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함께 하는 작가 자의식 생성기
"그런데 머리가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쉽게는 후지 산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혼자 남아서 실제로 자기 발로 정상까지 올라갑니다. 그러자니 시간도 걸리고 힘도 듭니다.
그리고 그런 끝에야 겨우 '아, 그렇구나. 이게 후지 산인가'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6p)
하루키는 작가는 머리가 나쁘다고 말한다. 똑똑한 사람은 소설을 못 쓴다고 한다.
사실 그건 내 관심 밖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하루키가 (나를 위해 미리) 소설을 왜 쓰는지 생각정리를 해놓았다는 것이다.
1. 소설을 왜 쓰는가?
해리포터를 한 줄로 말하자면 "평범한 소년이 마법사인 출생의 비밀을 알고 모험을 시작하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해리포터는 다르다. 해리포터는 내게 탈출구였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안내해줬다.
소설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이 그런 것 같다. 어떤 책에서 나를 만져주었고 그것으로 살아간 경험이 있다.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깊은 밑바닥의 내면을 그 책의 어떤 문장이 '터치'해준다. 그러면 그 가짜 이야기는 그 사람을 일으키고 살게 한다.
소설을 양극단에서 다르게 볼 수 있다. 소위 '뻥'이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뻥과 예술 사이. 그 간극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터치'당한 경험이 있거나 없거나. 그 차이다.
지구는 푸르다, 라는 간단한 문장을 알기 위해 100p를 읽으라고 하면 아무도 안 한다. 하지만 그 100p를 읽고 지구가 푸르다고 결론내린 사람은 다르다. 좀 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어쩌면 작가를 욕하고 그 자리를 뜰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인 것 같다. 누군가의 내면을 이해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이해받기 위해서.
하루키는 소설은 보정하는 특성이 있다고 했다. 치유하려는 성질이 있다고도 했다. 현실을 재구성해서 원하는 걸 만든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게 된다. 글이라는 건 어차피 현실이 아니다. 바꿀 수 없는 것 대신 글로 보정하고 치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쓰고 싶어할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더 좋은 세상을 소설에서 만든다. 혹은 나를 가장한 인물을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한다. 굳이 거창하게 '좋은 세상'이 아니더라도, 모험/재미/흥분을 위해 난 소설을 써온 것 같다.
결론적으로, 소설을 왜 쓰는가?
-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이해받으려고 하지 않는 나를 이해받기 위해서
- 이해받았던 순간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어서
- 나를 치유하고 보정하기 위해서
-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좋은 세상' 혹은 모험/재미/흥분을 느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