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멈출 때까지 너도 마시는 거야"
많고 많은 술게임을 해봤지만 이건 술게임계의 치킨 레이스가 따로 없다. 재밌는 점은, 다른 사람이 많이 마시게 하고 싶으면 그만큼 나도 많이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너 죽고 나 죽자'의 의지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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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오늘 글에는 술과 음주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도한 음주는 건강을 해칩니다.
모두 살면서 한 번쯤은 술 게임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성인이라면)
배스킨라빈스 31이라던지, 지하철, 바니바니(당근당근), 훈민정음, 눈치게임 등등...
요즘은 어떤 새로운 게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내가 대학교 신입생일 때는 이런 게임들을 많이 했었다. 꼭 술자리에서 하는 게임이 아니더라도, 여럿이 모인 모임 장소나 티비 예능에서도 이런 게임을 하는 모습을 꽤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술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신입생 MT나 동아리 모임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가게 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임들. 시끄럽게 게임하는 것보다는 도란도란 서로 이야기 나누는 걸 선호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는 술자리는 오히려 피하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한지 오래되다 보니 그 분위기가 그립기도 하다. 그리고 확실히 술 게임이 서로 친해지는 데에는 탁월한 효과를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려 신라시대 때부터 술 놀이를 즐겼다고 하니, 이 정도면 술 놀이에도 조상의 지혜가 담긴 게 아닌가 싶다. 신라시대 상류층들의 놀이 문화 중 하나를 보여주는 '주령구'라는 주사위를 보자. (출처: 전통문화포털)
주령구의 모습
그 일부를 살펴보면,
"소리 없이 춤추기"
"한 번에 술 석 잔 마시기"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 등의 벌칙들이 주사위의 14개의 면을 채우고 있다.
오늘날 술게임 벌칙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재미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나 술을 마실 때 하는 놀이가 있다는 게 흥미로운 부분이다.
물론 영국에도 술 게임은 존재한다.
게임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우선 직접 느끼고 경험한 영국의 술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100% 주관적!)
- Pub: 영국 술 문화하면 Pub을 빼놓을 수 없다. Pub은 쉽게 말하면 술도 팔고 음식도 팔고 다른 음료도 파는 술집인데, 영국에서 Pub의 의미는 꽤나 각별하다. 우리나라에서 친구와 잠깐 이야기 나눌 때 카페를 가듯이, 영국에서는 Pub을 가는 경우가 많다.
펍을 찾는 이유는 많은데, (1) 가게에 따라 다르지만, 이른 시간부터 늦은 시간까지 여는 경우가 많다.(카페는 보통 일찍 문을 닫는다) (2) 음료부터 음식까지 선택지가 매우 다양하다. (3) 가격이 저렴하다!
영국에 가기 전에는 Pub이라고 하면 어둡고 큰 소리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장소를 떠올렸지만 실제로 다녀보니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펍마다 분위기도 다 다르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릴 수 있는 식당, 카페, 술집 그 모두를 아우르는 장소가 바로 Pub인 것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Pub 브랜드 중 하나가 바로 'Wetherspoon'이다.
영국 어느 지역을 가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펍 체인점이다. 영국에서 저렴하게 술을 마시거나 식사를 하고 싶을 때 찾기 좋다. 술 없이 음식만 시켜도 되고, 혹은 음료만 시켜도 괜찮다. 주문도 보통 어플로 이루어지니 직원과 대화할 일도 없다.
Wetherspoon에서 식사로 자주 먹었던 All Day Brunch
물론 우리가 상상한 것처럼 약간은 어둡고, 신나는 노래가 큰 소리로 흘러나오는 Pub도 많다.
그런 펍은 보통 한국처럼 무조건 자리 잡고 즐기는 분위기가 아니며, 내 자리 네 자리 개념이 없다. 그렇다 보니 잠깐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면 다른 사람들이 방금까지 내가 앉아있던 테이블에 앉아있는 경우도 많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사람들이 메뉴판을 보고 음료를 주문하기보다는, 자주 찾는 자기만의 레시피로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Jin with Lemonade를 즐겨 마셨다.)
그렇게 음료를 시키면, 'Single or Double?'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은데, 원 샷을 넣어줄지, 투 샷을 넣어줄지 물어보는 것이다.
Pub에서 행사가 열리는 날도 많다. 대학 근처라 그런지 펍에서 대학 동아리 행사가 열리기도 하고, 어떤 펍은 365일 축구 경기를 보여주거나(큰 축구 경기라도 있으면 팬들이 많이 찾는다), Quiz Night 같은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슬러시 같은 술
- 안주: "외국 사람들은 안주를 안 먹나요?"라는 글을 인터넷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외국 사람들이라고 하면 너무 범주가 넓어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영국에서는 안주를 잘 먹지 않는다.
