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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Oct 19. 2022

12.(공간) 살아나는 공간

: 열두 번째 공간 | 공감 - 테이트 모던/ 라반 댄스 센터


Photography by ©Soo Jin Kim

‘The black Box’ by Miroslaw Balka,

Tate Modern Turbine Hall exhibition in London, 2009



#어둠 속에서, 어둠 끝에서,


거대한 텅 빈 곳 안에 거대한 어둠이 담겨 있다.

미로슬로 발카의 ‘검은 상자’는 13미터가 넘는 컨테이너 박스- 어둠의 입 안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걷기 시작한 지 열 걸음도 안되어 주위는 칠흑 같은 블랙이다.

손을 내뻗고 더듬거리면서 주춤거리면서 한 발짝씩 발을 뗀다. 무엇이 갑자기 튀어나올지 무엇이 숨겨져 있을지 몰라서 더 불안하다.

이제 와 돌아갈 수는 없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공간 속, 멈춰진 듯한 시간 속에서 꾸물꾸물 가다 보면 느닷없이 갑작스럽게 끝에 도착한다. 아무것도 없다. 벽이다. 그러나 왠지 안심된다. 돌아선다. 어느새 어둠이 익숙하다. 빛이 앞에 있고, 어둠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관객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내는 공간. 상자에 들어가는 이의 마음의 집에 어둠이 스며들었다면 돌아가는 발끝에는 빛이 스며든다. 아티스트는 작품을 통해서 이 시대의 어두운 정신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어두움을 끝까지 마주하고 다시 스며드는 빛을 찾아 돌아가는 길. 그 길 또한 작가가 어둠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고 싶은 위안은 아니었을까.


거대한 전시를 가능하게 하는 거대한 텅 빈 공간.

테이트 모던을 다른 미술관과 구분 짓게 하는 것은 이러한 어둠과 빛을, 그 사이의 비움을 끌어안은 설계에 있다.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비웠기 때문에 스스로 재생하는 공간이 주는 힘에 있다.



#살림, 재생, 다시 살아나는 공간

: Tate Modern, by Herzog De Meuron

Photography by ©Soo Jin Kim

(위): 세인트 폴 성당 돔에서 바라본 테이트 모던

(아래):  테이트 모던 라운지에서 바라본 세인트 폴 성당


우아하고 신사적이지만 철저하게 계급적이고, 첨단과 전통이 뒤엉킨 가운데 미묘한 질서가 존재하는 영국 사회처럼 런던은 동쪽과 서쪽, 템즈강 북쪽과 남쪽에 따라 쓰는 언어, 사회적 지위, 경제적 상황이 다 달라지며 일그러진 미로처럼 꼬여있다.

강북에 위치한 스퀘어 마일에는 세인트 폴 대성당, 올드 베일리, 런던 성벽 등 역사적 건물과 Gherkin, 로이드 빌딩 등 현대 건축의 시그너쳐들이 촘촘히 분포되어 있다. 세계 경제의 허브인 런던의 금융회사들이 모여 있는 곳도 이곳이다.

그에 반해 테이트 모던이 있는 강남의 서더크 지구는 옛날부터 공장지대였고 가장 범죄가 잦고 가난한 지역 중에 하나였다. 대도시는 곳곳에 이런 ‘가면 안 되는 곳’들을 구멍처럼 안고 있고 이런 곳들에 어떻게 접근하는가는 건축가들의 끝나지 않는 숙제이다.


템즈강을 가운데 끼고 강북과 강남 간의 격차는 오랫동안 런던이 하나의 통합된 도시로 발전하는 걸림돌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상황은 테이트 재단이  미술관을 기획하고 지금의 Bankside 화력발전소 부지를 찾았을  도시재생에 초점을 맞추게  배경이다.


현상설계에 당선된 허조그  뮤론의 설계안은 단지 한 건물의 ‘재개발 아닌, 주변 지역과 커뮤니티의 ‘재생 중심을  디자인이었다.

기념비적인 건물 하나가 지역을 잠시 ‘지배’했다가 곧 다시 치워버려야 하는 낡은 쓰레기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역사와 기억을 끌어안고 땅과 사람과 하나가 되면서 같이 새로워지고자 하는 도시 재생.

