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 데이먼스이어 - Rainbow
언젠가 다시 만나면 그때는 지나치겠죠
우리에게는 남은 것이 없어요
그리움은 남았지만 난 표현하지 않겠죠
우리는 저물어간 노을 같아요
기차가 종점에 도착했습니다.
스피커에서 지직거리는 안내방송이 나왔을 때 데이먼은 작고 허름한 기차 한 칸에 존재하는 유일한 승객이었다. 검은 모자를 쓴 역무원은 표정 없는 얼굴로 데이먼이 갈 곳을 가리켰다. 달빛에 비춰 작게 반짝이는 자갈 돌길 끝에 우뚝 쏟아있는 언덕이 데이먼의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데이먼의 엄마는 언젠가 데이먼이 이 곳에 가게 될 것이라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는 이 곳을 뭐라고 불렀더라. 데이먼은 이 곳을 설명하던 단어를 기억할 순 없었지만 그 단어가 주는 느낌만큼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단어는 마치 고요와 소음이 끊임없이 변주를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날씨와도 같은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그런 곳일까. 데이먼은 언덕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발끝에 싣고 언덕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데이먼은 오직 자신의 발소리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려 노력했다.
거북목을 한 채 시선을 땅에 고정한 지 얼마나 흘렀을까. 데이먼의 처진 어깨가 빗물에 젖기 시작했다. 비는 한두 방울 데이먼의 솜털을 적시더니 어느 순간 세찬 장댓비가 되었다. 우산이 없던 데이먼은 비구름 아래 속수무책으로 온몸이 젖게 되었다. 걸음이 무거워졌다. 데이먼은 이 여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기차에 오르기 전 펜과 노트, 사진기를 챙겨 힘듦을 이겨낼 것이라 다짐도 했건만 비는 그런 데이먼의 마음을 모르는지, 데이먼의 재킷 안주머니에 있던 노트마저도 다 젖게 만들었다. 그 노트는 데이먼이 조제와 함께하던 나날을 매일같이 기록해둔 하나밖에 없는 일기장이었다. 그곳엔 조제와 산책을 하며 들었던 노래 가사, 학교를 몰래 빠져나와 간 호수에서 물비늘에 누워있는 데이먼을 그린 조제의 그림, 커다란 나무 아래 둘 만의 움집을 만들고 만들어먹던 요리 레시피, 조제가 좋아하는 마거리트를 말린 꽃잎 같은 것들이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아이의 눈망울처럼 담겨있었다. 데이먼의 왼쪽 가슴 위치에 있던 그 노트는 잉크가 번져 어느새 가슴에서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데이먼은 뚝뚝 떨어지는 검은 물이 받아보겠다고 뒷주머니에 있던 수통을 꺼내 들었다. 수통 안에서 비에 희석된 잉크가 애처로울 만큼 조금씩 바닥을 채우고 있었다. 하늘이 그런 데이먼의 모습을 안쓰럽게 여겨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비구름이 비를 다 쏟아내었을 뿐이었을까. 수통에 검은 물을 받느라 자신이 넘어지는지도 모른 채 앞을 향하던 데이먼은 어느새 비가 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데이먼은 축축한 바닥으로부터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어느새 언덕 정상이 코 앞에 있었다. 한두 걸음 더 앞으로 향하자 회색빛 바다가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언덕의 끝에는 가파른 절벽이 있었고 절벽 밑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체들이 파도에 힘없이 떠밀려오고 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철썩. 철썩.
"데이먼. 그곳의 끝에 가게 되는 날이 오면 그곳에 서서 너의 숨소리를 들어보렴. 그러면 무언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단다."
데이먼은 그 순간, 엄마가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엄마는 아주 오래전엔 검정과 흰색 말고도 수많은 색이 존재했다고 데이먼에게 알려주곤 했다. 다만 인간의 이기심이 그들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들어 언젠가부터 채도가 없는 색밖에 보지 못하게 되었고, 발견되지 못하는 색들은 차츰 이름을 잃어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색들이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런 말들이 오가는 밤에는 TV에서 지직거리는 흑백 무성 영화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엄마는 어째서 색들을 보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엄마도 정답을 몰랐던 걸까.
