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바퀴 돌아 서핑을 타다
서핑?
솔직히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고 싶다고, 혹은 해보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스포츠가 있었지? 정도의 감상이다.
하지만 지구를 반바퀴 돌아 도착한 포르투갈에서 갑자기 서핑을 할 기회가 찾아왔다.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도시는 '리스본'과 '포르토'이다.
그 두 도시의 느낌이 많이 다르고, 각각의 매력이 뚜렷해 여행자들이 사랑하는 도시들이기도 하다. 리스본에서 포르토까지 버스로 한 번에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수도 말고 포르투갈의 다른 곳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포르토도 많이 찾곤 한다.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애정하는 도시 중 하나이다.
포르토는 포르투갈에서 수도인 리스본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역사와 전통이 잘 보존되어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고, 포르토 역사지구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바다와 맞닿아 있어 도시 전반에서 Porto(항구) 도시로서의 매력도 느낄 수 있다. 이 밖에 포트와인, 서핑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쉽지만 한국에서 포르투갈, 포르토라는 도시를 가기에는 쉽지 않다.
직항이 없어 포르투갈 어디를 가려고 해도 경유가 필수적이며, 보통 20시간은 족히 걸린다.
포트토에서 묵었던 한인 민박집 주인 분이 문득 포르토가 서핑으로 유명하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서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곳의 파도를 찾아 멀리서 일부러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 여행 계획을 세울 때는 알지 못했던 사실이라 찾아봤으나, 그 말대로 포르토 바닷가에 서핑 샵이 많았고 포르토에서 서핑을 도전한 한국인들의 후기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여행 계획에 전혀 없었던 일정이지만 솔깃한 이야기라 같이 여행 간 친구들에게 서핑을 도전해 볼 생각이 있는지 슬쩍 물어보았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수영은커녕 바다에 몸을 담그는 것조차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은 고려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나와 여행 일정이 다른 일부 친구들은 나보다 빨리 돌아가야 하기도 했다.
나는 바다가 좋다.
이유는 특별히 없지만 기억이 있는 순간부터 항상 바다가 좋았다. 누군가가 산 vs 바다를 물어보면 고민도 없이 바다를 택하곤 했다. 가능하면 여행 일정에 반드시 바다를 들릴 수 있는 시간을 껴 넣었다. 같이 여행 다니는 일행 중 항상 혼자서 기대에 차 수영복을 챙겨 다니고는 했다. 수영할 수 있는 날씨가 아니더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 한구석에 챙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하던가.
우연히 같은 민박의 다른 손님이 서핑 계획을 세우는 것을 듣게 되었다. 혼자 도전하기에 두려워 머뭇거리고 있는 나에게 한줄기 기회 같았다. 혹시 그 계획에 동참할 수 있을지 여쭤보았고 흔쾌히 승낙해 주셔서 그렇게 즉석에서 서핑 모임이 결성되었다.
바로 다음날 아침, 그 좋아하는 조식도 먹지 않은 채 일찍 해변으로 출발했다.
그렇게 도전하게 된 첫 서핑.
포르토 해변가에 서핑 샵은 많았으나, 우리는 민박집에서 추천받은 곳으로 택했다. 택시 타고 눈 깜짝할 새에 도착한 바다는 꽤나 한산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 건지, 혹은 원래 그런 곳인지 해수욕이나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은 없고 서핑하는 사람들만 몇 있었다. 사실 일광욕을 즐길만한 날씨가 아니기도 했다. 바닷가에 놀러 갈 계획이 있었어도 충분히 취소할만한 궂은 날씨였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물방울을 떨어뜨릴 것처럼 흐리고 그에 걸맞게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다만 서핑을 하기에는 좋은 날씨인지 이른 시간부터 파도에 몸을 맡긴 보드는 많았다.
가자마자 초보자 수업 신청을 하고 결제를 하자 사이즈에 맞는 서핑보드와 서핑보드를 전달받았다.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작은 체구로 인해 서핑 슈트와 서핑 보드 둘 다 작은 사이즈로 제공받았다.
서핑 슈트 입기부터 난관이었다.
