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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Aug 19. 2022

0. (공간) 집. 터. 길

: 0번째 공간 | 공감

집: Where are you?


푸른 어둠 속에 가두어진 시간.


손을 뻗으면 내 손 끝도 보이지 않아 길도 나도 사라지는 시간이 찾아올 때, 무엇보다 극명히 드러나는 건 개인의 외로움이다.

외로움은 그 안에 공간성을 내재하고 있다. 사람들은 여기까지가 내 땅이야.라고 말하면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높은 담장을 치고 꼭대기에 깨진 유리병을 심는다.


공간과 존재는 유기적으로 작용하면서 서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집은 자아의 연장이며 자아가 발현되는 장(field)이다. 따라서 내 땅, 내 집에 경계를 지을수록 오히려 나는 내 안에 갇히고 고립된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가 나일까. 어디까지가 나의 지평일까.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는 바흠이라는 한 농부가 등장한다.

어느 날 바흠에게 원하는 만큼의 땅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아침에 출발한 지점으로 해가 지기 전까지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조건을 지켜기만 하면, 하루 동안 그가 밟은 모든 땅은 그의 소유가 되었다.

바흠은 가면 갈수록 보이는 더 비옥한 땅을 향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어 걸어가면서 많은 땅을 따냈다. 마침내 해지기 전, 바흠은 가까스로 제자리에 돌아왔지만, 너무 지친 나머지 곧 쓰러져 죽었다. 결국 그가 소유한 공간은 그의 무덤,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6피트의 공간이 전부였다. 존재가 소유의 개념에만 사로잡혔을 때, 공간은 관에 갇혔다.






거주: Here I am.


하이데거는 "건축하기, 거주하기, 사유하기 (Building, Dwelling, Thinking)"라는 저술을 통해 주체(나)가 객체(world)와 조화를 이루는 과정- 즉, 세계 안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내면 안에서 세계를 의미화 하는 과정을 ‘거주(dwelling)’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내가 나로만 나를 한정 짓는 게 아니라  세계와 소통하고, 주변과 이어지며 우주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드러낼’ 때(현현(顯現, Epiphany), 존재는 "지금, 이곳에, 거주한다."

이렇게 ‘거주하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하이데거가 창시한 ‘현존재(Dasein)’라는 개념은 ‘being there’, ‘being-in-the-world’라는 뜻을 가진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거주하는 곳이 그 존재, 영혼의 집이자 (where one is at home), 존재가 가진 장소(where one has a place)라고 보았다.


Drawn by © SOO JIN KIM


참다운 거주란 소유가 아니라 실존이다.


소유라는 삶의 결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실존이라는 삶의 과정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거주하기’란  ‘더불어 살기’ 또는 ‘함께 있기(presence)’로 해석된다. 다른 말로는 살림(homemaking), 또는 placemaking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집을 짓는 것은 존재가 자신 내부와 외부의 공간을 감각하고 의식하는 실존의 문제와, 존재와 이 세계가 소통하는 관계의 문제를 함께 다루는 섬세한 작업이다.


집을 바깥에서 안으로 바라보면 물리적 경계와 피난처(shelter)로서의 집이 보인다. 그러나 안에서 시선이 출발하면 지금 여기, 이 집을 살고 있는 주체의 삶, 동선, 행동양식, 과거의 흔적과 미래의 가능태가 보인다.

자라는 아이 키를 재면서 남긴 기둥의 눈금들, 자꾸 디뎌서 움푹 꺼진 돌계단의 볼우물, 일요일 오후의 티타임을 기대하면서 창가에 둔 꽃 같은 지점에 사실 우리의 집이 숨어 있다.


집의 본질은 물질성의 표피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거주하는 이의 삶에 의해 드러나고 새롭게 찾아지는 것이다. 집에 거하는 이의 마음이 지은 이 보이지 않는 집은 다시 보이는 집의 물질성에 스며들어 서로 순환되고 이어진다. 집과 집의 이야기, 집이 집일 수 있는 실존이 바로 살림이다.


지난 몇 년간, 어쩔 수 없이 집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전의 내 작업들이 바깥에서 집을 바라보는 건축가로서 행해졌다면,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에게는 집의 내부와 나의 내면에서 집을 바라보는 살림꾼의 모습이 더해져 갔다.

