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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이라는 그 거대한 성전

최소한의 거짓말조차 통하지 않는 두려움의 공간.

by 홍지승

연습을 하자.

인생의 전부가 연습이 아니던가?

다시 엎드리는 연습을 하자.

그다음에 기는 연습.

그다음에 걷는 연습.

그다음에 다시 뛰는 연습.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깊이 묻히고

언제든 영혼이 이 땅에 남아 모든

돌이며 풀이며 별과 꿈과 향기가 그윽 할 때까지...

- 이외수 「말더듬이의 겨울수첩」중에서 -





연습실의 정체


연습이란 건 그런 것이었다. 끝도 한도 없이 해야 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해 보지 않아서 그 고됨을 알지 못했고 그렇게 연습에 몰두해 본 적이 없을 때는 얼마만큼의 연습과 집중을 해야 하는지 가늠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 연습실에서 느낀 연습의 총량은 적당히, 알아서, 요령껏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학원 안 한쪽에는 연습한 만큼의 숫자를 화이트 보드판에 한자로 바를 정(正) 자로 2번을 써야 집에 갈 수 있었는데 그 말인즉, 작품연습의 경우 최소 10번은 해야 집에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보통 발레 작품 솔로(개인 독무) 시간이 길면 2분 아니면 1분 30초 정도로 입시 작품이 만들어지는데 숫자만 들으면 누구나 "뭐, 그까짓 것.. 얼른 하고 집에 가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수 도 있을 테고 작품 연습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을 땐 나 역시도 그렇게 적당히, 알아서, 요령껏 잘하고 가면 된다고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웬걸, 화이트 보드판의 쓴 숫자보다 작품 검사를 하시는 선생님은 그때는 학원에 cctv도 없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순서대로 나와서 작품을 검사하실 때면 귀신처럼 내 연습량을 정확히 캐치해 내셨다.

특히나 마른 몸매를 위해 매일 같이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라는 말을 목숨처럼 알고 지내던 시기에 군것질이나 뭔가 먹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먹었어도 선생님은 그것 또한 바로바로 알아내셨다. 분명 숨어서 먹거나 몰래 먹었다고 가정하면 보지 않고 정확하게 상대방의 상태를 파악해 내는 그 재주는 거의 귀신과 동급처럼 느껴졌고 최소한 그 앞에서 거짓말을 해서 괜스레 더 혼나고 욕먹을 바엔 아예 처음부터 이실직고하고 잘못했다고 하며 빠른 사과를 구하는 편이 나을뻔한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곤 했다.

거짓말이 무섭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모르지 않았지만 발레학원에서의 거짓말을 좀 다른 의미의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가족 특히나 엄마가 아닌 경우에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심 있게 보고 잔소리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실제론 그런 상황이 참 낯설고 당혹스러웠고 그런 이유로 처음엔 "몰래 먹을 수도 있지.. 뭐"하던 마음에서 "어차피 들킬 것, 안 먹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바뀌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 건 아니었다. 예술은 생각보다 집요 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던 것 같다. 절대적으로 대충 해서 되는 그런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이 일을 선택하면서부터는 나는 하지 말이야 하는 일을 하고도 좋은 결과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되었다.



냉정하고 차가운 공간에서 홀로 서 있는 나.


연습실은 보기와 다르게 철저하게 자신을 마주해야 하는 냉정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거울을 통해 비치는 모습이 최소한 거짓으로 똘똘 뭉쳐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그 공간 안에서의 행위들은 더 조심스럽고 더 빛나는 칼처럼 날렵하게 그렇게 움직여야 하는 곳이었다.

적어도 타인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이기가 힘들었던 그곳은 그렇게 높고 높은 성처럼 그렇게 내게 순백의 진실과 춤에 대한 진심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갈 때만큼은 적어도 복잡하고 나쁜 마음정도는 다 버리고 순수하게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지금은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수석으로 활동하고 있는 발레리노 김기민을 2005년 8월 정도에 무용연습실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내가 그를 처음 봤을 때 그는 초등학생이었고 자기가 왜 발레를 얼마큼 좋아하는지에 관해 열변을 토하던 꼬마이었다. 아마 그의 스승인 이원국 선생님을 따라다니면서 수련 하던 시기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우연찮은 기회에 내가 몸 풀러 다니던 발레 스투디오에서 특강을 할 시기에 만나게 되었던 행운을 나는 아직도 어제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한다.

당시 그 아이는 얼마나 말을 잘하고 똑똑하던지 "너 진짜 나중에 유명해지면 내게도 꼭 인터뷰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했을 때 아이다운 순수함으로 알겠다며 하늘땅, 별땅을 외치며 손가락 걸고 약속을 했지만 훗날 그가 그렇게 대성하여 마린스키 내한공연으로 한국에 와서 공연을 했을 때도 나도 그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긴 대기줄을 서서 그에게 사인을 받았지만 그는 이미 나를 기억할 이유조차 없었다.

예전에 배우 윤여정 씨가 배우들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는 mc의 질문에 촬영장으로 가면 다 볼 수 있다고 말하신 적이 있다. 그렇다면 무용수를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공간이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단연코 무용 연습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공간에서 만나는 무용수들의 땀과 노력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느낀다면 그 엄청난 에너지와 특별한 기운이 내게 선물처럼 다가올 수 도 있을 거라고도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늘 춤을 보고 그 특별한 에너지를 받기 때문에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발레 무용수들은 존중받아 마땅한 예술가들이기도 하고 내가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애정하는 예술가들 그룹이기도 하다. 춤은 어렵고 쉽게 자기의 마음을 내어주진 않지만 오랜 세월 춤을 보다 보니 춤을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그래서 아는 것만큼 보이고 아는 것만큼 느낀다는 사실이 늘 내게 어떤 깨달음으로 다가오기도 그런 이유로 가장 큰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사진출처: 김윤식 사진작가(대문사진)

2024 k-art 발레단 고궁 음악회 리허설. Yoon6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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