서핑 슈트가 너무 작아 몇 번이나 이게 내 서핑슈트가 맞는지 되물어야 했다. 어렸을 때 꽤나 오래 수영을 배웠기에 수영복 입는 건 익숙했으나 전신을 덮는 서핑 슈트는 처음이었다. 팔 한쪽, 다리 한쪽 넣는 것도 마음처럼 되지 않아 같이 간 일행과 강습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몸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안간힘을 다해 슈트를 다 입고 나니 벌써 한바탕 운동을 끝낸 것처럼 진이 빠져있었다.
슈트를 다 입고 서핑이 처음인 사람들끼리 모여 짧게 강습을 들었다. 바다에서 보드에 몸을 맡긴 상태로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는지, 어떻게 몸을 일으키고, 두 발이 서핑 보드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어떤 자세로 나아가면 되는지 등의 정보를 알려주셨다.
그리고 모래 위에서 몇 번 연습을 마친 우리는 바로 각자의 서핑 보드를 가지고 바다로 향했다. 서핑 슈트 위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흰색 반팔티를 걸쳤고, 발목에는 서핑 보드와 연결된 줄이 단단히 묶여있는 상태였다.
생각보다 바다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발이 닿지 않는 곳에서부터도 훨씬 깊이 들어간다. 구명조끼나 튜브 없이 이렇게 깊은 곳까지 들어온 것은 처음이라 이때부터 조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서핑보드가 있기는 하지만, 잔잔한 바다도 아니고 파도가 거세게 이는 바다에서 내 발과 줄로 묶인 길쭉한 판때기가 있다는 것은 내 생존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파도가 올 때 서핑 보드 때문에 몸을 가누기 더 힘들었다. 그때부터는 '나는 수영할 수 있다'를 몇 번이고 되뇌며 마음을 다스렸다.
이제 서핑을 할 모든 준비를 마친 우리들.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혹은 혼자의 힘으로 보드에 엎드려 파도를 타고 나아가 일어서서 자세를 잡으면 된다. 말은 쉽지만 몸이 따라주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대부분의 내용을 까먹었으나 지금까지 기억날 정도로 선생님이 강조했던 것은 보드에 올라가서 아래를 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앞을 보라는 것.
하지만 발 디디는 곳이 출렁거리는데 아래를 보지 말라는 건 어려운 일이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무심코 쳐다보고 마는 것처럼 당연한 것. 내 두 발이 지금 보드 위에 올라와 있는 게 맞나? 보드가 나아가는 방향에 다른 사람은 없나?(방향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보드가 충돌해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보드의 어디에 발을 둬야 하더라?
말 안 듣고 주야장천 아래를 봤고, 아래를 보는 족족 몸이 마법처럼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한 번도 멋지게 서핑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인류 진화 2번째 단계 정도의 자세에서 더 몸을 펴지 못하고 항상 물에 빠지고 말았다. 처음 시작할 때 상상했던 멋진 서핑 포즈, 파도를 즐기는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점점 살기 위해 보드 위로 기어오르는 생존 의식만이 불타올랐다.
사실 높이로 치면 수면 위로 내 키 정도, 많이 쳐줘도 내 키에 서핑 보드의 두께를 더한 정도의 높이일 텐데, 물에 빠졌을 때 발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니 엄청나게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파도를 타고 해변가로 쓸려가는 것에라도 적응하자는 마음으로 오뚝이처럼 끝없이 일어났다 물속으로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배부를 때까지 바닷물을 마시고, 팔과 다리에 슬슬 힘이 들어가지 않을 때쯤 우리는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바다에 들어가 있었을 터인데(핸드폰이 없으니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다.) 체감상 반나절은 바다에 빠져있던 것 같았다.
또 한 번 지옥 같은 잠수복 벗기 시간이 지나고(다행히 입는 것보다는 수월했다) 드러난 다리에는 멍이 들어있었다. 물놀이한 후의 노곤함에 취한 상태로 숙소에 돌아와 아직도 바다에 떠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으로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여행의 마지막날 오후를 통째로 잠으로 보내버렸지만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살면서 해볼 거라 생각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해보게 되는 것이 여행의 가장 큰 묘미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어느 누가 갑자기 '내일 서핑하러 갈래?' 선뜻 도전해 볼 생각이 들지 않을 텐데
포르투갈이 서핑이 유명하다는 말을 들으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고, 유명하다는 포르투갈의 서핑은 어떨지 궁금해져서 그 순간부터 눈을 감아도 바다와 서핑이라는 단어만 맴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