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시인의 첫 소설, <여름과 루비>를 생각하며
고등학생 때 자우림 앨범에서 ‘숨은 그림 찾기’라는 노래를 들었다. 밝고 경쾌한 리듬, 칸쵸 껍데기 안에 파란 잉크로 인쇄되어 있을 법한 귀여운 제목, 트윈 테일 머리에 깔끔한 초커, 짧은 블랙 스커트를 입은 보컬까지. 한없이 밝을 것만 같은 귀여운 제목 안에는 잊고 있던 유년의 그림자를 끄집어내는 가사들이 들어 있었다. 모든 빛은 어둠을 안는 껍데기라고 항의라도 하는 듯, 동글동글한 칸쵸를 꺼내 톡 깨문 순간 초콜릿 안에서 짙은 와인 빛깔 어둠이 입 안 가득 퍼져버릴 것만 같은 가사들,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그때의 내겐.
(출처: Again 가요톱10 : KBS KPOP Classic 유튜브)
https://youtu.be/nNNLdGCt7WM
‘여름과 루비’라는 투명하게 빛날 것만 같은 두 단어의 조합을 바라본다. 이 책을 연 마음이 오래전 그 노래를 처음 들을 때의 마음을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또 한 편의 노래가 떠올랐다, ‘베누스 푸디카’.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틈’과 ‘목구멍에 연필이 박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남은 연필 끝에서’ ‘튀어나’오던 ‘죽은 지렁이들’과 함께 ‘글자를 배’운 일곱 살 어느 날.
시에서 만난 어린이가 다시 소설에서 고개를 빼꼼 들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다가와 안기지도, 미소를 보내지도 않는 아이가 의자 밑으로 웅크려 들어간다. 에너지를 발산하며 잔뜩 경계하지도 않고, 무표정하다는 말보다도 더 무감정한 작은 등이 구부러진 채로. 원하지 않아도 커버릴 수밖에 없었고, 시키지 않아도 숙제를 할 수밖에 없던, 그러나 깊이 사랑을 갈구하고 그리워한 작은 아이가.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젖은 코를 땅에 박고 지하로 들어가’버리고 싶었던 일곱 살 아이가.
시인에게 ‘일곱 살’은 어떤 시간일까? 시에서도, 소설에서도 그의 은유와 함의는 일곱 살에서 출발한다. 작은 몸으로 견뎌내야만 했던 어느 시간들. 그때의 귀와 그때의 손과 그때의 심장을 본다. 여름은 도려내고 싶지 않았을까,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왔던 소리들을. 여름의 작은 손에 들린 가위의 금속성 날은 어떤 예의를 가르쳤을까. 온전히 기댈 곳이란 없다 해도 작은 심장을 부빌 수 있던 또 하나의 루비는 어떤 거울이 되어 여름을 비추었을까.
유년의 돌부리가 여전히 내 발목을 노려본다. 무뎌질 만큼 충분히 흘러간 시간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응시하는 뾰족한 눈동자. 날 선 아픔을 끌어안는 건 그래도 결국 품이라고, 품일 거라고. 아프고 아름다운 소설 한 편이 시처럼 작은 돌부리를 품는다. 작은 돌 사이에서도 풀이 필 거라고, 그게 일곱 살 그때의 여름이었고 루비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