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된다
나이키 영화에서 봤는데 대표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해. 조깅의 목적이 마라톤 선을 끊는 건 줄 알아. 근데 조깅의 목적은 뛰는 행위 자체야.
제대로 기억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대충 이런 말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내게 필요했다. 글쓰기는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언젠가 좋아하는 팟캐스트에서 작가님이 이런 말을 했다. 쓰기가 자신을 더 좋아한다고. 쓰는 행위에 대해 요즘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나는 '쓰기'에 부정적인 감정이 더 많아서 저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나에게 '쓰기'란 현실회피였으니까. 하지만 오늘까지 4번째로 글을 쓰고 있는데 생각이 달라졌다. '글쓰기의 목적은 글을 쓰는 행위 자체다.'라고 생각한 후부터 또 쓰는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
쓴다라는 건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내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사랑하는 모습도, 그렇지 않은 모습도 담긴다. 한마디로 쓰기를 애증한다. 워낙 상상력이 좋아서 윤리적 안전선 (최근에 읽은 모 작가님의 단어다) 이 없으면 나도 모르게 무서운 것들을 쓰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와 내 인생 가치관이 많이 충돌하기도 했다.
그러니 요약하면 무조건적으로 쓰기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위 문단과 같다. 하지만 쓰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이렇다.
쓰는 행위는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일상에서 나를 특별하게 한다. 특히나 현재 쓰고 있는 '내일'은 의미가 확실히 있는 글이라 그런 듯 하다. 이걸 쓰고 나면 나의 결심이 단단하게 세워질 것 같다. 인생에 대한 내 생각이 견고하게 하나의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 결국 쓴다는 건 나를 남기는 행위이지 않을까.
어떤 걸 남길지는 나의 선택인 것 같다. 하지만 소중한 생각을 남길 때 그건 의미가 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날 돌아보고 내 생각을 찬찬히 훑어 볼 시간은 많지 않다. 공부하기도 바쁠 것 같다. 무언가를 흡수하고 적응하기도 바쁜 나이이기 때문일지도.
21살의 나는 삶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내일'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의미적인 면을 제외하고, 기술적인 글쓰기에 대해 말하자면 단편을 쓰기 참 잘했다.
조금씩 어디까지가 내 한계인지 알게 되었고 동시에 가능성도 확인했다. 시점을 이렇게도 바꿀 수 있겠는데? 하는 부분들이 많다. 실은 '내일' 전에는 내 글쓰기에 대한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쓰다보니 내가 알겠다. 난 어디가 부족하고 어디는 더 가능성이 있는지.
요즘은 작가들의 루틴을 따라하려고 한다. 천선란 작가의 루틴을 에세이 책에서 찾아서 한 번 찬찬히 보았는데, 생각보다 내 생활과 맞을 것 같다. 그래서 해보려고 한다. 그 후로 외국 작가들의 유명한 루틴을 천천히 해볼 것이다.
'내일'을 쓰고 내 컴퓨터 파일에만 저장해두었다면 스스로 조금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올릴 수 있는 브런치가 있어서 '쓰고 올린다.' 라는 행위 자체로 글에 의미가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