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義)의 증명
요즘 큰 홍역을 치러서인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바닥까지 내려와 보니, 더 이상 후회도 원망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비워낸 마음 덕분이었을까.
다른 신용정보사 팀장들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한 것이 변화의 신호탄이 되었다.
사실 여기 지점장은 그렇다 치고, 팀장은 보면 볼수록 마음이 끌리는 분이었다.
처음에는 이 분야에 경험이 전혀 없어 어떻게 같이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는 모습이 있었다.
본인도 계속 배우고 있는 입장이면서도,
우리가 요청하는 일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늘 성심성의껏 도와주는 자세였다.
사람이 많이 알면 좋겠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우리를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이다.
사실 팀장 경험이 없으면, 많이 불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사람의 진실성은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심했다.
지금 이 자리가 아직은 자리가 잡히지 않아 당장의 수익은 적을지 몰라도, 열정을 다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팀장을 믿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에, 다른 곳에서 어떤 제안이 와도 일단 눈길을 돌리지 않기로 했다.
문득 삼국지에 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 대목이 생각났다.
젊은 시절 삼국지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순간 책을 덮고, 앞으로 나에게도 이런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왈각 쏟은 적이 있었다.
허창의 밤은 지나치게 달콤했다.
조조가 하사한 저택의 안마당에는 촉촉한 달빛이 내렸고, 방 안에는 최고급 향료의 냄새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관우는 무릎 위에 놓인 청룡언월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차가운 강철의 촉감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조조는 매일같이 그를 찾아왔다.
“운장, 이 비단옷을 보게.
자네의 당당한 풍채에 이보다 어울리는 것이 있겠나?
유비는 지금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이를 위해 왜 이 찬란한 봄날을 허비하려 하는가.”
관우는 묵묵히 술잔을 비웠다.
속으로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물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는가.
조공(조조)의 은혜는 바다와 같으나, 내 심장은 왜 이 화려한 도포 속에서 숨이 막혀오는가.'
그는 조조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독백하듯 답했다.
“승상, 새는 아무리 화려한 황금장이라 해도 숲을 그리워하는 법입니다.
제게 유현덕이라는 숲은 목숨을 바꿔서라도 돌아가야 할 고향입니다.
그곳이 설령 삭풍이 부는 벌판일지라도 말입니다.”
조조는 탄식하며 돌아섰고, 관우는 그날 밤 적토마의 갈기를 쓸어내리며 결심했다.
'형님, 기다리십시오.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곁으로 가겠습니다.'
이튿날, 관우는 조조의 장수들이 지키는 첫 번째 관문, 동령관에 다다랐다.
수비장 장희는 철갑을 두른 채 창을 비껴 들고 군사들을 호령하고 있었다.
"멈춰라, 관운장! 승상의 수결이 없는 자는 이 문을 넘지 못한다.
네놈의 목을 베어 공을 세우라는 하늘의 계시로구나!”
장희가 기합과 함께 말옆구리를 걷어차며 달려왔다.
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시야 속에서 세상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장희의 창끝이 공기를 가르며 파고드는 진동, 말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흩날리는 흙먼지까지 세세하게 박혔다.
'형님께 가는 길을 막는 자, 그 누구든 베겠다.
이것이 나의 의(義)다.'
관우는 적토마의 고삐를 낚아채며 몸을 옆으로 살짝 비틀었다.
창끝이 가슴팍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 지나간 순간, 바닥을 향해 있던 청룡언월도가 역방향으로 솟구쳤다.
82근의 무게가 실린 칼날이 허공에 거대한 푸른 궤적을 그렸다.
"크악!"
비명은 짧았다.
청룡언월도의 서슬 퍼런 칼날은 장희의 갑옷 이음새를 정확히 파고들어 어깨부터 명치까지 사선으로 갈라버렸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선혈이 관우의 붉은 수염에 튀었으나,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길을 비켜라.
내 칼은 아직 배고프다.”
그의 서늘한 목소리에 겁에 질린 군사들이 홍해 갈라지듯 길을 터주었다.
낙양을 지나 기주로 향하는 길은 시체의 산이었다.
관문을 거듭할수록 조조의 장수들은 더욱 악랄하게 그를 몰아세웠다.
어떤 이는 매복을 했고, 어떤 이는 독이 든 술을 권했다.
형 양의 관문에서 그를 기습하려 했던 왕식과의 대결은 처절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비를 뚫고, 관우는 오직 직관에 의지해 언월도를 휘둘렀다.
'팔이 무겁고 다리가 떨리는구나.
하지만 내 마음이 멈추지 않는데 어찌 발걸음이 멈추겠는가.'
그는 화살 한 발이 어깨를 스치는 고통 속에서도 왕식의 목을 단칼에 베어 넘겼다.
다섯 개의 관문을 통과하는 동안 그의 녹색 도포는 적들의 피로 검게 변해갔고, 적토마의 발굽은 닳아 피가 맺혔다.
하지만 관우의 눈빛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투명하고 형형해졌다.
그것은 살인귀의 눈이 아니라, 진리에 닿으려는 수행자의 눈이었다.
천 리 길의 끝자락, 지평선 너머로 익숙한 깃발이 보였다.
바람에 펄럭이는 '유(劉)' 자 깃발 아래, 한 사내가 초조하게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형님…!”
관우는 목이 메어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말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온 그는 유비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신에서는 진동하는 피비린내가 났고, 갑옷은 군데군데 깨져 있었다.
"늦었습니다.
동생 운장, 이제야 대의를 받들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유비는 아무 말 없이 관우의 거친 손을 맞잡았다. 유비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조조가 준 그 어떤 난로보다 따뜻했다.
유비는 소매를 걷어 관우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했다, 아우야.
네가 오는 길이 얼마나 험했을지 내 차마 짐작도 못 하겠구나.
살아 돌아온 것이 바로 천하를 얻은 것이다.”
관우는 고개를 숙여 유비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오관을 넘으며 단 한 번도 약해지지 않았던 그의 어깨가 격렬하게 들썩였다.
'이것이다.
내가 조조의 황금을 버리고 피의 길을 걸어온 이유가 바로 이 따스한 손길이었다.'
먼지 가득한 길 위에서 두 형제는 서로를 의지한 채 일어섰다.
지는 노을이 그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사람들은 훗날 이 전설 같은 여정을 기록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천하를 얻으려는 자는 힘을 쓰지만, 사람을 얻으려는 자는 의(義)를 쓴다.
관운장의 칼은 사람을 베었으나, 그의 마음은 시대를 구원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이 있다.
아직은 이 모든 믿음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나만의 '의'를 증명하는 길,
그 끝에 기다리고 있을 따뜻한 신뢰의 악수를 꿈꾸며 오늘도 기분 좋게 발걸음을 내디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