사실 테이트 모던은 옛 건물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상부 일부만 바꾸면서도 내부 곳곳에 통일된 디자인 언어로 마감한 건축 자체만으로도 단정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테이트 모던을 도시재생의 성공적 사례로 만든 이유는 건물의 외피에만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공간이 가진 맥락과 프로그램에 있다.

세인트 폴 성당을 마주하고 강을 ‘보행자 다리’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소중한 밀레니엄 브릿지)로 잇고 그 끝에 테이트 모던을 두는 지형적 context를 통해 옛 역사와 새 역사가 사람의 발끝으로 이어진다.

세인트 폴 대성당-브릿지-테이트 미술관을 지나는 길을 하나의 루트로 만든 건축적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옛 건물과 새 건물을 경계로 사이에 놓인 공간은 텅 빈 마당이 된다. 그 안에 강과 다리가 담긴다. 실제로 밀레니엄 브릿지는 거리 공연가들의 공연이나 플래시몹 같은 깜짝 공연이 일어나기도 하는 통로이자 무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옛 거리와 현대의 다리를 지나 테이트 모던에 다다르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건 거대한 빈 공간(터빈홀)이다.

센트럴 런던, 스퀘어 마일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서더크나 보로우 마켓 주변에서 사는 사람들도, 멀리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도 모두 함께 섞여 테이트 모던의 넓은 터빈 홀에서 만난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음까지도 품어주는 거대한 공간에서는 격식을 차려 옷을 입을 필요도, 목소리를 낮출 필요도 없다. 긴장 가득한 대도시의 마천루와 정신없게 바쁜 시장터에서 벗어나 모두 거대한 빈 공간의 품에 깃들어 쉰다.

때론 놀이터가 되고, 때론 테이트 모던만이 전시할  있는 거대한 스케일의 전시를 체험하고, 때론 서로가 만나는 광장이 되는 .

특별한 작품을 보고, 인증 사진을 남기고, 바로 떠나는 기념관이 아니라   마당으로, 일상으로 스며들어 머무는 .

사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터빈 홀의 모습도 아무 전시 없이 사람들이 눕고 앉아서 쉬는 일상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Placemaking, 일상성과 공공성이 테이트 모던의 핵심이다. 테이트 모던은 삶에 스며든 문화의 힘으로 낙후되고 지친 도시를, 그곳에 깃든 삶을 다시 살아나게 한다.


Photography by ©Soo Jin Kim

터빈 홀에서 시장처럼 펼쳐진 젊은 작가들의 공동 전시 / 테이트 모던 건물 외관에 그려진 스트릿 아트

이처럼 테이트 모던 전경을 거대한 캔버스로 쓰기도 하고, 터빈 홀을 젊은 작가들의 전시장, 사무실, 만남의 장소로 쓰기도 한다.

Sunflower seed, by Ai WeiWei. Photography by ©Soo Jin Kim

터빈 홀에 펼쳐진 1억 개의 해바라기 씨. 

역경을 이겨내는 사람들 간의 끈끈한 우정을 뜻하는 해바라기 씨는 사실 도자기 작품으로 하나하나 수제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작가가 한 마을에 머물며 마을 사람들 1600여 명과 분업으로 이 작품을 만들면서 그 마을의 도자기 산업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은 터빈 홀의 유니레버(Unilever Series) 시리즈  하나였다. 거대한  공간은 이처럼 스케일이  작품, 관객이 직접 경험하고 참여하는 전시도 가능하게 한다. 이는 테이트 던이 제작이 완료된 작품의 전시 공간으로만 이용되지 않고, 다른 곳에서는 시도하기 힘든 작품의 제작을 가능하게 하는 영감의 공간이   있게 한다.




#빛. 꽃. 무지개: 다시 피어나는 공간

: Laban Dance Centre, Herzog De Meuron


Resource: https://arquitecturaviva.com/works/centro-de-danza-laban-londres-8
언덕 위의 무지개, Photography by ©Soo Jin Kim

허조그 드 뮤론의 또 다른 건물인 라반 센터도 런던 남동부 루이샴 지구에 자리 잡은 또 다른 도시 재생의 사례이다.

파릇파릇한 언덕 , 꿈처럼 피어오르는 무지개 같은 건물의 외관은 사실 미묘하게 달라지는 색색의 폴리카보네이트 클래딩이 부드럽게 휘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장관이다.