식사를 하기 위해 pub에 가는 게 아닌 이상, 술을 마신다고 해서 반드시 안주를 시키지는 않는다. 집에서 마실 때도 똑같다. 한국인에게는 당황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는 '오늘 술 마시자' 해서 모이면 '그래서 뭐 먹을래?'라는 질문이 당연히 나온다. 술집에서, 혹은 집에서 조차 술만 마신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하다못해 마른안주나 감자튀김이라도 먹어야지.
당연하지만 영국에도 안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앞서 말했다시피 펍에 음식 메뉴도 많이 있다. 안주를 아예 안 먹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처럼 '술 마시자 = 음식과 술을 먹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술 마실래?' 해서 일부러 저녁 안 먹고 나갔다가 빈 속에 술부터 마시게 될 수도 있으니 주의.
처음에는 조금 놀랐으나 나중에는 술 약속이 잡히면 미리 식사를 하고 나가게 됐다.
이런 분위기는 앞서 말한 Pub 문화 영향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리 구분이 없고 다들 돌아다니며 어울려 즐기는데 안주를 어디에 놓고 먹는단 말인가. (사실 펍에서 피자 한 판을 박스채로 한쪽에 끼고 들고 다니면서 먹는 사람을 본 적은 있다.)
Pink Jin with Lemonade
- 게임: 앞서 소개한 펍에는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마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당구대과 다트판이다. 아예 게임기가 있는 곳도 종종 있다. 옛날 오락실 게임기부터 마리오카트를 할 수 있는 조이스틱 게임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모르는 사람과도 어울려 게임을 하기 좋은 분위기이다.
그렇다면 집에서 친구들끼리 모였을 때 영국에서는 어떤 술게임을 할까?
1. Never Have I Ever
직역하자면 '한 번도 한적 없는~'의 의미이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Never have I ever' 뒤에 특정 행동을 넣은 문장을 이야기하면, 그 행동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 손가락을 접는 게임이다. 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의 손병호 게임을 닮은 부분이 있다. 다섯 손가락을 다 접으면 술을 마시거나 벌칙을 수행하는 규칙이다.
외국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게임이다. 질문을 듣고 질문에 언급된 행동을 해본 적이 있으면 'I Have'를, 안 해봤으면 'Never'이라고 적힌 판을 드는 것으로 답하기도 한다.
예) Never have I ever read partner's text messages without their permission.
(몰래 애인의 문자 메시지를 본 적 있는 사람?)
그 질문에 대한 친구들의 답변이 궁금해서, 질문으로 분위기를 띄우려고, 혹은 손병호 게임처럼 특정한 누군가를 저격해서 해당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는 게임이다.
출처: Youtube ellentube -"Never Have I Ever with Martha Stewart, Snoop Dogg and Anna Kendrick"
2. Truth or Dare
진실을 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벌칙을 수행하는 게임이다. 우리나라 진실게임과 매우 닮아있다. 지목된 사람이 먼저 'Truth'와 'Dare' 중에 선택하고, 'Truth'을 선택하면 질문을 받고, 'Dare을 선택하면 벌칙을 받는 식이다.
벌칙은 정하기 나름이라,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거나 전애인에게 연락을 하는 등.. 다양하다. 찾아보면 사실 몇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꽤나 대단한 게임이다.(참고로 동명의 공포영화도 존재한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영국에 가기 전부터 알고 있던 게임이었지만, 이다음으로 소개할 게임은 영국에 가서 처음 알게 된 게임이다. 동시에 인생 최고로 취한 경험을 선사해 준 게임이기도 하다.
3. King's Cup
위 단어를 검색하면 football 경기가 먼저 나오는데 당연하지만 그걸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뒤에 'drinking game'을 붙여야 의미하는 결과가 나온다. 나는 처음에 'Ring of Fire'이라는 이름으로 배웠으나 찾아보니 'King's Cup'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듯하다.
이 게임은 앞서 소개한 여타 게임들과 달리 몇 가지 준비물이 필요하다. 바로 트럼프카드(플레잉카드)와 컵이다. 각자 들고 있는 개인 컵 말고 하나의 컵이 더 필요하다(술 게임이니 당연히 술은 이미 준비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생략한다). 기본 세팅은 준비한 잔을 중심으로 잘 섞은 카드를 안 보이게 뒤집어 동그랗게 깔아놓는 것. 카드가 중간에 있는 컵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카드를 사용한 게임이라고 해서 원카드나 인디언 포커처럼 누가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카드는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
자, 준비가 끝났다면 각자 돌아가며 카드를 한 장씩 뽑으면 된다. 뽑은 카드의 숫자는 각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숫자에 맞는 행동을 수행하면 되는 게임이다. 규칙은 찾아보면 자세히 나와있다(무려 규칙이 정리된 cheat sheet도 있다!)
