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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톨아람 Sep 19. 2022

내가 나로 살아도 충분한 이유

- 『몬스터 차일드』를 읽고



(이재문의 장편동화, 제1회 사계절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내가 괴물이라고? 그런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도서관에 갔을 때, 이 책이 보였다. 8권 정도 있었는데 모두 대출 중이고 한 권이 있어 대출 신청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책을 내밀었더니 그 책은 비치용이고 대출 가능한 책은 모두 대출 중이라 아쉽게 돌아서야 했다. 며칠 후 작은아이 학교에서 공지가 올라왔다. 도서 목록과 함께 독서활동 과제에 대한 안내 공지, 그리고 다시 마주한 제목, 『몬스터 차일드』.


작은아이가 엄마랑 같이 읽고 이번엔 그림이나 영상 말고 독서 감상문을 적어보고 싶다고 했다. 개학 전에 어서 읽어야 하니 좀 빨리 구하면 좋겠다고 했다. 다시 대출을 시도해볼까 하고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니 여전히 모두 대출 중. 알라딘에 주문하니 당일 배송해준다고 했다. 알라딘은 지니였던가!  아무튼 이렇게 엄청난 인기 도서를 영접할 수 있었다!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 남학생들만 가득한 중학교에 근무했다. 마치 중1 전담교사라도 된 듯 몇 년간 계속 ‘남자, 중학생, 1학년’들과 생활하다 보니 평생 잘 모르고 살았던 ‘남성의 성장 과정’ 중 일부를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체험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고(事故)의 흐름도 결코 예측할 수는 없지만, 은근히 패턴이 있어 나중엔 조금 덜 당황하며 대처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온갖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정글에 어느 날 갑자기 내던져진 연약한 초식동물이 된 기분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아무튼.


당시 학생들은 ‘초글링’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스타크래프트에서 저글링과 초등학생을 결합한 단어다. PC방에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모습을 비하하는 표현이었다. 시간이 흘러 신조어의 유행은 달라졌지만, 어린이에 대한 비하 표현은 여전히 생겨나고 입에서 입으로 흘러 다니고 있다. ‘급식충, 잼민이, -린이’ 등과 같이.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구석이 있다. 중1 남학생들에게 “초딩 같다”는 말이 욕처럼 쓰이고 있었다. 한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으면서 자신보다 어린 대상을 향해 비하와 혐오 표현을 손쉽게 드러냈다. 불과 1~2년 전이라면 본인 또한 ‘초글링’이며 ‘잼민이’일 수 있는데, 그 시간을 벗어나면 곧바로 그 손가락이 바깥을 향할 수 있는 걸까?


그런데 이 감정 안을 가만히 잘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누군가의 시선’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어서까지 계속 ‘눈치’를 보게 만들 때가 많다. ‘남들이 나 같은 어린이들을 잼민이라고 하네? 난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더 이상 그렇게 불리기 싫어.’ 같은 감정. 내가 이만큼 자라고 보니 저 아이들은 유치하네, 어차피 내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일은 없으니 무시해도 그만이라는 생각. 그 생각의 근원을 따라가 보면 결국에 그건 누군가의 시선을 답습한 경계심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비하나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경험은 결코 유쾌한 경험일 수 없다. 혐오의 손가락질이 내게 오지 않도록 되레 바깥을 향해 내어 뱉는 방어기제 같은 날카로운 말들. 다치기 싫어서 빼어 드는 무기 같은 말들. 그 칼은 어디까지 날아가서 얼마만큼의 상처를 낼 수 있을까.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가늠하지 못할 만큼의 결과에 이를지도 모른다.



책에는 뮤턴트 캔서로스 신드롬(MCS, Mutant Cancerous Syndrome: 돌연변이 종양 증후군)으로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하늬와 산들이 나온다. 사람들은 이 증상을 ‘몬스터 차일드 신드롬(Monster Child Syndrome: 괴물 아이 증후군)’이라 바꾸어 부르며 혐오의 감정을 드러낸다. 하늬는 정체가 탄로 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전학을 해서 일곱 번째 학교까지 오게 된다. 증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계속 약을 복용하고,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면서.


책을 읽는 동안 초등학교 교사인 이재문 작가님의 진심 어린 마음이 흘러드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비밀 장소에서 남의 시선, 남의 눈치 따위 아무런 상관없이 편안하고 자유롭게 나무 위를 뛰어다니는 오하늬와 강연우의 모습이 형언할 말을 쉽사리 찾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산책을 듣는 시간(정은, 사계절, 2018)』에서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아도 되는 벽장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던 수지도 떠오른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향한 애정의 마음조차 곧잘 식게 만든다. 미움의 감정 곁에 사랑의 감정이 쉽게 자리할 수 없는 탓이다. 진짜 사랑하는 힘, 진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힘. 이 힘은 키우고 싶다고 쉽게 키울 수 있는 게 아니며, 길러주고 싶다고 쉬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른 존재 사이를 가르고 선을 긋고 밀어내는 사회 안에서 내 안의 나를 감싸는 힘을 기르기는 어려운 법.



노트에 ‘정상(正常)’이라는 단어를 쓰고 가만히 본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정상’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계속 약을 먹게 하고 치료를 받게 한 하늬의 엄마를 생각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란 뭘까? 과연 그런 명확한 잣대가 존재할 수 있을까? 손가락이 모두 열한 개인 사람들만 모인 사회에 가면 나의 손가락 10개가 결코 정상일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른다는 생각은 사회적 가치와 시선이 빚어낸 편견이라는 괴물이 아닐까. 진짜 괴물은 조금 다른 모습을 지닌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편견’과 편견이 빚어낸 ‘사회’라는 제3의 눈일 것이다.


하늬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 결코 비정상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을 바라본. 남들이 나를 괴물이라 불러도 나는 ‘나를 사랑할  있다 말하는 마음. 눈치 보지 않고 스스로를 드러내고 펼칠  있는 마음. 움츠린 어깨를 당당히 펴고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갈  있는 마음은 얼마나 크고 용기 있는 사랑인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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