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진 Aug 18. 2022

0. (일기) Prologue. 밤

 : 0번째 일기 - 밤을 견디는 우리

(Covid 19기간 동안 제가 있는 시드니는 여러 번의 Lockdown을 거쳤습니다. 방구석에서 시작해서 서서히 마음으로 스며드는 진득한 어두움을 견디기 위해, 더 열심을 내어 마음과 기억 속 공간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한 뼘의 빛으로 하루를 견디며 한 발, 한 발, 걸어온 길. 이 글들은 빛과 온기를 찾아 더듬어간 서툰 여행의 기록입니다.

하나의 이야기마다 편지(일기) Part와 공간(집) Part로 나누어 발행하겠습니다.


그럼 다들, 끝내 환하고 따뜻하시길.)







밤: Stay In Your Home


밤이 계속 되고 있다.


불면증을 오래 겪게 되면 시시각각 변하는 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11시부터 2시 정도까지는 밤이 열심히 달리는 구간이다. 새벽 4시가 지나면 밤이 달리기를 멈추고 새벽에서 자리를 비켜준다. 부지런한 영혼들은 슬슬 기지개를 켠다. 멀리 미세하게 느껴지는 빛의 언저리를 찾아 고개를 비튼다.


한밤중도 아니고 이른 새벽도 아닌 어정쩡한 자리에 놓여진 시간. 3시 30분.


오늘도 틀렸구나. 그래도 조금이라도 자야 해. 라는 마음과 어차피 이렇게 된 거..그냥 밤새고 내일을 일찍 준비할까?라는 마음 사이의 갈등이 치열하게 고조된다.

밤이기에는 아쉽고 아침이기엔 영 미안한 시간.

랫동안 밤이었다. 끝날  끝나지 않는 역병의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나의 시간은 잠도  자고 내일을 준비하지도 못하는 3 30분에 멈추어 섰다.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끝을 위해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지 아니면 시작을 위해 천천히 쉬고 있는지   없었다. 유예의 시간 속에서 점점 죄책감과 조바심만 늘어갔다.


Please stay in Your Home.

불확실성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를 마주할 때 인간의 두가지의 선택을 한다.

Fight, or Flight. 우리는 숨는 것으로 싸우면서 또다른 공포를 키워나갔다. 벌집에 하나씩 놓인 알들처럼 자기의 cell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영어(囹圄)의 시간.


어쨌든 그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모두가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눌러놓았던 마음이 그리움인지, 반가움인지 분노와 우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우리는 잔뜩 악에 받혀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싸우든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던가 웃던가 했다. 소란이 끝나고 온기가 날아가자 길에도, 집에도, 마음에도 결국 공허만 남았다. 그러나 남는 것이 미적지근한 공허뿐인들 우리는 주어진 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


3시 30분.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어제와 내일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달라진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배웠다. 어둠 속에서 눈이 더 깜깜해지고 목이 더 잠겨가던 시간. 선택이었든 강요였든 지금 이 어둠이 나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실존이라면, 나는 이 밤을 한번 깊게, 오래 응시하고 싶다.


요즘 나는 집에서 집을 짓는다.


집이 아닌 곳에서 집을 짓는 마음과 집에서 집을 짓는 마음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자의든 타의든 모두가 집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서 어떤 이는 집에서 더 편안해 지는 것을, 어떤 이는 집으로 더 힘들어 지는 것을 최전선에서 지켜 보았다. 힘의 논리로 굴러가는 세상 속에서 내가 만들고자 하는 집,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너무 희미해보였다.

수많은 불면의 밤을 지나며 눈은 더 깜깜해지고 목이 더 잠겨가던 시간. 집을 부수고, 집을 꿈꾼 시간들이 켜켜이 쌓이고, 다시 물거품처럼 사라져갔다. 건축가라는 타이틀을 떠나 하나의 무력한 인간으로서, 집이란 공간에 대한 사색과 질문이 깊어지고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리적인 집이라는 유닛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 이 생각의 흐름은 자아, 몸, 도시, 존재, 사유, 우주로 계속 집의 의미가 확장되었고, 집을 짓는 자로서의 자아와 집에 사는 자로서의 자아, 나아가 집이라는 존재로서의 자아가 충돌하면서 오지랍과 자책, 그리고 무기력이 이어졌다.


푸른 먼지처럼 쌓여가던 사색들이 어느새 너무 고여 터져 버릴 것 같던 지친 밤. 문득 그냥 초심으로 돌아가 내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공주처럼 무엇이든 하나씩 꺼내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보면 나는 또 하루를 살고, 천일을 버티고.. 그렇게 긴 밤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일의 이야기가 끝나고 기나긴 밤의 터널을 지나면 집에서 나갈 수 있을까.

집을 나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0+12개의 공간이야기

(프롤로그: '집, 터, 길' 이야기로 계속 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