데이먼은 어린 시절 엄마의 가르침대로 그곳에 서서 눈을 감고 들숨 날숨을 감각하기 시작했다. 후. 하. 후. 하. 신기하게도 호흡을 가다듬을수록 절벽 아래의 파도는 잔잔해지며 소리를 잃어갔다. 그리고 들려오는 데이먼의 심장 박동 소리. 데이먼은 조제가 자신의 가슴에 기대어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들던 날을 떠올렸다. 너도 이런 소리를 들었을까. 그때 조제의 눈꺼풀은 얼마나 부드러웠더라. 그 어떤 뾰족한 물체라도 이 곡선 앞에선 녹아버리고 말 꺼야. 창 밖에서 들어오는 일직선의 빛은 조제의 눈꺼풀에 닿아 온 몸이 으스러지듯 힘을 놓아버린 것만 같았다. 조제는 그 자체로 빛이 나고 있었고 이름을 붙이기조차도 미약해 보이는 먼지들은 조제의 피부 위에서 가녀린 춤을 추었다. 그때부터였다. 데이먼은 눈을 감아도 조제와의 모든 시간들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조제가 데이먼을 관통하여 제멋대로 굴절해 수만 개의 조제가 되는 것만 같아 보였다. 데이먼은 온갖 장면들 속에서 또렷이 빛나고 있는 제각각의 색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조제가 데이먼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 상기되어있던 조제의 볼. 단풍잎이 데이먼의 손과 닮았다며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이던 조제의 얼굴. 다가올 미래는 모른 채 서로의 눈으로 침묵을 끌어안던 한낮의 날씨. 잎을 따고 다리를 건너 몸이 자주 아픈 조제에게 건넸던 야채수프. 데이먼의 얼굴로 가득했던 조제의 스케치북. 그 스케치북이 더 이상 데이먼이 아닌 다른 것들로 채워진 것을 보았을 때 거울에 비친 데이먼의 푸석한 얼굴. 끝내 보여줄 수 없던 등에 난 가시를 뒤에서 끌어안던 날. 얼음을 입에 물고 오도도 동네를 걸어 다닐 때 그들을 휘감았던 밤공기. 정지를 모른 채 온종일 돌아가는 관람차에서 본 일출이거나 일몰의 시간들.
데이먼은 그것들을 기록하고 싶어 져 다 젖어버린 노트를 꺼내 들었다. 허나 이내 기록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눅눅해진 펜을 노트에 대는 순간 그것들은 이름이 없어 증발되었고 형상은 금세 빛을 잃어 흑백 무성영화로 되돌아갈 뿐이었으니까.
조제야. 조제야......
기차를 타러 갈 때까지만 해도 데이먼은 조제와 함께 이곳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 어떤 날씨도 조제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할 때 조제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그러던 조제가 기차역에서 말도 없이 사라졌을 때 데이먼은 조제가 금방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조제는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끝내 오지 않았다. 울상이 된 데이먼을 보고 역무원은 말했다. 이 기차는 당신의 마음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조제는 이미 떠났어요. 아마 조제는 종점까지 가는 기차는 혼자밖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숨어버렸는지도 모르죠. 준비가 되면 출발해요. 조제도 그걸 바랄 거예요. 데이먼은 역무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역무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티켓을 쭉 찢어 데이먼에게 건넸다. 티켓에는 기차역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제와 데이먼의 교차역>
어째서 교차역이었을까. 그렇다면 조제는 나와 정 반대편의 종점으로 기차를 움직였던 걸까. 이름은 어디서 오는 거고 언제 사라지는 거지. 이름은 어떻게 붙잡는 거지. 각각의 기차가 있다면 하나의 선로에 두 개의 기차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달릴 순 없는 걸까. 데이먼은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정확한 순간을 만났을 때 셔터를 누르는 것은 데이먼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절벽 끝 저 지평선 너머에 조제가 있는 걸까. 그곳에서 너도 이름을 붙이지 못한 기억의 색들이 시체가 되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보았니. 지평선 너머에는 뜨는지 지는지 모를 해가 소리 없이 강렬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나의 세상인데 너의 세상은 어떠하니. 겨울을 좋아하는 조제야 그곳엔 폭설이 오니. 아니면 태풍의 눈에서 고요히 몸을 웅크리고 있니. 전해지지 못한 말들이 줄줄이 힘을 잃고 아래로 침몰했다. 그 아래에는 조제와의 기억들이 검은 시체더미가 되어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수북이 쌓아있었다. 장렬하는 해가 늙어가는 회색빛 바다를 어루만지고, 그 아래로는 하나의 커다란 검은 무덤이 미동도 없이 서있는 광경이 데이먼을 압도하고 있었다. 데이먼은 찰칵하고 셔터를 눌렀다. 셔터의 빛 때문인지 번개인지 모를 한 번의 큰 번쩍거림.
데이먼은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암실에 들어가 분주히 움직였다. 데이먼이 암실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암실 밖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데이먼은 암실에서 인화한 사진을 들고 조제와 함께했던 커다란 나무 아래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찍었던 흑백사진을 펼쳐보았다. 지나치게 눈부신 해와 회색빛 바다, 검은 무덤. 그리고 그때는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것은 반원 모양의 고리였는데 여러 개의 줄이 부드럽게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모습이었다. 데이먼은 그것이 조제의 눈꺼풀과 꽤나 닮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선. 그 곡선의 양끝에는 데이먼과 조제의 기억들이 미끄러져 검은 시체로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데이먼은 그 사진을 보고서야 자신이 조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들의 색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데이먼은 그 검은 덩어리를 사랑의 시체라 이름 붙였다. 그곳은 춥고 쓰라린 곳이었지만 동시에 비 온 뒤에만 볼 수 있는 추억의 고리들을 매만질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데이먼은 그 고리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고리는 검정도 흰색도 아닌 무수한 스펙트럼의 색들을 보는 만큼 보여주었다. 데이먼은 꽤 오랜 시간 사진에 머물다 사진에 뒷면에 '조제의 눈꺼풀'이라는 여섯 글자를 선명하게 적었다. 그리고는 나무 아래 그 사진을 묻어두었다. 날이 개고 있었다.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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