그렇게 다시 바라본 집은 더 이상 작품도, 부동산도 일거리도 아닌, 나의 존재의 연장이자 내가 거주하기 위한 터, 내가 놀기 위한 장, 나의 지경이자 확장된 소우주였다.





Genius Loci (Sense of Place): 터


거주는 경험자가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시공간의 위치(location, position)를 인식하고 체험하면서, 그 경험을 몸의 자세와 마음의 기억으로 간직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름을 불러줄 때 우리가 꽃이 되는 것처럼, 한 존재가 외로운 밤하늘에서 자신의 좌표를, 별자리를 자각할 때, 그곳은 더 이상 텅 빈 어둠이 아니게 된다. 특별한 의미와 진정성을 가지는 장소 (place)로 화한다. 존재는 고유한 그 장소, 터에 거주하는 지박령(Genius Loci)이다.


열여섯에 가족을 따라 이민 온 후, 나는 줄곳 태평양 바다를 종과 횡으로 넘나들면서 철새처럼 살아왔다.

다중 언어자, 다중 문화의 수혜자로 살다 보니 굳이 어려운 철학 담론을 논하지 않아도 언어가 사유의 세계를 만드는 기본 단위라는 것을, 존재의 집을 쌓아가는 벽돌이란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영어를 쓸 때의 나는 조금 더 적극적이고 뻔뻔하다. 그만큼 투박하지만 자유롭다. 한국말을 쓸 때는 조금 더 예민한 내가 나온다. 그만큼 섬세하고 다정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내 언어와 사유의 세계는  투박한 영어도 수줍은 한국말도 아닌 어정쩡하고 생경한 덩어리로 뭉개져있기 일쑤다. 나라는 자아의 정체성이 모호하고 겹쳐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못난 덩어리 중 하나의 실오라기라도 부여잡고 고집스레 엉킨 실타래를 따라가 본다.


그러면 어느새 나는 처음 가려던 곳과는 다르지만 또 비슷해 보이는 어떤 지점에 도착한다.

그 때야 지금껏 걸어온 길의 지도가 보인다. 내가 지금 어디에 왔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서머셋 모옴이 인생은 페르시아 양탄자라고 한 것처럼,  각자 다른 길과 존재들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짜내는 카펫의 무늬가 나의 정체성이다.


길 위에 새겨진 발걸음, 내가 만난 이들의 마음이 내 존재의 터(place), 나의 집이다.






시적으로 거주하기: 시(詩)속의 공간. 공간 속의 시(詩)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언어는 시적 언어, 즉 개인의 경험과 감상이 투사된 고유의 목소리이다. 과학적 언어와는 구별된다. 과학적 언어가 측량할 수 있는 객관적인 공간으로서의 집을 뜻한다면, 시적 언어는 존재가 자기화해서 스며든 장소, 터를 뜻한다.


현존재가 거주하는 터, 내가 나 다울 수 있는, 나를 보여주는 고유의 공간, 사유의 자장은 나만의 목소리, 즉 시적 언어로 드러난다. 그러한 언어를 건축하는 것이야 말로 바로 삶이라는 공간에 시(詩)를 쓰는 것이라며 하이데거는 “시적으로 인간은 거주한다 (…Poetically Man Dwells.)”라고 선언한다.


왜 실존을 말하기 위해 굳이 시를 언급하는 걸까? 시를 말하기 위해 왜 건축이 나오는 걸까?


시는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자 질문이다.

시쓰기란 세상을 낯설게 보고, 질문하고, 뒤집고, 새로운 이미지로 재창조하는 일이다. 숨겨진 것을 드러내고 접힌 것을 펼치는 것이다.


시는 일상의 세계나 정서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나의 질문, 또는 포착한 하나의 발견에 집중하면서 시인은 시(詩)안의 시공간(scene, 이미지)을 꼼꼼히 구축한다.

언어의 의미와 리듬을 벽돌처럼 쌓으며, 충돌시키며, 해체하면서 태어나는 이미지, 그 시공간은 시인의 목소리로 재해석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하나의 우주이다. 이렇게 태어나는 시 속의 공간은 읽는 자와 쓰는 자에게 쌍방향으로 침투하고 반향을 일으키면서 점점 더 큰 공간으로 울려 퍼진다.