재가공, 재활용이 가능하고, 가벼우면서도 다른 재료와 함께 사용하여 내열성과 강도를 높일  있는 폴리카보네이트는 유리를 대체할  있는 미래형 소재로, Sustainability 중시되는  건축계에서 많이 활용하는 자재이다.


라반 센터가 지어진 땅은 원래 쓰레기매립장이 있던 땅이었다. 버려진 땅에서 버려진 플라스틱을 재활용하여 생산된 건축 소재로 아름다운 무지개를 피어 올린 건물. 단순히 외관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과정 속에 숨어있는 마음 또한 다정하다.


그러나 이 건물의 진정한 의미는 형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이끌어가는 삶 속에 있다. 라반 센터는 지역 커뮤니티, 지자체와 협력하여 전문적 무용 교육뿐 아니라 장애인, 어린이, 직장인, 노인 등 다양한 계층에 맞춰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 전문 무용가에게만 허락된 문턱이 높은 학교가 아니라, 누구든 찾아와 춤을 출수 있는 열린 마당인 셈이다.


무지개를 잡으러, Photography by ©Soo Jin Kim


런던에서의 생활은 급하게 끝이 났다.  아이를 유산하고 철저히 혼자라고 느꼈을 , 아니 죄책감과 상실감에  스스로 나를 놓아 버렸을 , 마음속엔 시드니에 계신 엄마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상처 나고 황망한 마음으로 급히 런던을 떠나면서,  눈에, 발에, 마음에 담았던 건물들을 마지막으로 다시 찾아갔다. 순례의  끝에서 찾았던 건물. 라반 센터의 외피를 스치듯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내 맘에도 다시 무지개가 피어오르기를 기도했다. 무지개는 금방 사라지는 꿈같지만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 머물러준다. 무지개가 뜨면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은 그리운 곳으로 돌아가 촉촉해지고 다정해진다.


런던을 떠난 후 십여 년, 다시 내게서 꽃처럼 웃는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어둡기도 하고 빛나기도 한다.

남편과는 아직도 흔들리고, 나는 여전히 내가 무겁다. 우울은 매일의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쓸려간다. 그러나 이제 나는 파도가 지나간 뒤 모래사장에서 빛나는 조개를 가만히 주워 들여다본다. 가만히 귀에 대고 바다가 들려주는 오랜 노래를 듣는다.


Covid 19 어두운 시대를 지나며 나의 발길이 다시 검은 상자로 들어간  았다. 지친 하루의 , 위로를 주었던   터빈 홀로, 아버지의 꿈과 나의 꿈이 만났던 세인트  성당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세인트  대성당과 테이트 모던 사이, 다리  바람을 맞으며 반짝거리는 템즈강의 노을을 바라보고 싶었다. 라반 센터에서 만났던 옅은 무지개를 손에 얹고, 괜찮다. 괜찮다.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비어 있던 나의 젊음, 그 시작점으로 돌아가 다시 빛을 찾고 싶었다.


물리적 여행이 불가능했던 시간. 모두가 각자의 방에 갇혀 있던 어두운 밤.

나는 대신 텅 빈 마음의 집에 앉아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내 마음을 치유해주었던 다정하고 아프고 빛나는 공간들, 내가 나일수 있게 지켜준 공간, 질문과 답을 주었던 공간들을 하나하나 다시 어루만지면서 어둠의 끝까지 걸어가고 가볍게 돌아설 수 있기를. 그래서 다시 빛으로 향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마지막 글을 쓰면서 돌아보니 내가 찾던 빛, 공간에서 찾고 싶었던 빛은 결국 마음속 무지개 – 희망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집의 끝은 길이듯,  마음의 집에서, 숨어 있기 좋은 방에서 시작했던 이야기는 지나간 (), 앞에 놓인 ()로 이어진다.

공간과 공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여기, 지금, 다리 , 강물 , 언덕  무지개로 끝난다. 아니, 다시 시작한다.

사람들이 다니고, 마음의 집이 열리고, 공간이 살아나고, 삶이 피어나고,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이 길을 걷는다.

그럼 다들, 끝내 환하고 따뜻하시길.



# 더 나누고 싶은 것:


다시 그려본 세인트 폴 대성당, Drawing by ©Soo Jin Kim


#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보냅니다.

Sigur Ros – Hoppipolla (Live in Asbyrgi, Remastereed from movie, ‘Heima’)

(출처: Sigur Ros Official Youtube Channel)

https://youtu.be/nlVA_e6WQ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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