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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Oct 19. 2022

12. (일기) 살림

: 열두 번째 일기 - 여기 지금, 다시 살아나는 우리

Photography by ©Soo Jin Kim

Statue by Antony Gormley, from ‘Event Horizon’ open exhibition in London, 2007

“EVENT HORIZON hopes to activate the skyline in order to encourage people to look around. In this process of looking and finding, or looking and seeking, one perhaps re-assesses one's own position in the world and becomes aware of one's status of embedment.  

(https://www.antonygormley.com, Antony Gormley’s website)


“ 이벤트 호라이즌: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활성화시키는 전시를 통해 사람들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길 바란다보고찾고다시 보고찾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계 속의 나의 위치를 다시 새기고매몰된 존재의 상태를 인식할  있을 것이다.” (안토니 곰리 공식 홈페이지작품 설명 )





#시간이 흘러도 다시 이 자리에


St. Paul’s Cathedral. Photography from Upsplash


내가 열한 살 무렵, 아버지가 회사에서 유럽으로 연수를 떠나셨다. 무슨 선물을 사다 줄까 물으시는 질문에 나는 사진을 많이 찍어와 달라고 부탁했다. 

앨범 3권을 다 채우고도 부족할 만큼 아빠는 사진도 많이 찍고, 선물도 많이 사서 돌아오셨고, 런던, 파리, 로마.. 미지의 세상을 사진으로 보고 또 보면서 나는 눈도장을 하나하나 찍었다. 


-언젠가 내가 직접 가야지. 


건축과에 원서를 넣으면서 포트폴리오를 준비할 때, 아버지가 유럽에서 찍어오신 사진 속에서 가장 좋아했던 건물 사진을 하나 골라 생애 첫 건축 스케치를 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이었다. 


시간이 흘러, 내 나이가 유럽 연수를 떠나시던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그 앞에 서 있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 사진 속 모습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그대로. 아버지의 젊음이 나의 젊음 위에 포개져 시원한 바람처럼 스쳐 가고 있었다. 


# 가득 찬. 텅 빈. 


런던에서는 5년 남짓 살았다. 짧은 거주 기간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많이 아는 도시를 생각해보니 서울도, 오클랜드도, 멜버른도, 시드니도 아닌 런던이다. 

서툰 만큼 세상에 날이 서있었던 때,  하루 종일 회사에 시달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온종일 집에서 근무한 남편이 답답하다고 ‘산책’을 끌고 나가 평균 1-2 시간을 걷고 둘 다 지칠 대로 지쳐서 돌아왔다. 런던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지치고 지쳐서 머리와 가슴이 텅 비워질 때까지. 

원래 발로 밟은 공간, 몸으로 느낀 공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 법이다. 차를 타고 다닌 뉴질랜드와 호주의 거리, 지하철로 돌아다닌 서울의 거리보다 내 몸에 새겨진 공간은 런던의 뒷골목이다. 부푼 마음을 가지고 시작했던 런던의 삶은 화려한 만큼 고되고 그늘졌다. 어디를 가도 배가 고팠고 추웠다. 


이사를 수도 없이 다녔지만 주로 런던의 ‘스퀘어 마일(Square Mile)’ 근처에서 살았다. 

스퀘어 마일은 세인트 폴 대성당을 중심으로 2.9 km²정도 펼쳐진 The City of London(The City라고도 부른다) 지역을 부르는 닉네임이다. 대포 카메라를 든 관광객과 커플티를 입은 신혼여행 커플, 한가롭게 템즈 강을 조깅하는 성공한 뱅커들 사이에서 늘어난 추리닝과 전신 패딩을 몸에 둘둘 두르고, 목을 잔뜩 움츠리고 순례자처럼 걸어 다녔다. 

가볍게 산책하러 나갈 경우, 기본 루트는 늘 세인트 폴 대성당- 밀레니엄 브릿지-테이트 모던이었다. 

흐리고 우울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가 테이트 모던에 도착할 때쯤이면 적당히 하루의 긴장이 풀어지고, 노곤해졌다. 남편은 미술관 로비에서 졸고, 나는 질리게 본 전시를 또 둘러보거나 텅 빈 터빈 홀에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해가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집으로 돌아올 땐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말랑거렸다. 


런던 생활은 설레지만 두려웠고, 춥지만 따뜻했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남편과 나는 이 관계를 계속해야 할지 끊어내야 할지 늘 흔들렸고, 그러면서도 서로에게 서로밖에 없었다. 첫 아이를 만나고, 곧 잃었다. 

시작했고 끝났던 때,  끝나고 다시 시작한 곳. 그때, 그 공간은, 그리고 거기에 있는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텅 비어 있었다. 


빈 곳에 바람이 불고 빛이 들어온다. 아주 작은 빛에도 공간은 가득 찬다.

비움이 주는 두려움과 고요한 위로. 삶이 두려운 것은 텅 비어 있고, 무엇이 채워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어서 외로운 곳에 고요함과 사색이 깃든다. 빈 곳을 결핍으로 볼지, 가능성으로 볼지 결정하는 건 내 등의 자세와 발끝의 방향에 달려있다. 어느 쪽을 볼 것인가. 어떻게 서 있는가. 어디로 갈 것인가. 


벽은 무언가를 세우고 다시 무너지기 위해서 태어난다. 공간은 가득 채우고 다시 비우기 위해 지어진다. 빈 곳이 아름다운 건 이제 하나하나 채워나갈 기대 때문이다. 한 번 온전히 채워져 본 기억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 앞으로 다가올 시간. 어떤 시간과 공간이 쌓여 나를 채우고 비웠는지 생각한다. 내 앞의 시간과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비울 것인가를 생각한다. 지금 고요하고 텅 빈 이 집에서. 때론 그 사색의 힘이 우리를 계속 걷게 한다.

길 위에서 살아난다. 공간도. 삶도. 다시. 또다시.




기러기 (Wild Geese)

메리 올리버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 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0+12 개의 공간 이야기

(열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공간|공감 이야기, "살림, 살아나는 공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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