건축 또한 그렇다. 존재가 자연의 터, 시간의 터, 사유의 터를 오래 응시하면서 따라가다 보면 터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질서를 발견하게 된다.

터에 스며있는 우주적 질서가 그것을 발견한 자의 내적 질서(삶)를 만나서 질문, 강화(reinforce), 또는 재창조될 때, 그 지점에서 공간의 시(詩)가 흘러나온다.

마음의 풍경은 존재의 집 - 보이는 집과 보이지 않는 집이 된다. 집에 거주하는 이가 지금껏 걸어온 길을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앞으로 걸어갈 길을 인도하면서 같이 나아간다.

사람과 공간은 서로 공명하면서 서로를 찾아주고 서로의 꼴을 빗는다. 모든 과정은 노래가 되고 시가 된다.

자신을 찾고자 하는,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는 모두 시인이자 삶의 건축가이다.



길: 삶은 여행(*)


시인의 집은 건축일 수도, 언어일 수도, 음악일 수도, 고양이나 아이일 수도, 그저 빛일 수도 있다.

물리적 공간일 수도 있고, 생각의 공간일 수도, 감성의 공간일 수도 있다.

그러한 살림의 공간은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어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고 흐른다.

공간의 흐름. 그것은 길이다. 집은 터로 흐르고, 터는 길로 흐르고, 그 길을 우리는 여행한다.


한동안 내가 사는 곳은 록다운 (lockdown)을 시행해서, 각자의 거주지로부터 5km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물리적으로 제한 지어진 나의 경계. 그 안의 내 집. 그 안의 내 방. 그 안의 내 마음.

내가 점점 작아지고 내가 나를 가두고 가두어져 가던 어느 밤, 살고 싶다.라는 말이 내 안에서 터져 나왔다.

억눌려있던 한마디 신음 같은 몸짓, 또는 비명 같은 울음으로 시작된 한 존재.


그 아이가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나와 꼭 닮은 너의 공간이 나왔다. 너의 공간을 따라가자 우리의 공간이 보였다.

글과 글 사이의 행간에서, 그림의 색과 형태 사이에서,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와 모니터 속 웃음 사이에서, 우리의 낮과 밤 사이에서, 그 공간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방으로, 집으로, 거리로, 광장으로 흘러갔다.


평소에는 시끄러워서 들리지 않았던 조용한 시가 밤의 고독을 빌어 비로소 들렸다.

그 조용하고 낮은 별의 목소리는 지금껏 내가 책에서 읽어왔던 메가 담론, 육중한 성이 아니었다. 그런 글은 이미 내가 존경하는 많은 스승님과 선배님, 동료들와 후배님들이 많이 써주셨다.

내 글은 박식한 정보로 타인을 계몽하기엔 너무 부족하고, 확신에 찬 철학과 비전으로 사회를 계도하기엔 너무 어정쩡하다. 끝나지 않는 한숨의 밤을 보내며 몇 번을 쓰다가 좌절하고 지우고 그래도 다시 쓰면서 결국,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내 말을 쓰자.란 생각이 들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빗물이 고이는 곳.


내 마음에 고여있는 그런 우물 같은 공간, 다정히 내 마음을 어루만져준 치유의 공간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싶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그런 내밀한 공간의 이야기들을 가볍게, 또는 무겁게 나누고 싶다.

그러면서 우리, 다시 오늘 하루를 온전히 살고 싶으면 좋겠다. 늘 그렇듯 끝내 우린, 따뜻함을 찾을 것이다.


그렇게 공간의 시(詩), 시(詩) 속의 공간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서 나는, 너는, 우리는 어떤 존재로 살게 될까.


나침반도 없고 지도도 없는 안개 낀 길.

홀로, 또 함께 가다보면 어느새 우리 뒤에 놓여 있는 별빛의 길.

마음의 별자리를 올려다본다. 부끄러운 손을 내민다.


(* '삶은 여행' (THE 3RD PLACE), 이상은씨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0번째 이야기를 마치며.


오늘 자주 등장하신 분. Martin Heidegger

- Portrait drawn by © SOO JIN KIM


: Covid Lockdown동안 하루 한명씩 연필초상화를 그렸어요. 저에게 힘이 되어주신 가족, 친구, 지인, 그리고 영혼의 스승님들을 그리면서 밤을 견뎠습니다. 71번째로 그렸던 하이데거의 초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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