겨 있지 않았다.
식당을 나서며 계산하니 지갑엔 이만 원이 남아 있었다.
형님은 술기운에 비틀거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일은 꼭 나갈 거야. 그럴 거야.”
그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며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혼자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쌀쌀한 날씨지만 하늘은 화창했다.
이불 위에 앉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술값만 아꼈어도 오늘 하루를 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내일도 일 못하면 어쩌지.’
그러나 문득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공사장 크레인 위로 희미한 햇살이 번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모습도 보였다.
아주 잠깐, 그 빛이 내 방 한쪽을 비추었다.
나는 이불을 덮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래, 내일은 다를 수도 있겠지.’
그 희미한 믿음 하나로, 만취된 몸이 수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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