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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문] 그레이 맨, 루소 형제

믿을만한 재료와 레시피로 깔끔하게 차려낸 맛있는 분식 한상

by 김주렁

0. 들어가며


루소 형제라이언 고슬링첩보 액션. 이 세 키워드가 어우러지는 것이 쉽게 연상되지는 않았는데, 작품을 보고 나니 그 맛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라고 하는데, 스토리 측면에서는 비약도 다소 있었지만 엔터테인먼트 관점에서는 간결한 템포와 액션에 강점이 있었다. 스낵 컬처 느낌이 있었고, 영화관에서 봤어도 좋았을 것 같다.


스토리 얼개가 그렇게까지 탄탄하지는 않았어서, 주요 키워드 위주의 감상을 남긴다.


줄거리 (출처 : 네이버 영화)
그 누구도 실체를 몰라 `그레이 맨`으로 불리는 CIA의 암살 전문 요원이 우연히 CIA의 감추고 싶은 비밀을 알게 되고, CIA의 사주를 받은 소시오패스 전 동료에게 쫓기며 시작되는 액션 블록버스터

덧. 넷플릭스 영화 역대 최고 제작비 공동 1위라고 한다. (2억 달러)


1. 그레이 맨. 회색이라는 키워드


그레이 맨. 단어 그대로 생각해보자면 회색 영역에 걸쳐진 사람이다. '그레이 존'이라는 용어는 타 부서와 업무 영역이 겹쳐 양쪽 모두의 책임감이 약해지는 업무를 설명할 때 사용된다. 색상표에서 보자면 회색은 흰색과 검은색의 중간지역이다. 하지만 특정 위치만 회색인 것은 아니며, 중간 영역의 대부분이 회색으로 우리에게 인식된다. 단순히 색 자체만 놓고 보자면 그림자, 매연, 뒷골목 등의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한다.


회색은 위와 같이 모호하고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의 제목이자 주연인 라이언 고슬링을 대표하는 그레이 맨이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음영 속에 감춰진 존재를 표방하고 있었다.


이처럼 존재 자체가 모호한 회색 영역의 사람은 편할 대로 소모되고 활용되기 좋다. 흔적이 뚜렷한 사람은 맘대로 쓰고 버리는 장기말처럼 휘두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에라 프로젝트는 범죄자를 그레이 맨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언제든 잘라낼 수 있는 도마뱀의 꼬리 같은 존재가 CIA에게 있어서는 시에라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2. '시에라' 프로젝트에 대한 사견


소설 원작의 영화라서 책을 읽으면 세세한 설정까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선은 영화만 본 입장에서 '시에라'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남겨본다.

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었던 시에라(Sierra)의 의미 중에서 아래 2개가 눈에 들어왔다.

- 시에라, 산맥(특히 스페인·미국에서 봉우리들이 뾰족뾰족하고 가파른 산맥)
(출처 : 옥스퍼드 영한사전)
- 통신용어 상 'S'


먼저 눈이 갔던 것은 통신용어였다. 첩보영화라는 측면에서도 일맥상통했고, 'Secret'도 함께 연상되었다. 마침 라이언 고슬링의 코드넘버도 6 (Six)였던 것, 작중 짧게 언급된 007의 7도 Seven인 점 등 여러모로 S와 많이 엮인 것 같다.


뾰족하고 가파른 산맥이라는 뜻은 크게 와닿지 않았었는데, 라이언 고슬링의 팔에 새겨진 시시포스(Sisyphus) 이야기와 엮어서 보니 그럴듯한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시에라 6(라이언 고슬링)과 그의 조력자인 피츠로이의 조카와의 대화 중, 그녀가 시에라 6 팔에 있는 문신의 의미를 묻는다. 그는 그리스인 이름이라며 얼버무리려 했지만, 계속되는 반문에 장단을 맞춰 대답해준다. (문답이 그렇게까지 흥미롭지는 않았어서 아래에 별도로 남긴다.)


덧. 시에라6와 피츠로이의 조카의 문답
라이언 고슬링의 팔의 문신을 보게 되면서 대화가 이어진다. 그리스 남자 이름이라고 얼버무리려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에 그는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왜냐고 묻는 아이에게 그는 신들이 시켜서라고 답한다. 그녀는 다시 '바위가 필요했데요?'라고 묻는다. 그는 다시 '벌주려고 그랬을걸'이라고 답한다. 시시포스가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냐는 물음에 그는 올라가면 알려주겠다고 답한다.


산의 정상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는 끊임없이 돌을 굴린다. 정상에 도달한 바위는 다시 산 아래로 떨어지며, 시시포스는 이를 반복한다. 이 모습 자체가 범죄자를 그레이맨으로서 끊임없이 무모한 임무로 내모는 시에라 프로젝트의 내막이 아니었을지 싶은 생각을 해보았다.


3. 작품의 핵심이 되는 얼개. 불신의 굴레.


작품에서 반복되는 메시지가 있다면, 내가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시에라 6가 제거한 것은 동료인 시에라 4였고, 그에게 임무를 내리는 CIA는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시에라 6을 도와주는 피츠로이도 조카 납치 때문이기는 하나 그를 배신하게 된다. 시에라 6의 조력자 역할인 것 같았던 신분 세탁소는 그를 적에게 팔아넘기고자 우물에 가뒀으나, 그 또한 역으로 그 적들에게 사살당한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다크 나이트' 오프닝 신과 얼개가 닮아있다. 그들은 모두 한패인 것처럼 은행을 습격하지만, 본인의 역할을 다한 뒤에는 그다음 담당자에게 사살당한다. 이 굴레는 끝까지 반복되다가, 마지막 담당자가 의뢰자 본인 (조커) 임을 보여주며 장면이 막을 내린다.


나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 믿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작품은 지속적으로 반문한다. 이런 메시지가 첩보 요원을 주연으로 한 작품과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4. 주연 배우들에 대한 생각


노트북, 빅쇼트, 라라 랜드의 라이언 고슬링이 보여주는 액션.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첩보와 잘 어울렸다. 장르는 모두 다르지만 배우가 그 분위기를 잘 이끌어내는 것 같다.


크리스 에반스 (캡틴 아메리카, 설국열차 커티스)의 악행에 다소 이질감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연기를 못한다는 것은 아니나, 개인적으로는 표현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그렇게까지 넓지는 않다는 느낌이었다. 연기력과는 별개로 배우에게 특정 배역이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각인되었을 때의 역기능이 있는 것 같다.


덧. 크리스찬 베일
위와 비슷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개인적으로는 크리스찬 베일이 Coverage가 꽤 넓은 배우라고 생각한다. 바이스, 다크 나이트, 포드 V 페라리, 빅쇼트, 프레스티지, 아메리칸 사이코 등 선악과 직업, 역할에 대한 각기 다른 이미지를 선보이면서도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는 것 같다. (배우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가 있어서 편향된 의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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