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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원 Sep 07. 2024

한밤중 이탈리아 기차역에 버려진 우리들

뜻밖의 여정

"여기 어디야...?"


"우리 잘못 내렸나 봐"


"헉 이제 어떡해?"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못 내린 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기차가 역이지만 역이 아닌 곳에 내려준걸!




우리들의 첫 유럽 여행지는 바로 "이탈리아"였다.


물론 한국발 비행기에서 처음으로 내린 곳은 영국이었지만, 영국에서는 학교 가고 공부하고 친구들 사귀고... 적응 정착을 위한 생활을 했기에 여행이라고 부를만한 시간은 보내지 못했다.


그렇게 영국에 도착한 지 한 달 좀 넘게 지났을까?

슬슬 타지 생활에 조금 적응도 됐겠다, 마침 여행 갈 시간이 나 호기롭게 제대로 된 첫 유럽 여행 일정을 세웠다.

이탈리아를 첫 여행지로 택한 이유는 크게 없다. 마침 '베네치아 카니발'이 열릴 시즌이기도 했고, 또 비행기표가 저렴했다 정도의 기억이 남아있다.


그렇게 여행을 같이 갈 친구들과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결정한 계획은 영국에서 출발해 밀라노, 베네치아, 라스페치아(친퀘테레), 피렌체, 피사, 로마까지 돌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는 알찬 10일간의 일정이었다.


그렇게 이탈리아 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한 도시는 바로 로마!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이 로마에서 다시 영국 맨체스터로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 로마에 위치한 공항에 대해 잠깐 알아보자.

로마에는 아래와 같이 3개의 공항이 존재한다.

    

    - 로마 피우미치노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    

    : 규모의 국제공항이다. 한국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들어오는 여행객들이라면 대부분 공항을 이용할 것이다.


    - 로마 참피노 공항

    : 굉장히 작은 공항으로,  주로 유럽(단거리) 비행 스케줄로 이루어져 있다.


    - 로마 우르베 공항

    : 공항이지만 우리가 떠올리는 공항과는 조금 다른, 소형 비행기를 위한 공항이다.


이 중에서 우리가 귀국행 비행기를 탄 공항은 바로 '로마 참피노 공항'이었다. 이제까지 가본 공항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작은 공항이었다. 로마 중심으로부터는 대략 16km 정도 떨어져 있다.


가난한 학생 겸 여행객인 우리는 비행기 편을 선택할 때 가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행할 때는 항상 저가 항공사의, 새벽 스케줄 비행을 고르곤 했다. 이번 여행에 선택된 비행표 또한 꼭두새벽이륙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덕에 영국-이탈리아 왕복 10만 원 초반대에 비행기표를 구있었다!)


비행기 시간이 이른 시간이니만큼, 귀국 날 공항까지 최대한 빨리, 쉽게 가기 위해 마지막 날 숙소는 최대한 참피노 공항 근처로 잡았다. 우리가 선택한 숙소에서부터 공항까지는 차 타고 고작 10분 거리! 기차역으로부터도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완벽한 위치의 숙소였다. 즉, 출발 전날 밤에 미리 공항 근처로 이동하고, 다음 날은 편하게 공항으로 가는 게 우리의 계획이었다.





모든 일정이 순탄하게 흘러갔다.

10일간의 여행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만족스러운 관광을 마친 우리에게 남은 일정이라고는 마지막 숙소 체크인과 다음날 공항으로 출발하는 것뿐이었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조금은 아쉬운, 조금은 긴장이 풀린 마음으로 기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기차는 바쁘게 달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리가 내려야 하는 역은 바로 '카사비앙카'. 어느새 기차가 멈추고 문에 달린 버튼이 깜빡깜빡 점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별생각 없이 내리기 위해 버튼을 눌렀고, 열린 문 틈으로 나타난 것은 새까만 암흑이었다.

열린 문 틈으로 새어나간 기차 내부의 불빛 말고는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무성한 풀숲이 나타났다.  



그 일순간의 정적을 잊을 수 없다.