카드의 숫자가 가진 의미를 몇 가지 살펴보자.
숫자 2: 그 카드를 뽑은 사람이 지목한 사람이 마신다.
숫자 8: 숫자를 뽑은 사람이 한 사람을 지목하면, 해당 판이 끝날 때까지 그 두 사람은 짝이 되어 어느 한쪽이 마시면 함께 마신다.
Jack: 카드를 뽑은 사람이 한 가지 규칙을 정한다. 해당 규칙은 그 판이 끝날 때까지 유지된다.
그렇다면 게임 제목에도 포함되어 있는 'King'은 어떤 의미의 카드일까?
King: King을 뽑은 사람은 자신의 음료를 카드 중앙의 컵에 붓는다. 그리고 마지막 King(4번째 King)을 뽑은 사람은 중앙의 컵(King's Cup)에 담긴 음료를 모두 마시고, 게임은 마무리된다.
이런 게임이다. 각 카드 번호마다 규칙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처음은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우리가 그 많은 한국 술게임 규칙을 알고 있는 것처럼 영국 친구들도 각 카드가 뭘 의미하는지를 다 외우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취한 그날도 바로 이 게임을 한 날이었다.
그날은 친구 Flat에 초대를 받아 술과 간단한 간식거리를 챙겨서 들렀다. 마침 친구 중 한 명이 트럼프 카드를 가지고 있어서 Ring of fire(King's Cup)이라는 게임을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처음 들어보는 게임이었지만, 술게임은 마시면서 배우는 게 전 세계 공통인지 일단 게임은 시작되었다. 사실상 카드 하나하나 의미가 있다 보니 다 설명하고 게임을 시작하기에도 애매하다.
우선 모두의 손에 술이 담긴 잔이 하나씩 주어졌다. 아마 위스키와 와인과 기타 음료가 섞인 무언가의 음료가 들려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히 술잔의 크기도 소주잔, shot glass 크기가 아니라 큰 종이컵 크기였다. 영미권 영화에서 대학생들이 하우스 파티 같은 거 하면 손에 꼭 들고 있는 것 같은 컵 크기말이다.
그렇게 각자 술잔을 부여받고, 게임은 시작되었다. 룰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한국 술게임처럼 바로 시작해서 못하면 걸리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라 뽑는 카드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정해진 규칙에 맞게 수행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술게임으로 단련된 한국인이라면 금세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복병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앞서 설명하지 않은 카드 중 ‘Ace’ 카드이다.
플레잉 카드(트럼프 카드)를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플레잉 카드에는 숫자 ‘1’이 적힌 카드가 없다. 숫자가 적힌 카드는 2부터 10까지 존재하고, 1 대신 ‘Ace’가 존재한다.
여러 게임에서 중요한 카드로 여겨지는 이 Ace 카드가, 이 게임에서는 어떤 의미일까?
Ace는 ‘Waterfall’을 의미한다. 뽑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동시에 마시기 시작해서, 뽑은 사람이 결정한 방향(시계방향, 반시계방향) 순서로 이전 사람이 마시는 것을 멈춰야 내가 마시는 것을 멈출 수 있는 것이다. 뽑은 사람은 첫 번째로 멈출 수 있다. 오늘의 글 첫 부분에서 언급한 규칙이 바로 이 카드에 대한 내용이다.
그렇게 나는 저 게임을 배운 첫날, 첫 Waterfall에서 인생 처음으로 주량을 넘기게 되었다. 조금씩 마신다고 마셨지만 이름 그래도 폭포(Waterfall)처럼 마시는 주변 친구들 사이에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과는 뻔했다. 친구 flat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문까지 잠그고 바닥에서 잠들었다.
쾅쾅!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나를 찾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비척비척 일어나 다른 화장실로 들어가서 또 바닥에서 쉬다가, 새벽 해가 떠오르고 술이 조금 깼을 때, 겨우 내 flat으로 돌아왔다.
태어나서 한 번도, 심지어 대학교 신입생 때조차 주량을 넘긴 적이 없는데 영국 술게임으로 처음으로 주량을 넘겼다. 다음날 오후 늦게야 제정신을 차린 나에게 친구가 처음으로 한 말은 '살아있어서 다행이야'였다.
우리나라 술게임이 그렇듯 모든 술게임은 알려주는 사람마다 규칙이 조금씩 다르고, 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고, 또 찾아보면 나오는 결과 마다도 조금씩 다르다. 오늘 소개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직접 겪은 개인적인 경험 기준으로 설명한 내용이다.
처음 하는 술게임을 너무 진심으로 임하면 이렇게 된다는 교훈을 얻고 이 글을 읽는 모두 술은 책임질 수 있을 만큼 마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