그런 괴담 있지 않은가? 늦은 밤 사람이 거의 없는 열차를 타고 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도 모르는 존재하지 않는 역에 도착해 있다는 괴담 말이다.

마침 밤이라 내리는 사람은커녕 기차에 사람 자체가 많이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바로 지도를 켜서 확인해 보자 우리의 현재 위치를 나타내는 아이콘이 기차역에서 미묘하게 벗어나있었다. 지도상으로는 기차역까지 아직 조금 거리가 남은 것처럼 보였다.



"아, 역시 그런 거지?"

"깜짝 놀랐네"



그럼 그렇지! 분명 모종의 이유로 정차 위치를 조정하는 중일 것이다. 가끔 서울 지하철도 그런 경우 있지 않은가. 다 도착했는데 미묘하게 정차 위치가 스크린 도어와 어긋나 멈춘 다음 바로 문을 열어주지 않고 슬그머니 위치를 조정한 후에 문을 열어주는 것 말이다.

분명 이 기차도 그런 상황인데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게 아니다 보니 우리가 성급하게 버튼을 눌러서 아직 내리면 안 되는 곳에서 문이 열려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금방 기차가 살짝 앞으로 이동해 제대로 역이 나올 거라고 믿고 열린 문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기다렸다.  


그렇게 열렸던 문은 아무 사람도 뱉어내지 않은 상태로 조용히 닫혔다. 그리고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기차가 점점 속력을 높여 다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 어? 하며 당황하는 사이에 우리가 내려야 했던 기차역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우리가 내려야 했던 '카사비앙카' 역의 리뷰를 찾아보면 이런 글을 볼 수 있다.

기차로 여행할 때 놓칠 수 있는 역. 기차는 철도 건널목의 기차 시작 부분에 정차하고 수풀에서 끝납니다.


이 리뷰를 미리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계획을 철저히 세우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도착 기차역 리뷰까지 찾아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마 우리가 있던 곳이 역의 끝자락이었나 보다. 하지만 이미 기차는 떠났고, 내려야 했던 역도 빠른 속도로 우리의 뒤로 사라져 갔다. 당황한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한 채 우선 다음 역에서 바로 내리기로 했다.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면서 도착한 다음역. 하지만 이번 역도 예외는 없었다.

문이 열린 순간 역 플랫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만큼 캄캄한 풀숲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는 곳에, 그리고 기차역처럼 보이지 않는 바깥 풍경에 무섬증이 생긴 우리는 이곳에 내려도 될지 몰라 얼어붙었다.

 

하지만 저번 역에서와 달라진 점은, 옆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10대로 보이는 청소년 몇 명이 문이 열리자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역에 제대로 도착한 게 맞는지 계속 의심하던 우리는 그제야 그냥 내리면 되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기차가 멈추면, 그리고 문이 열린다면, 내려도 되는 것이다.

청소년 몇 명이 자연스럽게 뛰어내리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마주하고 정신을 차린 우리는 헐레벌떡 따라 내렸다.



버스정류장에 기차가 멈춘다면 이런 느낌일까?

기차에서 허둥지둥 내리자마자 다급하게 카메라를 켜고 남긴 사진이다. 사진으로 보면 별로 그래 보이지 않지만 생각보다 기차에서 내려올 때 느껴지는 높이가 꽤 있다.



예상치 못하게 도착하게 된 '산타 마리아 델레 몰레' 역.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밤에 바라본 이 역은 꽤나 어둡고 슬럼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플랫폼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건 길이가 얼마 되지 않고, 작고 낡은 건물 하나 놓여있을 뿐이다.


아래는 '산타 마리아 델레 몰레' 역의 구글 리뷰이다.

기차가 역에 맞지 않아요... 내리려면 뛰어내려야 합니다.

역이라고 부르는 것은 도박이다. 기차가 멈춘다고 말하겠습니다.

굉장히 공감 가는 내용이다. 이 사람도 기차 문이 열린 순간 당황한 게 틀림없다. '기차역'이라기보다는 기차가 잠시 멈췄다 가는 곳처럼 느껴졌다.

기차 플랫폼이 기차 칸 2개가 간신히 될 정도이다. 이런 곳에서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당연하게 기차역이 보이고 발 밑에는 역 플랫폼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크나큰 도박이 아닐 수 없다.


기차역이 기차보다 짧다니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다. 사과는 맛있고 바나나는 길고 긴 건 기차인 게 사회적인 합의로 정한 것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기차 플랫폼도 기차 길이에 맞춰서 길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이제까지 기차 플랫폼의 길이가 기차보다 긴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기차역의 크기가 기차보다 훨씬 작은 역들을 마주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까 '카사비앙카' 역에서 우리가 내릴 장소를 착각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차역이 워낙 작은데 기차는 그에 비해 길기 때문에 기차역에 도착을 해도 지도에서 보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기차 길이 정도의 플랫폼 건설이 불가능하다면 최대한 문이 열린 순간 그곳이 기차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무엇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이 놀랍다.



빨간색이 원래 목적지인 '카사비앙카' 역이고 그 밑에 검은색으로 표시한 역이 잘못 내리게 된 '산타 마리아 델레 몰레' 역이다. 원래 내려야 했던 '카사비앙카' 역으로부터는 숙소까지 걸어서 6-7분 정도의 거리였다. 하지만 한 정거를 더 가고 내리게 되면서 그 계획이 틀어지게 된 것이다. '산타 마리아 델레 몰레' 역으로부터 숙소까지는 걸어서 35분 정도 소요된다(원래 목표 시간의 5배).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

어두운 기차역에 계속 머무르는 것도 안전한 선택은 아니었다. 특히 기차역, 지붕이 있는 건물이 있는 곳에는 항상 노숙자가 있기 마련이라 숙소까지 갈 수단에 대해 빠른 결정이 필요했다.

당시 대중교통을 찾아봤으나 마땅치 않았고, 이제 와서 한 번도 부른 적 없는 택시를 부르기에도 애매했다. 아직 해외여행 초보자에게는 어플도, 택시를 잡아본 경험도 없었을뿐더러 인적이 드문 곳이라 택시를 부른다고 해서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사실 하루에 몇만보씩 걷는 게 일상인 해외여행에서 도보 35분 거리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늦은 밤에, 인도도 없고, 인적도 없는 거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도 전혀 계획되지 않은 여정이라면 더더욱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가만히 있다고 무엇도 해결될 리 없고, 역에 가만히 있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아 우리는 그냥 지도를 믿고 가보기로 했다. 한밤중 뜻밖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숙소까지의 길은 상상과 달랐다.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

가로등은 간간히 있었으나 그럼에도 한국의 밤 정도로 밝지는 았았고, 무엇보다 인적이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인도 또한 없었기에 우리는 도로 한쪽 끝에 붙어 열심히 걸었다. 가는 길에 보이는 광경 또한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

마치 당장이라도 공포영화에 나올법한 비주얼이다. 밤에 걸어가기 무서운 길이 이어졌다. 그나마 서로가 있는 덕분에 같이 뭉쳐서 용기를 불어넣어 주며 나아갔다.

 

그렇게 짐을 이고 지고 한참을 걸은 우리는 결국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둘러 체크인하고 들어오자 기운이 쫙 빠져서 금방 잠에 들었다.


다음날 일찍 공항으로 떠나기 위해 나가서 마주한 모습은 이렇다. 전날 밤의 소란이 없었던 일이었던 듯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의 모습이다. 분명 직접 걸어온 길일 텐데 밤에는 그렇게 무서웠던 거리가 이제 보니 한적하고 평화롭게 느껴졌다.




당시에는 무섭고 당황스러웠지만 결국은 별다른 문제없이 무사히 숙소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숙소에 가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다리를 움직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었다. 이제 와서 떠올려보면 재미있는 해프닝 중 하나로 기억되지만 당시에 찍은 사진들은 지금 봐도 무섭다...


한 가지 팁!

큰 기차역이 아니라면 혹시 모르니 자신이 내려야 하는 기차역에 대한 내용도 구글 지도에서 찾아보자. 다른 사람들의 당황한 후기가 미래의 당신의 당황스러움을 막아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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